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24
#1223.
정리하다 (3)
한은솔은 넋이 나간 얼굴로 차를 몰고 있었다.
‘이러다 사고 나겠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나가 버린 멘탈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눈이 룸미러로 향했다.
“흐흥, 흥, 으으응.”
저걸 콧노래라고 할 수 있나?
노래라는 건 듣기 좋은 무언가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때, 저 비틀린 음은 확실히 노래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누나.”
“응?”
“좋아요?”
최연하가 눈을 확 일그러뜨렸다.
“사람 지금 기분 나쁜 거 안 보여? 너, 나랑 같이 다닌 게 얼만데, 아직 사람 기분도 파악 못해?”
“……죄송합니다.”
“하여튼!”
인상을 쓰고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던 최연하의 입꼬리가 움찔움찔하더니, 이내 휘릭 말려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보던 한은솔이 체념한 얼굴로 룸미러에서 눈을 뗐다.
‘답도 없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최연하는 세상을 폭파시킬 기세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진호가 연락이 안 된다는 것.
급한 일이 있어 연락이 어렵다는 간단한 문자 하나만 남긴 강진호는 말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주 깔끔하게.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의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첫날은 오전까지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후부터 뭔가 슬슬 시동이 걸린다 싶더니, 하루가 지나자 폭풍이 몰아쳤다.
‘마녀가 따로 없지, 마녀가.’
이번 일로 한은솔은 확실하게 알았다.
최연하가 최근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인 이유는 강진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달라졌다거나 변했다거나 그런 게 결코 아니었다!
최연하의 본성은 한 치의 변화도 없다.
오랜만에 가식을 벗어던진 최연하의 강림은 한은솔에게도 재앙이었다.
원래 힘든 일이라는 건 다 그렇다.
닥쳤을 때는 지옥같이 고통스럽지만, 그 기간을 지나고 나면 ‘그래,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었잖아?’라는 이상한 방식으로 미화된다.
마치 군 생활처럼.
하지만 군대에서 나름 보람도 있고 얻은 것도 있었다 말하는 이에게 재입대를 권하면 그날로 사생결단이 나듯이, 다시 겪은 과거의 최연하는 그동안 한은솔이 얼마나 편히 지냈는지를 뼈저리게 절감하게 만들었다.
“야! 너, 내가 우스워? 오늘 진짜 한 번 머리 풀고 뒤집어져? 어?”
이미 머리는 푸셨고, 이미 뒤집어지셨습니다, 누님.
여기서 더 뒤집어지면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촬영을 어떻게 잘 마친 게 다행이지.’
그 촬영 감독 놈이 조금만 눈치가 없었어도 오늘 촬영장에는 아수라가 강림했을 것이다.
현실에 강림한 아수라를 본 중생들은 다들 눈물을 뿌리며 자신의 죄악을 반성…… 아, 이게 아니고.
‘그랬으면 CF도 날아가는 거지.’
위약금이 어쩌고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돈은 물론 중요하지만, 돈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동안 최연하는 그 지랄 맞은 성격으로도 어떻게든 연예계의 톱을 유지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성격은 지랄 맞지만, 일은 확실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식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제아무리 잘나가는 스타라도 저점은 반드시 찾아온다. 잘나갈 때는 귀에 들리지 않던 악소문이, 하향세를 타는 순간 물밀듯 밀려오는 게 이 바닥이다.
한류 스타고 나발이고, 연예인은 이미지로 먹고산다. 그 이미지를 망치는 순간, 더는 연예인일 수 없다.
‘일에 있어서는 확실하다’가 최연하가 지킨 마지막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가 무너지면?
“추락이지, 뭐.”
“뭐?”
“내, 내리막길이니 조심하시라구요.”
“흐응.”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이야기해 버린 한은솔이 식은땀을 닦았다.
물론 오늘 촬영장을 뒤집었다고 해서 최연하의 인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일은 사소한 곳에서 시작하는 법. 오늘이 최연하의 인기가 하향세에 접어드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알기는 할까?’
