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3
#122.
다짐하다 (3)
주말 아침부터 흡연 구역으로 나온 조원구는 담배를 입에 물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야.”
“응?”
조원구의 동기인 최세한이 조원구의 옆에 와서 앉았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안 좋은 일?”
“그래.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조원구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안 좋은 일은 무슨 안 좋은 일이야. 좋은 일만 있다, 좋은 일만.”
“좋은 일?”
“A급도 아니고, S급이 들어왔으니 좋은 일이지.”
“강진호?”
“네가 어떻게 알아?”
“포대에 소문 쫙 깔렸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라던데?”
조원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심한데 그래?”
“도망가고 싶다.”
“응?”
“빨리 전역 해야 돼.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
최세한은 조원구의 반응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워낙에 애들을 교묘하게 괴롭힌다고 별명이 독사인 조원구였다. 그런 조원구가 신병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하다니.
차라리 고래가 육지에 산다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뭐가 어떻기에?”
“……야, 너 말이다.”
“응?”
“그래, 내가 운동신경은 인정할 수 있어. 국가대표급 운동신경을 지닌 애가 군대에 오면 다른 애들이 하는 거 다 같잖아 보이겠지. 내가 그건 이해할 수 있는데…….”
“뭔 소리야?”
“포 제원 외우라고 교범 줬더니 책을 통째로 외워 버리는 놈이 후임이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진짜?”
“어휴, 씨발.”
조원구가 담배를 쭈욱 빨아들이더니, 멀리 뿜어냈다.
“그렇다고 내무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침상에 올라갈 때마다 부담스러워 죽겠다. 시멘트 칠하고 아직 덜 말랐는데 흙발로 짓이기는 기분이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너희 분대에서 데려갈래?”
“아니.”
최세한도 강진호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듣고 있었다.
“사람이 인간미가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럼 피곤한 티라도 내든지. 일은 남들 다섯 배는 하는 것 같은데, 잠도 잘 안 자고 누워 있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무섭네.”
“그지?”
최세한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래도 우리야 금방 전역하니까.”
“그래. 후임들이 고생이지.”
사실 강진호가 있는 덕분에 분대원들의 생활이 편해진 면이 더 컸다. 문제는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조원구도 바른 생활 사나이가 분대에 있는 것만으로 이리 사람이 괴로워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FM으로 처리해 버리는 신병이 옆에 있으니 가라로 일을 하려고 하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그들도 FM대로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느껴지는 것이다.
“일단은 너야 살살 달래가면서 하면 되잖아. 네가 분대장인데.”
“그래, 맞다.”
조원구는 자신을 되찾기로 했다.
처음 강진호가 들어왔을 때 얼마나 귀엽고 깜찍했던가.
“그래, 초심을 되찾아야지!”
자신은 분대장이다! 그리고 병장이다!
일병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건 말이 안 된다.
“애 좀 데리고 놀아. 걔도 분대가 편해지면 좀 낫겠지.”
“알았다.”
조원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생활관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간 조원구가 구석에서 개인 정비를 하고 있는 강진호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막내야!”
“일병 강진호!”
“형이랑 게임하러 가자!”
“게임 말입니까?”
“그래, 게임! 뭐할까? 너 갤럭시 좀 하냐?”
“……갤럭시 크래프트 말입니까?”
“그래. 형이 사제에 있을 때 게임으로 좀 날렸거든. 너 갤럭시 좀 하냐? 형이 한 수 가르쳐 줘?”
“갤럭시는…….”
강진호의 입가에 드물게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좀 합니다.”
“한판 더 합니까?”
“……아니.”
그만해, 이 새끼야.
게임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굴욕을 다 당해본 조원구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멘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와, 씨! 아까 컨트롤하는 거 봤냐?”
“사람 아니다, 사람 아니야. 난 화면만 보고 있었는데, 왜 멀미가 나냐?”
“아까 하나 토하러 갔어.”
“내가 본 게 갤럭시 맞지? 같은 게임이 아닌 것 같은데?”
“조원구 병장님 게임 잘하시잖아. 완전 발렸네.”
“클라스가 다르다, 클라스가.”
……그만해, 이 새끼들아.
나란히 놓인 두 대의 컴퓨터 뒤로 구경하는 이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저 지나가다가 강진호의 화면을 보고 멈춰 선 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몇 십 명이나 되는 이들이 둘의 게임을 지켜본 것이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굴욕 게임을 겪은 조원구는 축 늘어진 어깨로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진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라가려고 하자 조원구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쟤들 좀 상대해 줘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된다.”
입구까지 나와서 뒤를 돌아보자 겁도 없이 강진호의 옆에 앉는 이가 있었다.
조원구는 처참하게 처발릴 자가 하나 늘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며 최세한을 찾아 나섰다.
“죽여 버릴 거야.”
“주목.”
“주목!”
“다음 주부터 유격인 거 알고 있지?”
“예, 그렇습니다!”
“이번 유격에서는 우수 분대를 선정해서 휴가를 보내주기로 했다. 사단장님 지시다. 무려 1인당 9박 10일이다. 분대 전원에게 휴가증이 돌아간다!”
“우와아아아아!”
“좋아하지 마! 이놈들아!”
포대장의 눈이 빛났다.
“우리끼리 경쟁하는 거 아냐. 어차피 알파나 브라보나 본부 같은 애들한테 우수분대 뺏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한다. 그런데 이번에 보병 애들이랑 같이 유격 받는 거 알고 있지?”
