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00
#1199.
베어내다 (4)
“다 실었어?”
“예!”
“그럼 이제 물청소해.”
“……예?”
“물청소하라고, 이 새끼들아. 여기 바닥 안 보여?”
방진훈이 바닥을 가리키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말라붙은 피와 탄 자국들이 엉망이었다. 이대로 버려두고 간다면 누군가 이 흔적을 발견할 게 빤하다.
박용철이 대표로 물었다.
“물은 어디서 끌어옵니까? 근처에 수도도 없는 것 같던데요. 소방차라도 부릅니까?”
“국가의 소중한 세금을 그딴 데 낭비할 수는 없지. 세금도 제대로 안 내는 너희는 소방차를 부를 자격이 없다.”
“……이제 세금 내는데요?”
“남들은 평생 내온 거 꼴랑 한 달 냈다고 생색내지 마라. 신병훈련소 수료하는 훈련병이 군 생활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는 걸 보는 기분이니까.”
뭔가 적절한 비유라서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저기 보이냐?”
“예?”
방진훈의 말을 들은 박용철이 고개를 돌렸다. 전투 중 부서진 창고의 문 뒤로 커다란 물탱크들이 보인다.
“양동이 좋은 거 있네. 저걸로 물 퍼 날라.”
“……제 눈에는 양동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양동이로 보이게 해줄 수 있는데, 잠깐 이리 와볼래?”
“양동이로 보입니다. 마법 같네요.”
“그래, 마법이다. 당장 퍼.”
“……물은 어디서 받습니까?”
“이 새끼, 또라이 아냐? 눈에 뵈는 게 다 물인데, 뭔 헛소리야?”
등 뒤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바다를 본 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 부러지겠네.’
아무리 그들이 무인이라지만, 물탱크로 바닷물을 퍼서 바닥 청소를 해야 한다니, 이건 인권유린이다.
하지만 어설프게 말대꾸를 했다가는 인권이 아니라 인생이 유린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방진훈의 부상 정도를 보고 있으면 불만이 있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전방에서 열심히 싸워준 보스에게 무슨 불만을 논할 수 있겠는가.
박용철이 살짝 경의가 담긴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야리냐?”
“…….”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경의는 개뿔이.
“해 뜨기 전에 빨리빨리 정리해라.”
“그런데 이사님.”
“왜?”
“저희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합니까? 남는…….”
쿵!
방진훈의 주먹이 사정없이 박용철의 머리를 후려쳤다. 박용철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아악!”
“이 새끼가 건방지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희가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있지 않냐, 이 말입니다.”
“그게 건방지다고, 이 새끼야. 니가 뭐라고 공무원을 부려 처먹으려고 해.”
“……아뇨, 연계를 하니까.”
“연계는 얼어 죽을. 연계는 국가대표 축구팀한테서 찾고, 우리는 그런 거 없다.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워, 이 새끼야.”
“……예.”
박용철이 궁시렁거리며 남은 이들을 이끌고 창고로 갔다. 창고로 우르르 몰려 들어간 이들이 물탱크를 들고 나와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방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적당히 눈가림은 되겠지.’
부서진 창고와 박살이 나버린 콘크리트들이야 그들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적어도 치울 수 있는 건 치워야 한다.
“끄응.”
방진훈이 옆구리를 움켜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위긴스가 나름 치료를 해줘서 이 정도지, 치료도 받지 못했으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응급실이었을 것이다.
‘그 새끼…… 셌지.’
정상적으로 맞붙었다면 방진훈은 가즈히로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괴감을 느끼냐고?
천만에.
자신보다 강자를 임기응변으로 이겨낸 건 대단한 일이다. 뿌듯하면 뿌듯했지, 자괴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게다가 임기응변이 통했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 방진훈의 실력이 지금처럼 올라오지 못했다면, 무슨 수를 동원해도 가즈히로를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딱 삼 개월 전이었으면 손도 발도 못 써보고 처 맞다 죽었겠지.’
자신이 강해졌다는 건 알고 있다. 무학이 상승했고, 내력이 늘었다. 당연히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렴풋한 느낌일 뿐, 스스로가 정확하게 어디쯤에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다.
가즈히로는 훌륭한 잣대가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방진훈이 승리를 온전히 즐길 수 없는 이유는, 지금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당장 강진호가 위험한 상황인데, 그 작은 승리를 기뻐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강진호를 도우러 가야 한다. 설사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방진훈이 고개를 돌렸다.
“응?”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사님, 김원혁입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아까?”
방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너…….”
가즈히로와 처음 맞붙을 때, 가즈히로에게 죽을 뻔한 녀석이다.
“너 괜찮냐?”
“예. 내장은 안 베여서…….”
붕대를 두른 김원혁의 배를 본 방진훈이 눈을 찌푸렸다.
“야, 부상 입은 새끼들은 다 병원 가라는 말 못 들었어?”
“부상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닙니다.”
“이거, 골 때리는 새끼네?”
방진훈이 콧김을 뿜었다.
“야, 이 새끼야. 칼에 찔린 상처가 그리 만만해 보이냐? 너, 뭐 영화 찍어? 총 맞고 칼 맞아도 대충 묶어놓으면 알아서 나을 것 같아? 인마, 세상에는 감염이라는 게 있어요. 별것 아닌 상처가 덧나서 골로 가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여하튼 이래서 요즘 어린것들은…….”