한은솔이 살짝 고개를 돌려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창밖을 보고 있는 최연하가 다시 못 들어줄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만능 엔터테인인지 뭔지가 유행할 때, 가수로도 데뷔시켜 보자고 호들갑을 떨던 사장을 두 소절 만에 돌아 나가게 만든 노래실력이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남들 앞에서는 최대한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주체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은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거 연락 한 번 왔다고 저리 좋아서는.’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감독 놈이 실수를 저지르고 분위기를 환기해 보겠답시고 되도 않는 아재 개그를 날렸을 때, 최연하가 들고 있던 물병을 거꾸로 잡는 걸 분명히 봤다.
그때, 타이밍 좋게 톡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그 물통은 지체 없이 허공을 날아 감독의 머리통에 경종을 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과 한은솔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다행스럽게도 최연하의 폰으로 날아온 톡은 강진호의 것이었고, 얼음 마녀처럼 촬영장을 얼리고 있던 최연하는 일순간 부드러운 촬영장의 여신이 되었다.
그러고는 저 꼴이다.
“흐응, 흐응, 흥.”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스스로도 괴로워하는 노래를 쉴 새 없이 흥얼거릴 만큼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한숨을 푹 내쉰 한은솔이 입을 열었다.
“누나.”
“응?”
“설마…… 그 표정으로 강진호 씨 만나러 갈 건 아니죠?”
“뭐가?”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요.”
“야! 내가 언제!”
“……차 안에 거울을 설치하든 해야지.”
신호를 받아 멈춘 한은솔이 몸을 돌려 최연하를 바라봤다.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죠?”
“다, 당연하지.”
“누나.”
“응?”
“누나가 연애를 대본으로 배운 사람이라는 건 제가 아는데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모함질이야!”
“아니에요?”
“연기도 했어.”
“……인정합니다.”
별 차이는 없지만.
“여하튼 너무 그렇게 좋다, 좋다 해주는 것도 안 좋아요. 이유도 말 안 하고 잠수 타는 거 봐주다 보면, 나중에 당연하게 된단 말이에요.”
“나도 알아.”
“아는 얼굴이 아닌데?”
최연하가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여전히 뭔가 움찔움찔하는 게 못미덥긴 하지만, 한소리 해야 한다는 건 자각한 모양이다.
한은솔이 쓰게 웃고 말았다.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이제는 만난 기간도 웬만큼 된 것 같은데, 아직도 그렇게 좋아요?”
“은솔아.”
“예, 누나.”
“그렇지. 만난 기간이 좀 오래되고 하면 마음도 식고 현실도 보고 그래야지?”
“당연하죠.”
“근데 너는 나를 안 기간이 얼만데 목 빳빳이 들고 누나한테 충고질이니? 확 모가지 뒤로 꺾이려고.”
한은솔이 얌전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가만히 자세를 고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운전하겠습니다.”
“차 흔들리면 니 인생도 같이 흔들리는 거야. 안 흔들리게 빨리 가.”
“네.”
불합리하다.
인생은 불합리해.
입을 삐쭉 내밀고 운전하던 한은솔이 빽빽한 차와 인파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날이지.”
“무슨 날요?”
“결승전.”
“……네?”
“됐다. 네가 어떻게 고상한 스포츠의 세계를 알겠니?”
한은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연하가 누구인가.
스포츠 기자의 ‘스트라이크와 볼의 차이를 아시나요’라는 농담에 ‘스트라이크는 파업이잖아요’라는 전설적인 답변을 남긴 여자다.
그 빌어먹을 인터뷰 영상 지운다고 소속사 직원들과 한은솔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기억이 생생한데, 뭐? 스포츠으으으?
“지금 스포츠라고 하신 거죠?”
“그럼?”
한은솔이 눈을 끔뻑이며 룸미러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
“그럼 지금 저거 보러 가시는 거예요?”
“응.”
“……진짜요?”