“예.”
“보병한테 지면 너희는 다 뒈지는 거야.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우수 훈련병도 뽑기로 했으니까, 이왕이면 둘 다 가져올 수 있도록 해봐. 최우수 분대랑 최우수 훈련병 동시 석권하면 휴가가 19박 20일이다. 이건 간첩 잡는 거랑 동급인 거야.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점호가 끝나자 최현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분대장님! 휴갑니다! 휴가!”
“아씨…… 말년에 유격 가야 돼서 짜증나 죽겠는데, 뭔 개소리야?”
“그게 아니지 말입니다. 최우수 분대로 선정되면 말년 휴가가 20일이지 말입니다.”
“오?”
생각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는 듯이 조원구가 반색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또 그러네?”
“노려볼 만하지 말입니다.”
“근데 그게 쉽겠냐? 분대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연대 애들까지 감안하면 거의 80개 분대 넘어갈 텐데.”
“가능하지 말입니다.”
“어떻게?”
“일단 다른 건 모르겠고, 종목 중에 참호 격투는 무조건 우승이고, 힘쓰는 건 다 이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그야…….”
최현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최현석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수첩을 든 채 대기하고 있는 강진호가 있었다.
“……존재 자체가 반칙이라는 소리만 안 나오면 그리 어렵지는 않지 말입니다.”
최현석과 강진호를 번갈아 보던 조원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자! 최우수 분대!”
“다리 모읍니다!”
“다리 벌리지 않습니다! 이빨 보이지 않습니다!”
“88번 올빼미! 열외!”
“열외에에에에!”
조원구는 헉헉대는 와중에도 이를 악물었다.
‘최우수 분대는 얼어 죽을.’
전역을 한 달 남기고 유격을 뛰는 것도 억울해 죽을 일인데, 이번 유격은 저번보다 체감상 몇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PT 팔번, 이십 회! 몇 회?”
“이십 회!”
“십팔 회… 시작!”
“하나! 둘! 셋! 넷!”
저 교관은 악마가 틀림없다.
아까부터 쪼그려 뛰기와 온몸 비틀기만으로 교육생들을 철저히 조지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다른 PT 체조가 왜 필요한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힘이 드는 만큼 정신을 놓는 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십파아아아아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마지막 반복 구호에 조원구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어차피 반복 구호를 붙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해진 시간 이전에 훈련을 끝내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서식하는 붉은 모자의 악마들은 교육생들의 훈련 자세가 훌륭하다고 휴식 시간을 줄 만큼 자애로운 이들이 아니었다.
잘하면 못할 때까지 굴리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 아니던가.
그 와중에 울려 퍼지는 십팔이라는 특징적인 반복 구호에 되레 통쾌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할걸.’
“정신 못 차리지! 이 새끼들! PT 11번, 쪼그려 뛰기 준비!”
“준비이이이이!”
조원구는 자세를 바꾸면서 입을 벌렸다. 아까부터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흐르는 것 같은데, 닦을 정신도 없다.
‘아니, 이 새끼들. 오늘 왜 이러지?’
병장이 되어서 몸이 더뎌진 것이라 생각했다. 살도 적당히 붙었고, 체력도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 힘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니 확실히 저번 유격에 비해서 강도가 올라갔다는 확신이 들었다.
유격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지들 마음대로 난이도를 올렸다 내리지는 않을 텐데?
“준비!”
조원구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뭔가 원인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PT 11번, 십오 회! 몇 회?”
“십오 회!”
“십육 회… 시작!”
조교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그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야, 이 강진호, 이 새끼야!”
조원구가 원독에 차 소리를 질렀다.
그의 등 뒤에서 강진호가 말 그대로 FM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저 완벽한 각도와 완벽한 동작.
너희들이 시키는 훈련 따위는 내게 한 점의 피로조차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동작이 지금 조교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아, 적당히 좀 하라고, 새끼야!”
“잘 못 들었습니다?”
“아, 적당히 하라고! 엄살 좀 부리고!”
원인을 찾아낸 조원구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쳤지만, 다른 이들은 조원구의 애타는 심정을 그냥 봐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88번 올빼미!”
“88번 올빼미! 조원구!”
“열외!”
“……열외.”
열외 구역으로 간 조원구가 진흙이 가득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 안 차립니까?”
“차리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까?”
“아닙니다아아아!”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조원구는 바닥을 뻘뻘 기어 다니면서도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각이 잡힌 채로 온몸 비틀기를 하고 있는 강진호를 보니 소름이 돋는다.
저 다리가 원래 저렇게 쭉 뻗으면 안 되는 거란 말이다!
“안 된다고오오…….”
교육 시간을 풀로 채운 끝에 유격 첫날 훈련이 끝이 났다.
“진호야.”
“일병 강진호.”
“내가 적당히 좀 하라고 했잖니.”
“최우수 분대를 따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따야지.”
“적당히 합니까?”
조원구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은 우라지게 많고, 달은 또 우라지게 밝았다.
열심히 해야 할 때는 열심히 하고, 눈치 봐서 적당히 해야 할 때는 적당히 해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진리를 설명하기에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너무도 올곧고 뒤를 볼 줄 몰랐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융통성을 밥 말아 먹은 종자였다.
“……그냥 열심히 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마자 조원구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