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52
#1151.
약진하다 (1)
한은솔은 멍한 얼굴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전면 유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기죽네.’
이제 와 촌놈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한은솔도 나름 연예인 매니저가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잘나간다는 곳은 빠짐없이 다 다녀본 몸이다.
일반적으로 연예인 매니저라는 직업이 워낙 좋고 비싼 곳만 다니다 보니 연예인병에 시달리다 패가망신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건물의 위용에 쫄 이유는 없다.
이곳이 이제부터 한은솔이 출근해야 할 곳만 아니라면 말이다.
한은솔이 마른침을 삼켰다.
국내 대형 기획사들도 이제야 돈을 좀 벌어서 낡아 빠진 사옥을 이전하는 중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사는 연예인들과 얽혀 있다는 것 때문에 기획사들도 나름 잘나간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기획사에서 잘나가는 삶을 사는 이는 사장뿐이다.
투자?
투자야 하지.
그런데 대부분의 업무를 외부에서 봐야 하는 연예인들 때문에 사옥에 투자를 하는 멍청한 사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충 인테리어나 하고 말지.
‘쫄지 말자.’
한은솔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봐야 건물 아닌가.
용이 사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가 사는 것도 아닌데, 쫄 이유가…….
아, 강진호는 사는구나.
고개를 휘휘 내저은 한은솔이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9층이라고 했던가? 여기…….
그때였다.
“뭐여?”
안내 데스크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한은솔을 바라봤다.
“잡상인 안 받아.”
“…….”
뭔가 말을 하려던 한은솔이 입을 다물었다.
‘미국 경찰이야?’
경비복 같은 걸 입고 있는데, 그가 아는 경비와는 그 이미지가 너무 달랐다. 터질 듯한 어깨와 셔츠가 찢어져 나갈 것 같은 거대한 대흉근은 액션 영화에서나 보던 경찰을 연상시켰다.
한국 경비원의 친근한 이미지를 상상하던 한은솔에게는 문화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잡상인 안 받으니까, 나가봐.”
“아, 그, 그게 아니구요…….”
한은솔이 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안 나가?”
“그, 그게 아니라… 저 여기 출근하러 왔습니다. 여기 소속이라…….”
“출근?”
경비가 눈을 찌푸리더니, 데스크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그 덩치가 가까이 다가오자 영화의 장르가 액션에서 호러로 바뀐다. 그게 아니면 스릴러든가.
“이 새끼가 나랑 장난 까나. 내가 여기 직원 얼굴을 다 아는데 어디 사람을 속여 먹을라고. 맞고 갈래, 아니면 그냥 갈래?”
“…….”
“어떻게든 먹고살아 보겠다는 그 의지는 존중한다만…… 아그야, 여기는 그런 데가 아니다. 좋게좋게 이야기할 때 나가라? 형 무서운 사람이야.”
“저, 정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이 새끼가?”
“정말이에요. 저 오늘부터 MK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합니다.”
“엔터테인…… 뭐?”
경비가 눈을 크게 떴다. 한은솔을 위아래로 훑어본 경비가 살짝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지, 직위가 어, 어떻게 되시는…….”
“아, 그…….”
한은솔이 뒷머리를 긁었다.
“명목상은 일단 부장인데…….”
“부, 부장님?”
경비의 얼굴이 순간 파래졌다.
“그…… 잠시만요.”
경비가 후다닥 안내 데스크로 달려가 뭔가를 뒤적이더니 서둘러 다시 달려왔다.
“그럼 성함이 혹시…….”
“한은솔입니다.”
“힉!”
진짜 놀란 듯 딸꾹질을 하는 경비를 보며 한은솔도 긴장했다.
‘이렇게 놀랄 이유까지 있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가서…… 시정하겠습니다!”
경비가 격하게 고개를 숙이자 한은솔이 되레 놀라 말렸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뭐라구요.”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짝 군기가 들어간 경비원이 정중한 자세로 엘리베이터로 앞장을 섰다.
과한 친절을 이해하지 못한 한은솔이 어정쩡한 자세로 경비의 뒤를 따랐다. 그와 다르게 앞서가는 경비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에 들은 말이 뇌리에 재생되고 있었다.
“니들끼리 무슨 짓을 하는 건 상관없는데, 여기는 총회가 아니다. 사고 치는 새끼는 내가 친히 묻어버리겠다. 그리고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강조하는데, 니들끼리 처노는 거랑 사내의 타 부서랑 처노는 건 구분해라. 특히 엔터테인먼트 부서랑 트러블 생기면 내가 친히 모가지 뽑아버린다.”
그 말을 한 것은 정말 사람 목을 뽑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그 이현수니까.
경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부장이면 그로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상급자다. 그런데 그런 상급자를 위협하고 욕까지 했으니, 만약 이 사실이 이현수의 귀에 들어가면 산 채로 껍질을 벗기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저…… 부, 부장님.”
“예?”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드립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가 부담스러워요.”
“그러니…… 이 실장님에게는 이 말이 안 들어가도록 좀…….”
“이 실장님요?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라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경비가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눌러주었다.
한은솔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러고는 문이 닫힐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경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탁.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9층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 한은솔이 벙 찐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황당하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늦었어?”
“……누님.”
살짝 짜증 섞인 얼굴로 최연하가 한은솔을 구박해 댔다.
일상적인 일이다. 이제는 저 살짝 찡그린 얼굴이 최연하의 평범한 표정으로 인식될 정도니까.