“너 아까부터 살살 건다? 왜? 나는 그런 거 보면 안 돼?”
“이상하니까 그렇죠. 누나, 메시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그거 구멍 숭숭 뚫린 거 아냐?”
“매쉬 말고 메시요!”
“뭐래?”
“…….”
한은솔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말을 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차나 세워.”
“여기서요?”
“어차피 이 인파 속에서는 사람 못 찾아.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됐어.”
“그럼 차 대놓고 기다릴게요. 끝나면 연락 주세요.”
“됐어. 먼저 올라가.”
“……네?”
“올라가라고.”
한은솔이 눈을 부릅떴다.
“누나, 내일 아침에 스케줄 있는 거 아시죠? 오늘 여기서 자고 가니 어쩌니 했다가 스케줄 펑크 나면 우리 회사 박살 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신생이라 의심 어린 시선 많은데, 회사 만들자마자 스케줄 터지면 회생 불가예요.”
“넌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아?”
“…….”
최연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답 안 해?”
“……아, 물론 아시겠죠. 알긴 아시는데…….”
물가에 애를…… 아니, 물가에 독사를 풀어놓은 느낌이다. 괜히 지나가던 아이들이 물릴까 봐 걱정되고, 애지중지 키운 비싼 독사가 땅꾼에게 걸려 낚여갈까 봐도 걱정된다.
“은솔아, 은솔아. 한은솔 실장님.”
“네.”
“내 걱정 마시고, 너나 잘하세요. 나 이래 봬도 이사야.”
“……그렇죠.”
“차나 세워.”
“예.”
한은솔이 한숨을 쉬며 길가로 차를 댔다.
최연하가 거울을 들고 메이크업을 마무리한 다음, 외투를 입는다.
“어때?”
“어떻긴 어때요. 예쁘지.”
“그지? 예쁘지? 하, 나도 내 미모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네네. 제발 제 앞에서만 그럽시다. 남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고.”
“걱정 마시구요,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위이이이잉.
밴의 옆문이 열리고 최연하가 모자를 눌러썼다. 다른 한 손에는 또 다른 검은 모자를 든 채 최연하가 가벼운 걸음으로 밴에서 내렸다.
“……제발 사고만 치지 맙시다.”
한은솔의 한숨이 차창을 희게 물들였다.
“사람이 많네?”
최연하가 모자를 꾹 눌러썼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대충 가리기는 했지만, 이래도 알아보는 사람은 나올 것이다.
팬이란 참 이상한 존재여서 이렇게까지 가리면 최연하도 자기 자신을 알아볼 자신이 없는데 귀신같이 눈치채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어, 최연하다’ 소리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에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과는 반대로 최연하의 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욕해야지.’
감히 문자 하나 보내고 잠수를 타다니. 이건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원래 그런 인간이라지만, 언제까지 이런 일을 이해해 줄 순 없다.
화내고 욕해야지.
그리고 쩔쩔매면 그때 봐서 슬그머니 용서해 줘야지.
선물도 사 달라고 할까?
돈도 많으니까 비싼 거 사 달라고 해야지. 아니…… 그럼 안 좋게 볼 수도 있으니까, 근사한 밥이나 사 달라고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최연하가 지하철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런 최연하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
최연하가 슬그머니 그 뒷모습을 향해 다가갔다.
살짝 놀라켜 줄까?
아니면 뒤에서 팔짱을 끼고 화난 척 서 있을까?
어느 쪽이든 좋다. 오늘은…….
그때.
익숙한 뒷모습, 그러니까 강진호가 슬쩍 몸을 돌렸다.
최연하와 강진호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강진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왔어요?”
“…….”
입술을 한 번 잘근 깨문 최연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못해.’
화가 나야 화를 내지.
짜증나고 얄미운데, 기분이 나빠지지가 않는다. 이것도 병이다.
“가죠.”
“네.”
새초롬하게 최연하가 강진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되지?”
“…….”
콩깍지가 살짝 벗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