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11
#1210.
정리하다 (5)
먼지구름에 가린 실루엣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살짝 고풍스러워 보이는 갑옷.
시대착오적이기 짝이 없다.
뭔 영화도 아니고, 이 시대에 풀 플레이트 메일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 부분을 지적할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새하얀 갑옷에 여기저기 튀어 있는 피 때문일 것이다.
저건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전쟁의 도구다. 튀어 있는 피가 그걸 증명한다. 저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지 않은가.
한 손에 검을 든 기사가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손으로 휘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수령이 그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노기사.
백발의 노기사가 얼굴이 튄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야만과 지성. 그 상반된 느낌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거…….”
노기사.
마스터가 검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여유가 넘치는 그 목소리에 수령이 눈을 찌푸렸다.
“그쪽은?”
“원탁에서는 저를 마스터라고 부릅니다.”
“……원탁.”
수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총회와 원탁이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다는 소리는 그도 들었다. 하지만 원탁이 이리 전격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이건 수령의 잘못이 아니다.
설사 원탁이 총회에 완전히 종속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해도 원탁은 움직이지 않았어야 한다.
이 세계는 원래 그렇게 움직이니까.
상대의 전력이 낭비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만약 수령이 원탁을 통솔하는 입장이었다면, 총회와 일본이 충분히 맞붙어 전력을 소모한 다음, 은근슬쩍 끼어들어 이득을 챙기려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원탁이 개입하더라도 당연히 나중이 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리고 또 하나.
‘대체 무슨 수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원탁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해 일본 땅으로 들어온다면, 그가 모를 수가 없다.
이미 일본은 준전시 체제로 감시망을 확충하고 있고,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타국에 대한 감시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시망을 뚫고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 않다면 전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구려.”
수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지금 이 선택이 그쪽에 이득이 되는 선택이 아닐 텐데?”
마스터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뒤를 나이트 베슬리와 기사단들이 따르고 있었다.
생각 이상의 무주공산.
한국을 정복하는 데 모든 힘을 바쳤다는 듯, 수령의 거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기사단을 둘이나 대동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선택이라…….”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선택이라는 것은 정보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그대들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달라 논하기가 어렵소이다. 그저 확실한 건, 우리는 이게 맞는 선택이라 생각한다는 것뿐이겠지요.”
그 담담한 대답에 수령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강진호인가?”
“빤한 말을 물으시는구려.”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는 나쁜 지도자가 아니었소. 지켜보고 있으면 놀랄 만큼 기지를 발휘하는 부분도 있었지. 하지만 상대가 나빴소. 어리석었지. 그대들의 실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아시오?”
“…….”
“바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적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거요.”
이건 마스터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마스터는 실제적인 위협으로 부상하기도 전에 직접 한국을 찾아 강진호를 대면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강진호가 어떤 인간인지를 눈과 몸으로 확인했다.
그렇기에 원탁은 총회와 적대하지 않는 방향을 택했다.
만약 마스터가 직접 강진호를 겪지 못하고 들리는 소문만으로 그를 판단했다면?
그래서 위긴스와 더불어 강진호를 원탁의 적이라 규정하고 적대했다면?
아마 원탁은 지금쯤 그 형태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원탁이 존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탁이 새롭게 뻗어 나갈 미래를 움켜쥘 수 있었다. 지도자로서 수령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고, 정보량이 늘어나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일들이 산적해 있다고 해도 반드시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강진호를 수령이 직접 보았다면 절대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눈이라…….”
수령이 낮게 웃었다.
“마치 승자가 패자에게 하는 말 같구려. 나는 아직 패하지 않았소이다.”
“아니. 그대는 이미 패했소.”
“…….”
“설사 그대가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소. 그대는 패했소. 그리고 죽을 것이오.”
“…….”
“호랑이를 사냥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이지. 어설프게 상처만 남긴 채 놓친다면, 그 호랑이는 무슨 수를 써서든 복수를 하려 들 테니까. 진즉에 멈췄어야 했소. 아니면 좀 더 확실하게 하든가.”
수령이 눈을 찌푸렸다.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리는구려.”
“오해는 마시오. 내가 그럴 생각이란 건 아니니까. 호랑이 정도는 감당하겠지만, 강진호는 호랑이가 아니오.”
