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21
#1220.
변화하다 (5)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갑판 위로 올라오지 못한 이들을 제외하고도 천 명에 가까운 이들이 갑판을 채우고 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천 개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려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주인공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갑다.
배 끝에 닿은 칼날의 감촉이.
하지만 그보다 더 차가운 건 그의 등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절로 거친 숨이 토해져 나온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칼끝이 배를 찔러온다.
주륵.
배가 칼에 베이며 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 살짝 베인 상처를 따라 흘러나온 피가 배를 타고 흘러내린다.
“후우욱!”
고헤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배에 닿은 칼날을 바라보았다.
이 칼을 찔러 넣고, 배를 가른다.
신념의 깊이를 보여주려면 일자로 그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로로도 한 번 더 그어 열 십(十) 자로 갈라야 한다.
증명.
할복은 증명이다.
자신의 떳떳함과 자신의 신념.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가치에 대한 증명이다.
그러니 흔들릴 것 없다.
이 칼을 찔러 넣어 긋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후욱, 후욱! 후욱!”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으로 파고든다.
따끔하다.
세상이 흐리고 어질어질하다. 왜 자신이 이곳에서 이리 주저앉아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신에게 겨눠진 칼날, 그리고…….
찰칵.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강진호의 모습뿐이다.
“후우우우…….”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무심한 눈으로 고헤이를 바라보았다.
강진호의 시선을 마주한 고헤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심함.
있을 수 없는 무심함이다.
그는 지금 죽음의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저토록 무심할 수가 있는가.
그제야 고헤이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신념은 강진호에게 닿지 못한다.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목숨을 버리든 강진호는 그의 죽음에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
신념은, 그의 신념은…….
그 순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강진호가 고헤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희게 웃은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뭐 해?”
“…….”
“갈라.”
고헤이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얼마나 크게 떨리는지, 칼이 순간순간 그의 피부를 가르며 파고들 정도였다.
강진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싱긋 웃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냥 눈 딱 감고 찌르면 되잖아. 그렇지?”
“…….”
고헤이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증명해 봐. 너의 신념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후욱!”
고헤이의 눈이 발작을 일으킨다.
손끝에 힘이 들어간다. 이를 악문 고헤이가 칼을 자신의 배에 찔러 넣었다.
푸욱!
하지만 거기까지.
반 뼘 정도 배를 뚫고 들어간 칼이 더 이상은 파고들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아…….”
고헤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프다.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상상한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다.
고헤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무인의 삶을 살던 자. 칼은 몇 번이고 맞아보았다. 하지만 이 고통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 본 고통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드레날린이 극한까지 뿜어져 나오는 전투의 와중에 생긴 상처의 고통과 모든 정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지금 느끼는 고통이 같을 수는 없다.
베인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 몸을 파고들어 온 이질적인 금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그리고 배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 공포스러운 감각.
그 모든 것이 뒤섞여 고헤이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떨린다. 그럴 때마다 배를 파고든 칼날의 끝이 뒤흔들리며 그의 배 속을 헤집었다.
“끄으…….”
내장이 상했는지 목구멍으로 뭔가 자꾸 역류하는 기분이다.
‘죽어?’
이렇게 죽는다고?
이건 그가 생각한 죽음과는 뭔가 달랐다.
그의 죽음은 이런 게 아니다. 조금 더 장엄하고, 웅장하고, 신념과 충심이 넘치는 그 무언가여야 한다.
이렇게 날것 그대로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니었다.
‘사, 살고…….’
“안 되지.”
그 순간, 그의 손을 강진호가 덥썩 움켜잡았다.
“여기서 그만두면 안 돼.”
“…….”
미소를 짓는다.
분명 눈앞에 있는 이는 강진호다. 하지만 강진호가 아니었다. 날개를 감춘 악마가 그를 비웃고 있다. 덫에 걸려 파멸로 향하는 인간을 조롱하듯이.
“여기서 그만두면 모두가 실망하잖아. 증명해야지. 너의 신념을, 그리고 너의 방식을.”
새하얀 이가 드러난다.
“도와주지.”
도의 손잡이와 그의 손을 동시에 움켜잡은 강진호가 천천히 그 팔을 움직였다.
항거할 수 없는 힘.
“끄…… 끄륵…….”
스스슷.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이 그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은 적이 있지.”
강진호가 한 점 티 없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그리고 더 많이 벨수록 자신을 증명하는 거라고 하더군. 맞나?”
“…….”
고헤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피가 입으로 역류한다. 배에서 역류한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 다시 배의 상처로 스며드는, 살아생전 다시는 볼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을 그의 몸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서두를 것 없잖아?”
서걱.
왼쪽 옆구리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를 길게 베어낸 강진호가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이렇게…….”
쑤욱.
