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5
#114.
정립하다 (2)
― 어디야?
“이제 도착했어.”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진호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30분이나 남았건만, 한세연도 일찍 나온 모양이다.
― 나 카페에 있어.
“카페 어디?”
― 정문 앞 카페, 드리머로 와.
“알았다.”
강진호는 전화를 끊고 카페를 찾았다. 정문 건너편 이층 건물에서 카페를 발견한 강진호가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이층으로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한세연이 손을 들었다.
“여기야.”
“음.”
강진호가 한세연이 있는 곳으로 가 건너편에 앉았다.
“뭐 하나 안 마셔?”
“……그러네.”
카운터로 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강진호가 진동 벨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간만에 보는 한세연은 뭐랄까, 분위기가 좀 변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위기가 변했다기보다는 처음에 그가 알고 있던 한세연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겼다.
“군대는 어때?”
“사람 사는 곳이지.”
“오올, 전형적인 대답인데?”
한세연이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나? 나야 뭐…….”
한세연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한세연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진동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만.”
강진호가 진동 벨을 들고 카운터로 가 커피를 받아 왔다. 다시 자리에 앉으니 뭔가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풍겼다.
“간만에 보니 좀 어색하다, 야.”
“그래?”
한세연의 앞에는 교재가 놓여 있었다.
“공부했어?”
“응. 할 일도 없어서 미리 나와서 공부나 좀 하고 있으려고 했지. 잘되지는 않았지만.”
“왜 잘 안 돼?”
“그냥 뭐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 주말에 공부하려니 잘될 리가 있겠어?”
“그렇구나.”
“언제 나왔어?”
“삼 일 전에.”
“흐응.”
한세연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향이 나쁘지 않았다. 강진호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군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한참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걸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군대에서만 있다 나온 강진호가 새삼스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유민이는 봤어?”
“응.”
“그래?”
한세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꾸욱 닫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만이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학교는?”
강진호가 먼저 말을 꺼내자 한세연이 무심한 듯한 어조로 강진호의 말을 받았다.
“그냥 다니고 있지.”
“수업은 받을 만해?”
“어차피 1학년 수업인데, 뭐가 그리 어렵겠어. 남들 다 하는 거니까 그냥 받는 거지.”
“그래.”
대화가 자꾸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어 나갈 말을 찾는 것도 이상하다는 느낌에 강진호는 말없이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밥은 먹었어?”
“아니.”
“그럼 밥 먹으러 가자.”
“그래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안 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강진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세연이 입을 열었다.
“진호야.”
“응?”
“잠깐 앉아봐.”
강진호는 대답 없이 자리에 앉았다. 한세연의 말투와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이 느껴졌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말을 꺼내기가 좀 이상해서 말을 못했어.”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고.”
한세연이 자신의 옆에 놓인 식어버린 레몬 티를 마시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머뭇대는 한세연을 보고 있자니 강진호도 가습이 답답해져 왔다.
“군대 가기 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전에?”
“내가 그랬잖아, 휴가 나와서 박유민한테 먼저 연락하면 너 죽여 버릴 거라고.”
“그랬나?”
강진호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는 것 같다. 그때의 상황이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리 말을 듣고 나니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미안하다. 내가…….”
“아니, 그런 말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한세연은 레몬 티의 스트로우를 휘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먼저 연락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너한테 있어서 내가 그만큼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거지.”
“…….”
“그래서 그냥 그런 것뿐이야. 알게 된 거야, 그냥 그렇다는 걸.”
“그게 아니라…….”
강진호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에게 박유민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어서 나오자마자 연락을 한 것뿐이야. 그러고는 보육원에 일이 터져서 수습을 했던 거고.”
“응, 알아.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이유도 있겠지. 너는 이유 없이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한세연의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세연이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화 한 통 해줄 여유도 없었어?”
“…….”
“바쁜 거 알아. 그런데 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전화 한 통 해주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거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미안하다.”
강진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한세연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네가 원래 그런 것 잘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건 알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아, 얘는 정말 무심한 타입이구나. 내가 그걸 감안해야 하는구나.”