이해 못하겠지.
마스터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강진호를 모르는 이에게 강진호를 설명한다는 건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스르르르릉.
수령이 천천히 도를 뽑았다. 그의 허리에 찬 도가 맑은 소리와 함께 뽑혀 나왔다.
“그대가 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흐음.”
마스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오해 같구려.”
한 발 뒤로 물러난 마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대를 상대할 생각이 없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할 수 없는 게지. 그분의 먹이를 빼앗는 건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니까.”
“무슨 소리를…….”
그때, 마스터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뛰어나왔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스터.”
“저쪽은?”
“저쪽도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전송해라.”
“예!”
수령이 눈을 찌푸렸다.
전송?
무엇을 전송한단 말인가.
그때, 마스터의 뒤쪽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음!”
순간적으로 대응하려던 수령은 그 빛이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도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때, 나직한 신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령.”
“…….”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몸을 빼시지요.”
“하나…….”
“강대한 적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입니다. 신니치카이는 수령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수령께서 살아 계신다면 언제든 재건될 수 있습니다.”
“…….”
“제가 막겠습니다. 그러니!”
“알겠다.”
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존심을 부리는 것은 우자(愚者)나 할 짓이다.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야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수령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이였다.
그의 발이 슬쩍 뒤쪽으로 한 걸음 빠졌다.
기회를 틈타 몸을 날릴 수 있다면…….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빛이 사그러든다.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앞을 가리고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뭔가가 벌어졌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길을 열어드려라.”
마스터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기사들이 좌우로 걸음을 옮겨 수령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수령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기사들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갑옷을 갖춰 입은 이들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복장. 평범한 복장이지만, 저들의 사이에 있으니 평범하지 않게 된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청년과 캐주얼한 옷차림을 한 노인.
수령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청년 쪽이었다.
“…….”
이해가 갔다.
마스터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내 눈으로 봐야 했다.’
그리고 확인해야 했다.
그랬다면 결과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수령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마에도 송골송골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청년.
트레이닝복 바깥으로 드러난 손과 얼굴에 새겨진 붉은 상처가 아직 채 지워지지 않은 청년.
그에게서 감출 수 없는 진득한 피비린내가 풍긴다.
얼마나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이런 말라붙은 피 냄새를 풍길 수 있을까?
저건 사람이 아니다.
숫제 괴물이다.
괴물을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대하려 든 것이 수령의 실수였다. 이매망량(魑魅魍魎)은 인간의 도리로 상대할 수 없다.
왜 그걸 미리 알지 못했단 말인가.
“강진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수령은 청년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니, 알 수밖에 없다.
저 나이에 저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동양인 청년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가라앉은 눈으로 수령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움찔.
이 먼 거리가 그저 한 걸음만큼 가까워졌을 뿐인데도 수령은 전신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있다.
그이기에.
수많은 사선을 헤치고, 지독한 음모에서도 끊임없이 살아남고 또 살아남은 그이기에, 이제는 스스로 인간에서 벗어나 악귀의 영역에 들어선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괴물인지 말이다.
살기도 뿜지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적의조차 없었다.
그저 무심한 듯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한 걸음씩 천천히 강진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
그리고 수령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기회를 틈타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강진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이곳에 달아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맞닥트릴 수밖에.
저 마귀를.
죽음을 먹고 죽음을 토해내는, 죽음으로 뭉쳐 형상을 빚어놓은 것 같은 마귀를 말이다.
저벅.
저벅.
천천히 강진호가 수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결코 빠르지 않게, 느긋한 걸음으로.
이윽고 강진호가 수령의 한 걸음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그 거기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수장이 서로를 마주했다.
수령이 이를 악물었다.
짓눌릴 것 같다.
몸에서 조금만 힘을 빼면 강진호의 눈빛에 짓눌려 몸이 으스러질 것 같다.
담담한 강진호와는 다르게 수령은 강진호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진바 모든 힘을 끌어내야 했다.
턱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는 신니치카이의 수령이자 일본의 수장이다. 설사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이 전쟁을 시작한 수령의 의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너…….”
살짝 말끝을 흐린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무인이 아니군.”
“…….”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왔군.”
강진호가 몸을 돌렸다.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강진호를 보며 수령의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