“정리가 끝나는 대로 바로 병원에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럼 이사님께서도 병원에 가보셔야…….”
“나는 괜찮아.”
“예?”
“나는 세균보다 강하거든.”
“…….”
김원혁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그런데 왜?”
“예?”
“뭐 할 말 있어서 머리 들이밀고 있냐고?”
“아…….”
김원혁이 뒷머리를 긁었다.
“감사드리려고.”
“헛소리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인마. 우리 애들 싸가지 없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내가 오늘 구해준 놈들이 트럭으로 세 트럭은 될 텐데, 그중에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하고 가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총회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걸 실감하는 김원혁이었다.
그 역시 단순히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방진훈을 찾아온 건 아니니까.
“사실…….”
김원혁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양심이 있으면 좀 그렇지. 다른 애들은 뺑이 치는데 너는 편하게 앉아서 말이나 하겠다는 거 아냐?”
“저 부상자입니다.”
“아까는 괜찮다며, 이 새끼야?”
“좀 쑤시네요.”
“말을 말자.”
방진훈이 피식 웃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봐.”
김원혁이 살짝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겁 안 나셨습니까?”
“……응?”
김원혁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저는 솔직히 이번 전투에서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차라리 제가 약해서 그랬으면 강해지면 그만인데,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김원혁의 얼굴을 본 방진훈이 입을 살짝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드립을 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는 겁쟁인 것 같습니다. 다른 놈들은 다 제 실력 이상으로 싸우는데, 저는 방해만 됐습니다. 이사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 주변 놈들도 다 죽었겠죠. 저 때문에.”
“허?”
방진훈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김원혁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 이거 웃긴 새끼네.”
“예?”
“야, 인마. 니가 상대한 새끼는 쪽발이 대장이야. 아무리 저 새끼들이 쪽발이라고는 해도 대장급이면 한평생 무학만 익힌 사람이다. 나보다 세다고. 그런 인간을 니가 어떻게 상대해?”
“아, 아뇨. 그놈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김원혁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는 아무래도 이 바닥이 어울리지 않는 놈 같습니다.”
방진훈이 고개 숙인 김원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야.”
“예, 이사님.”
“봐라.”
방진훈이 피에 젖은 셔츠를 잡아 올렸다.
“보이냐?”
“……붕대는 잘 보입니다만?”
“그 위에, 새끼야. 그 위에.”
“예?”
김원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방진훈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붕대로 친친 감은 상처 위에 작은 흉터가 하나 있다.
“칼에 찔린 겁니까?”
“그래. 예전에.”
방진훈이 피식 웃고는 셔츠를 내렸다.
“이 상처가 언제 생긴 건지 아냐?”
“저야 잘…….”
“내가 첫 전투를 나갔을 때 생긴 거다. 그때, 나는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었지. 니가 알다시피 내가 선천적으로 재능이 좀 있는 놈이잖아.”
“…….”
재수 없는 말이긴 하지만 사실이다.
최근에야 강진호나 위긴스, 바토르 등이 휩쓸고 있는 상황이라 그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본래 총회에서도 방진훈은 천재로 유명했다.
젊은 나이에 이사직을 꿰차고 그 이중걸과 대립했으니, 오죽하겠는가. 아무리 방진훈이 인망이 있는 타입이라고는 하나 본신의 실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첫 전투를 나갔을 때, 나는 머리에 혈기만 가득 차서 달려들 줄만 아는 멍청이였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과했지. 덕분에 바로 칼 맞고 쓰러졌다.”
“…….”
“의식이라도 잃었으면 다행이지. 옆구리에 칼 맞은 정도로는 사람이 기절을 안 하더라. 칼에 맞고 쓰러졌는데, 주변에는 아직 적들이 있었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냐?”
“……그 상황에서도 싸워서 이기신 겁니까?”
“아니. 살려 달라고 빌었다.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말이야. 그거 누가 찍어놨으면 끝내줬을 거다.”
방진훈이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김원혁은 눈만 껌뻑댔다.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방진훈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가 아는 방진훈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사형들이 구하러 오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죽었을 거다. 겁쟁이? 그게 뭐 어때서, 인마. 겁도 없이 나대다가 일찍 뒈지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아까 그때, 니가 겁 없이 덤벼들었으면 지금 니가 여기에 있을 것 같냐? 벌써 뒈졌지.”
“…….”
“쫄지 마, 새끼야. 사람은 누구나 겁을 먹어. 겁을 안 먹는 사람이 이상한 거야.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거라고. 요즘 애새끼들은 영화나 만화를 너무 봐. 겁이 없는 게 용감한 건 줄 안단 말이야.”
방진훈이 김원혁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도 겁을 먹는데, 니가 뭐라고 겁을 안 먹어? 당연히 겁먹어야지. 착각하지 마, 새끼야. 용기는 겁이 없는 게 아냐. 겁이 나도 들이대는 게 용기야. 겁이 없는 건 용기가 아니라 정신이상이고.”
김원혁이 멍한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그럼 아까…….”
“응?”
“그 일본 놈이랑 싸우실 때 말입니다. 방 이사님도 겁이 나셨습니까?”
“나?”
“예.”
이 대답은 꼭 듣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가즈히로는 방진훈보다 강했다. 자신보다 강한 이와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방진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방진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