고헤이의 도가 명치를 파고든다.
그러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고헤이는 뜬눈으로 자신의 배가 갈라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열 십 자.
신념의 증명.
하지만 이것을 누가 그의 신념이라 볼 것인가.
“끄으…….”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고통이 밀려온다. 금방이라도 발악하며 고함을 지르고 싶다. 하지만 고헤이는 발악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아키노리를 바라보았다.
아키노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진호와 고헤이에게로 다가온다.
“제가 목을 베게 해주십시오.”
“음?”
고헤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할복을 한 자는 목을 베어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게 법도입니다. 비록 길은 갈라졌지만, 한때마나 수하로 거두었던 이. 그 목을 베는 건 제 역할입니다.”
“그래?”
강진호가 웃었다.
“왜?”
“……예?”
강진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를 가른다. 그걸로 자신을 증명한다. 이게 할복의 방식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어설프게 목을 베서 고통을 덜어주는 거지? 그 고통마저 온전하게 자신이 짊어졌을 때, 조금 더 신념을 증명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아키노리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웃기는 방식이지.”
강진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음으로 책임을 진다고 지껄이는 주제에 그 죽음에 따르는 고통은 회피하려 드는군.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아무것도 없어. 애초에 이런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나는 배를 가르는 고통마저 받아들일 정도로 떳떳하고 신념에 차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나…….”
“증명하게 해주지.”
강진호가 고헤이를 발로 툭, 밀었다.
고헤이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바닥으로 쓰러지자, 강진호가 도를 집어 들고 고헤이의 양팔과 양다리의 근맥을 갈라 버렸다.
“끄르르륵!”
퉁!
도를 바닥으로 집어 던진 강진호가 손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웃었다.
“이제는 짊어지게 되겠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방식을 온전히 책임지며 말이야.”
“…….”
아키노리가 질린 눈으로 고헤이를 바라보았다.
근맥이 잘린 고헤이는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배가 갈리고 내장이 상한 채 그저 벌레처럼 누워 꿈틀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죽지도 못한다.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무인의 회복력은 저 상태에서조차 인간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피가 완전히 말라 더는 피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고헤이는 끝없는 고통을 받으며 죽어갈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잔인한가?”
“저는…….”
“기억해 둬.”
강진호가 씹어뱉듯 말했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다. 죽음의 의미 따위는 없어. 죽음에 의미를 두라고 하는 이들은 그 죽음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뿐이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있다. 장렬한 죽음이 구차한 삶보다 나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그건 내가 죽음을 선택하고, 그것으로 끝맺을 때의 일이야. 죽음은 선동의 방식이 아니다. 그저 죽음일 뿐이야. 너희도 그걸 알아야겠지.”
강진호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저벅저벅.
아무렇지도 않게 쓰러져 꿈틀대는 고헤이를 타 넘은 강진호가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적루와 청루가 허공에서 뽑혀져 나왔다.
“신념?”
강진호가 새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는 반대로 그의 육체에서는 폭발적인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좋겠지. 나와, 죽음으로 그 신념을 지키게 만들어줄 테니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날 뿐이다.
그러지 않겠는가.
할복이란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할복을 택한 이를 벌레처럼 죽여 버리는 잔학무도한 마인을 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신념도 의미가 없다.
남은 것은 그저 선택뿐.
굴종, 아니면 죽음.
“강자는 선택할 필요가 없지.”
강진호가 웃었다.
“내가 보기에 너희는 약자일 뿐이야. 약자는 선택해야지. 지금 선택해라. 머리를 처박고 살아남을 것인지, 뻣뻣한 목을 잘라낼 것인지.”
생각은 길지 않았다.
바토르와 위긴스, 그리고 장민과 이현수가 강진호의 등 뒤로 걸어온다.
나란히 선 다섯.
그들이 뿜어내는 투기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거칠고, 무도하고, 그리고 과격하다.
“셋을 세지.”
강진호가 청루를 바닥에 꽂아 넣고 적루를 들어 겨눴다.
“셋을 세고도 목이 뻣뻣한 놈들은 목을 잘라 신념을 지킨다는 의미로 알겠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하나.”
강진호의 말과 동시에 이사진들이 투기를 뿜어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둘.”
그리고 둘을 센 순간, 강진호의 몸에서도 살을 베고 정신을 찢어버리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셋.”
그리고 마지막 셋을 셌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갑판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바다뿐이었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생에 대한 의지는 자존심 가득한 무인들의 무릎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배 위를 가득 채운 무인들이 일제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세상 어디서도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광경이었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해라.”
오늘을.
“너희가 지금의 심정을 잊는다면, 다음에는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때는 알려주지. 죽음이 어떤 것인지, 날것 그대로 말이야.”
강진호가 몸을 돌렸다.
길고 긴 전쟁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