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55
#1154.
약진하다 (4)
배재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가 지옥인가?’
아니, 지옥치고는 깔끔하다.
MK에 마련된 이현수의 업무실은 조금 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간소했다.
기본적으로 이현수가 MK보다는 총회 쪽에 집중해서 일을 하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삭막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 삭막한 공간에 이현수가 떡하니 앉아 있으니 뭐라고 할까…….
‘무슨 범죄 모의 하는 곳 같잖아!’
저 인간은 악의 축이고 말이지.
“앉아.”
“예!”
배재민이 바로 자리에 앉았다.
“커피?”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
안 얼게 생겼냐?
배재민이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연수 당시에 강진호도 지척에서 겪은 배재민이지만, 이 긴장감은 조금도 가시지를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강진호가 총회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배재민 같은 일반 회원들은 강진호와 얽힐 일 자체가 없다.
상대에 대한 껄끄러움은 반드시 그 지위와 비례하지 않는다. 군대에서도 사단장이 뜨면 부대가 뒤집히니 어쩌니 해도 사단장이 껄끄러운 일반 병사는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한 병사에게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맞선임이나, 부대 내의 간부들이다. 사단장이 그들보다 아득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더 어렵지는 않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배재민에게는 강진호보다 이현수가 서른여섯 배 정도는 더 껄끄러웠다.
딱히 얽힐 일이 없는 강진호와는 다르게 이현수는 총회 내의 사무직들을 총괄하는 위치가 아니던가.
이제는 MK로 넘어와서 소속이 조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걸 믿고 뻣뻣하게 굴었다가는 언제 사지가 묶여 총회로 송환될지 모른다.
그러니 ‘나 죽었다’ 하고 굽힐 수밖에.
‘성격이라도 좋으면 말을 안 하지.’
지위도 까마득하게 높고, 일도 잘하고, 윗사람으로부터 평판도 좋은 상사가 성격까지 더럽다면?
그보다 지랄 맞은 상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배재민이 생각하기에 이현수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사 중에서도 최악의 유형이었다.
게다가 본인의 성격이 더럽다는 걸 전혀 숨기려 하지 않고 대놓고 드러내고 다닌다는 게 더 문제였다.
차라리 위선이라도 떨어주면 그 만들어진 선에 기대 숨이라도 쉬겠구만, 이건 뭐 인성이 존재하는가의 경지까지 가버리니…….
“무슨 생각 하지?”
“아, 아닙니다.”
게다가 귀신같기도 하다.
곽현태도 그의 옆에서 바짝 얼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배재민보다야 한 끗발 높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대리.
직책은 실장이지만 실제로는 이사보다 권한이 막강하다고 불리는 이현수의 앞에서는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불렀는데…….”
“예?”
“배재민, 연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더군.”
“가, 감사합니다!”
“곽현태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서류를 뒤적이던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동작인데도 왠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문제는 없는지 확인을 해봐야 하는데 말이지.”
“예?”
“이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하는데 다들 괜찮다고만 한단 말이지.”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불만이 있고,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해도 이현수의 앞에서 불만을 늘어놓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장난 어린 투정이야 할 수 있다고 해도 감히 진지하게 불만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리를 만들었지.”
“굳이 저희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눈에 띄어서.”
“…….”
“…….”
“농담이고.”
진담인 것 같은데?
살짝 웃는 이현수의 얼굴을 보니, 정말 진담인 것 같다.
“연수 상위 입상자의 경우는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뒀지. 아무래도 성적이 좋아서 업무 부담이 적은 쪽의 말을 들어봐야 제대로 된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딱히 불만이랄 게…….”
“사소한 것도 좋아.”
이현수가 기지개를 켰다.
“다른 놈들처럼 옥상 가는 길이 회장실 앞으로 나 있어서 담배 피우러 가기 힘들다는 불만도 좋아.”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많은 법이지.”
이현수가 가볍게 웃었다.
“그런 불만이라도 좋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내가 여기에 상주하고 있으면 불만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알다시피 나는 여기가 아니라 총회에 상주해야 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복귀하기 전에 최대한 문제를 해결해 놔야 마음이 놓이거든.”
“이 부장님이 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현수가 턱을 괴고 배재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정까지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보고를 받을 수 있었나, 배재민?”
“죄, 죄송합니다.”
“빠져 가지고.”
배재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위기가 좋아서 일순 마음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분위기가 좋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총회의 실권자이자 사무실의 악마라 불리는 이현수다.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배재민의 상황을 풀어주려는지 곽현태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출퇴근이 영 그렇습니다.”
“음?”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사실 총회에서 여기까지 출퇴근을 한다는 것도 비상식적이잖습니까?”
“그렇지.”
“왕복으로 네 시간이 소모되는데…… 사실 이거, 사람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쪽도 대책을 세우고는 있는데…….”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제대로 숙소를 내주는 건 불가능하다.”
“돈 때문입니까?”