한세연은 조금은 처연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너는 무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한 거였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강진호는 한세연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세연의 말은 더 이상 강진호가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 버렸다.
“군대에서 내 생각은 했니?”
“음…….”
고개를 끄덕여야 할까?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세연이 말하고 있는 생각이 강진호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생각’이 아님을 알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사람이 무심한 게 아니라 무심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거라는 말.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상대적인 거라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대.”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겠다.”
“아냐. 네 잘못이 아냐. 나는 지금 누가 잘못했는가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조금은 답답하다는 듯 한세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좀 웃기긴 하지만 말이야. 내가 네 여자 친구도 아닌데 연락을 먼저 하니 안 하니 하는 걸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사실 좀 웃기잖아.”
강진호는 대답 없이 가만히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오고 있는 말이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강진호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그냥 내 생각에는 나도, 너도…… 좀 어렸던 것 같아. 나는 너무 성급했고, 너는 너무 무심했지. 누구의 잘못이냐가 아니라, 우린 그냥 서로를 배려할 줄 몰랐던 거야.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무작정 네가 나를 좋아해 줄 거라고 믿었던 거고.”
“나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알게 됐어. 너를 좋아하다 보니까……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잃어가는 것 같아.”
“…….”
“예전에는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다 없어지고, 연예인이 되겠다는 꿈도 버렸어. 그리고 지금은 너를 따라 대학에 왔고 홀로 남겨졌지.”
“세연아.”
“원망하는 거 아니라니까. 네 잘못 아니라는 것도 알고, 돌려서 너를 까는 것도 아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한세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너를 알고 나서는 나는 나를 잃어버렸어. 예전에 당당했던 내가 없어져 버렸어. 어느 순간 그렇더라고. 네가 군대를 가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게 뭔지 알아?”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뭐하지?”
“…….”
“그래, ‘이제 뭐하지?’였어. 아, 진호가 군대에 갔는데 잘 지낼까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네가 없어지니까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강진호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말은 강진호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좀 찾아보려고, 예전에 자신감 넘치던 한세연으로 좀 돌아가 보려고.”
“그래.”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박유민은 강진호를 만나고 인생이 좋은 쪽으로 바뀌었지만, 한세연은 딱히 강진호에게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강진호와 함께한 시간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강진호가 없으면 강진호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너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지. 사람이 같이 서고 싶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고, 급이 맞아야 하는 건데……. 내가 알던 너를 계속 생각하다 보니 괜찮을 거라고 착각했나 봐. 내가 네 여자 친구가 되고 싶었으면 내가 내 스스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내가 느끼는 거야.”
강진호는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이제는 공부도 하고, 스스로 가꾸기도 해서 나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타깝고 속이 상하는 기분이지만, 한세연이 하고 있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했다.
“말하고 있다 보니 웃기다. 내가 뭐라고.”
한세연이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강진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 지금도 친구지만 말이야.”
“그래.”
한세연이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그녀가 환히 웃었다.
그런데도 그 웃음이 더욱 처연하게 보이는 것은 강진호의 착각일까?
“너무 어렸던 것 같아. 너나, 나나……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알면 다시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
“먼저 일어날게.”
“밥은?”
가방을 챙기던 한세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지금 같이 밥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 그냥 가렵니다. 휴가 잘 보내고 들어가세요, 강진호 씨.”
“그래, 알았다.”
“……갈게.”
한세연은 그 말을 남기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가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강진호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은 채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참 어렵구나.’
세상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저 살아간다는 것도 참 어려웠다.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강진호가 밖으로 나왔다. 구석에 있는 흡연 구역으로 발을 옮기고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미안하다.’
조금은 어려서라고 하지만, 결국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강진호였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조금만 더 마음을 썼다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그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지금 흩어져 가는 이 담배 연기처럼 그와 한세연의 인연이 흩어져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다시 이전의 즐거웠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강진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미안하다.”
강진호는 그 한마디를 뇌까리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