아니, 오히려 그걸 감안하면,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라고 해도 좋았다.
“처리할 게 어디 한두 개예요? 소속사는 난리지, 빼야 할 짐은 많지, 이관해야 할 것도 한둘이 아니지.”
한은솔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개업식도 참가 못하고 죽어라 뛰어다닌 사람한테 왜 그러세요?”
“너, 일 많다고 시위하는 거야?”
“……그건 아니구요.”
“아니면 사장 못 됐다고 짜증 내는 거야?”
“절대 아니라구요!”
사장이라니.
한은솔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MK 엔터테인먼트를 개업하며 최연하는 한은솔을 사장으로 올리려고 했다. 본인이 직접 사장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실질적으로 MK 엔터테인먼트를 주관하는 이가 최연하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녀가 직접 사장 자리에 올라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현역으로 뛰는 연예인이 사장 자리에 오르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일단 직위를 가지고 사업을 한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섭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면도 있고…….
― 늙어 보이잖아.
……라는 아주 간명하고도 깔끔한 이유도 있었다.
한은솔도 그 점은 동의했다.
게다가 아무래도 최연하는 현역이다 보니 회사를 비워야 할 일이 많다. 어쩌다 해외 스케줄도 소화해야 하는 그녀가 사장 자리를 맡으면 업무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야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대체자로 고려된 이가 바로 한은솔이라는 점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한은솔이 사장 자리에 앉는다?
그건 절대 좋은 게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상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나이도, 경력도, 재력도 별것 없는 한은솔이 사장의 자리에 앉는다면, 기본적으로 MK 엔터테인먼트를 무시하는 시선이 깔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은솔 역시 바지사장 취급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생각 있으면 이야기해. 아직은 바꿀 수 있으니까.”
“아니. 정말 생각 없어요.”
“진짜?”
“누나,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그건 회사에게도, 제게도 그리 좋은 방향이 아니라니까요.”
“적어도 네 경력은 생기겠지.”
“이미지 망치는 경력은 경력이 아니라 흑역사예요. 그리고 저는 아직 현장 뛰는 게 좋아요. 그리고 막말로…….”
한은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없으면 누가 누나 매니저 봐요?”
“사장이라고 매니저 못 봐?”
“사장이 이사 데리고 현장 다니는 회사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음…… 그러네. 그럼 다른 매니저 붙이면 되잖아.”
“네?”
“다른…….”
“네?”
“맞을래?”
한은솔이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매니저라, 다른 매니저…….
그런 게 된다면 고민도 하지 않는다. 한은솔이 MK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고 최연하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정하면서 세운 목표는 5년 내에 최연하를 맡아줄 수 있는 새로운 매니저를 육성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MK 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매니지먼트사로 키워내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목표였다.
“여하튼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후회할 일 없어요. 지금 이 자리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한은솔이 이마를 훔쳤다.
1층에서 받은 대접을 생각하니, 팔다리가 오그라드는 것 같다.
애초에 연예인 매니저라는 건 그런 직업이다.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굽실대야 하고, 항상 고개를 낮춰야 한다. 대형 연예인의 매니저 중에는 지들이 연예인이라도 된 양 호가호위를 하는 놈도 있다지만, 최연하의 매니저는 그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다 발각이라도 된다면 당장에 하이힐이 이마에 꽂힐 것이다.
그리고 팬에 대한 갑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최연하는 팬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타입이다. 실제로 최연하는 팬의 지지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아이돌들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연기력과 미모로 웬만큼은 현상 유지가 가능한 배우지만, 아이돌 이상으로 팬들을 관리했다.
그 지랄 맞은 성격에도 롱런할 수 있던 이유는 팬을 돈 물어다주는 기계쯤으로 취급하던 시절에조차 단 한 번도 팬을 무시하지 않은 덕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치열한 자기 관리가 수반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여하튼 그렇게 관계자에게 무시받고, 감독에게 구박받고, 팬들에게 치이고, 연예인에게 차이는 게 매니저의 역할이다.
참을 인 자를 전신에 문신처럼 새기고 살아야 그나마 버틸 만하다.
그런데 갑자기 윗사람 대접이라니.
세상에 아랫사람이라고는 후임으로 들어오는 매니저와 지나가던 동네 똥개밖에 없던 한은솔에게는 상전벽해와 같은 일이었다.
“저, 진짜 부장 맡아야 해요?”
“왜?”
“아니…… 좀 쫄려서.”
최연하가 피식 웃으며 한은솔을 바라보았다.
“야, 뭐가 그렇게 쫄려?”
“직원이라고는 누나하고 나, 둘뿐인데, 하나는 이사고, 하나는 부장이고! 이게 말이나 됩니까?”
“직원 뽑을 거잖아. 애들 오잖아.”
“그래도 그렇죠. 그리고 저는 새로 시작하면 저 어디 구석에서 사무실 하나 빌려서 할 줄 알았죠. 이렇게 거창하게 뭐가 시작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너도 참 병이다.”
최연하가 혀를 찼다.
보통 매니저로 저만큼 짬이 차면 사람이 대범해지기 마련인데, 한은솔은 여전히 신입 매니저처럼 어리바리했다.
‘뭐, 그게 좋은 거지만.’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굳은 결심으로 초심을 지켜 나가는 것과, 그냥 신입 물이 안 빠지는 것의 차이는 있겠지만…… 뭐, 어떤가. 결과만 같으면 그만이지.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최연하가 대답하자,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