그 순간, 이현수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게 좀 민망하기는 하지만, 총회는 돈 때문에 허덕일 일은 없어.”
“…….”
“정확하게는 돈 때문이 아니라, 아직 인원이 확정되지 않아서야.”
“아…….”
2차 연수.
지금 재경에서는 이곳에 있는 사무직이 아닌, 2차 연수원들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1차에서 탈락한 이들도 2차 연수에 재도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연수가 끝나게 되면 1, 2차 연수를 통과한 이들 중 절반은 MK로, 남은 절반은 총회로 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직 MK에서 일할 사람들이 확정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적당히 인원대로 준비해 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아직 그 인원도 확정된 게 아니라서 말이야.”
“음, 그러네요.”
“그리고 이 근처에서 대규모로 방을 구한다는 게 쉬운 게 아냐. 총회 근처야 빈 땅이 넘쳐 나니까 대충 자리 잡아서 지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여긴 또 아니잖아.”
“예.”
“그리고 너희도 여기까지 와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총회 근처에서야 선택권이 없다. 총회는 산골에 박혀 있고, 근처에는 제대로 된 집도 없다. 그렇기에 총회 주변에서 살기 위해서는 차로 삼십 분이 넘게 걸리는 곳에 위치한 원룸촌에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기숙사 생활 말고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기껏 서울까지 올라와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싶은 이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기숙사에서 산다는 게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이득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저…… 실장님.”
“말해.”
“혹시 저희가 자가를 잡게 되면…… 전세금이라든가, 아니면 보증금 지원 같은 건 고려되고 있습니까?”
“아니.”
“…….”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걸 지원해 주는 건 여기서 일할 동안 걱정 없이 일하라는 뜻이잖아.”
“그렇죠.”
그러니 해주면 좋은 거지.
“그런데 너희는 퇴사를 안 하잖아?”
“……어?”
그러네?
다른 회사와는 다르다. MK에 들어온 무인들은 잘리지 않는 이상은 자발적으로 퇴사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절대 찾아볼 수 없다는 평생 직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럼 지원해 준 돈이 몇 십 년 동안 회수가 안 되는 건데, 그게 지원이냐?”
“…….”
“대신 대출은 생각하고 있다. 회사 명의로 무이자로 대출해 주고, 매달 월급에서 차감하는 방식.”
곽현태가 울상을 지었다.
“얼마나요?”
“십 년 상환할 거야. 그런 얼굴 하지 마.”
“……애가 둘이라 십 년 상환도 부담됩니다.”
“걱정하지 마. 월급 올릴 테니까.”
“예?”
곽현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진짭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너희 붙들고 농담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나?”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회주님…… 아니, 회장님 허가는 떨어졌어.”
“하지만 월급 올린 지 얼마 안 됐는데?”
“사무직 월급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 네 말대로 애들 키우고 하려면 돈이 부족하기도 하잖아.”
“실장님, 회사에 뼈를 묻…….”
“안 올려주면 안 묻고?”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사실 이현수가 사무직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진짜 고급 인력이다. 능력치가 이상한 쪽으로 퍼져 있어서 실제 업무에 그 능력치를 써볼 일이 없다는 게 문제일 뿐.
싸움 잘하는 사무직을 어디다 써먹겠는가.
다만, 쓸모없는 능력이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 이들의 가치를 인정해 줄 필요는 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정말 좋죠.”
“그럼 그 문제는 대충 해결된 걸로 하고, 당장 출퇴근이 문젠데…….”
배재민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응?”
“달방 잡으면 안 되나요?”
“달방?”
“예.”
배재민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MK에 출근하는 인원이 확정되기 전까지라면 모텔 몇 개 전세내서 기숙사 대용으로 쓰면 될 것 같은데요. 모텔이면 기본적으로 생활이 가능할 거고, 월 단위로 계약도 될 테니까요.”
“오!”
이현수가 탄성을 질렀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외지에서 일을 하는 업체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인데,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회의를 해야 하는 법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럼 해결되겠군. 빨리 추진해 보지.”
“그런데 돈이 만만찮게 들 텐데요?”
“괜찮아. 너희가 앞뒤로 한 시간씩 더 일해주면 그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겠지.”
“…….”
노동부에 진정 넣을 거다.
악덕 기업 같으니!
“오케이. 그럼 제일 시급한 건 해결이 되겠군.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나?”
“문제라기보다는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회주님이 갑자기 안 보이시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회주님?”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며칠 전부터 총회로 출근하고 계신다.”
“MK가 더 급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이현수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었다.
“저번에 실내에서 흡연하다가 소방차 온 뒤로 건물 내에서 담배피우지 말라고 구박을 좀 했더니, 삐쳤는지 총회로 가시더라.”
“…….”
“…….”
“찾아가서 좀 풀어드려야 할 것 같은데……. 나원.”
잘못되어 있다.
이 회사는 분명히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배재민은 눈을 감고 제발 이 회사가 잘 굴러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