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30
#1229.
격동하다 (4)
“아빠!”
“……아빠 아니고, 오빠야.”
강진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이들을 들쳐 안았다.
걸음이 편치 않은 아이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강진호의 발이 재빨리 마루를 누볐다.
뒤뚱뒤뚱 걸어오는 아이마저 안아 든 강진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잘 있었어?”
“응!”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지금 안은 아이는 강진호가 잘 모르는 아이들뿐이다. 처음 강진호가 보육원에 들르기 시작했을 때는 없던 아이들이 이제 보육원의 반을 채우고 있다.
새삼 자신이 이곳을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실감하는 강진호였다.
“오빠!”
“혀어어엉!”
“그래.”
강진호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달려든다.
강진호가 더욱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이 더 달려든다.
……이제 웃음이 안 나온다.
“와아아아아아아!”
이리 떼에 습격당하는 소처럼 강진호가 아이들에게 뒤덮였다.
“…….”
떨쳐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아줄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강진호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오빠 괴롭히지 말고 나와.”
아이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조미혜의 얼굴을 발견한 아이들이 미련 없이 강진호를 두고 돌아섰다.
“오빠도 일어나.”
“……고맙다.”
강진호가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은 없었지?”
“방금 있었네요. 애들 하나 못 다뤄서 어쩌려고 그러세요. 예전에는 손가락 하나로 애들 다루더니.”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강진호와 지금의 강진호가 같을 수는 없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괜찮아 보이네.”
“아직은 괜찮아, 오빠. 아직은.”
“응?”
아직은 괜찮다는 말은 이제 곧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다.
“무슨 말이야?”
“지금 돌아오고 있거든. 역전의 용사가 될지, 아니면 역적의 용사가 될지 모르시는 분이.”
“무슨 말인지…….”
그때, 문이 슬며시 열렸다.
강진호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조미혜가 마른침을 삼키며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축 늘어진 어깨.
울상이 된 얼굴.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무게감에 강진호마저 긴장할 정도였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눈으로 강진호와 조미혜를 응시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망했어.”
한진성의 손에 구겨진 수능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망했대?”
“망했대.”
“어떻게 해?”
“어떻게든 하겠지.”
“대학은 가?”
“글쎄?”
조미혜가 눈을 희번덕대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도망간다.
조미혜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한진성을 돌아봤다.
“뭐, 이 정도면 망한 것도 아니구만!”
“…….”
“사내새끼가 뭐 시험 성적 좀 마음에 안 든다고 어깨를 그렇게 늘어뜨리고 있어! 어깨 안 펴?”
“오늘은 좀 냅 둬라.”
“진짜…….”
뭔가 말을 하려던 조미혜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수능을 망친 수험생에게 할 수 있는 위로가 뭐가 있겠는가.
“아니, 이 정도면 잘 친 거지.”
빈말이 아니다.
한진성이 제대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의 성적을 생각하면, 이것도 인간 승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 짜증 나게 하지 마!”
“오빠!”
“그만하라니까.”
강진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한테 화풀이하면 속이 좀 나아지나?”
한진성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한다. 살짝 도발적이던 눈빛이 이내 사그러들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미혜야. 죄송해요, 형. 좀 날카로웠어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가 빠른 건 좋다.
한진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짜증 낼 일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어쨌든 간에 제가 한 만큼 성적이 나온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한진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진호도 한진성의 마음을 이해했다.
노력은 언제나 100% 보상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따라오지도 않는다.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납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대로면 인서울이 그렇게 쉽지는 않아서…….”
강진호는 한진성이 왜 저리 우울해하는지 이해했다.
대부분의 복지 재단은 자립원을 운영하고 있다. 자립원은 성인이 되어 대학을 가거나 취직을 하는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제공하고 생활을 가능하게 해 보육원을 나간 이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 곳이다.
문제는 자립원은 말 그대로 학교를 다니거나 취직한 이들을 위한 곳이라는 점.
자립원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통학이 가능한 거리에 있는 학교를 가거나 직장에 취직해야 한다.
인서울이 어렵다면 자립원의 생활은 불가능해진다. 다른 지방으로 가야 하니까.
“이 정도면 인서울 가능한 거 아냐?”
“내가 가려는 학과에 못 가.”
“가려는 학과가 어딘데?”
한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러는 거냐고! 학과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대충 주변에 아무 대학이나 가면 되지. 가서 열심히 하면 되잖아.”
“가고 싶은 학과가 있다니까.”
“뭐?”
한진성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강진호가 조미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리 좀 비켜줘.”
“오빠.”
“어서.”
조미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니야. 괜찮아. 앉아. 그냥 이야기할게.”
일어나려던 조미혜가 강진호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진성의 시선이 강진호와 조미혜를 번갈아 향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사회복지과요.”
“……응?”
“사회복지과요.”
강진호가 한진성을 가만히 보다가 가볍게 웃고 말았다. 한진성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웃을 것 같았어!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 미안.”
조미혜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너, 웃기만 해봐.”
“……앙 우꺼등여.”
한진성이 짜증 어린 얼굴로 말했다.
“먼저 나간 형들 중에 취직해서 돈 보내는 형들도 있잖아요.”
“그렇지.”
대표적으로는 물론 박유민인다.
박유민은 벌어들인 연봉과 상금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보육원에 보내고 있다. 성심 보육원이 보육원들 중에서는 재정 상태가 최상급에 속함에도 박유민은 돈을 보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성심을 나간 아이들은 취직을 해서 보육원으로 돈을 보내오고 있었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그 돈은 분명 아이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보육원을 돕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음, 나는 뭐랄까…… 그건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한진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조금 머뭇거리던 한진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불안함은 있어요. 어쨌든 나는 보육원 출신이니까, 그러니까 애들을 좀 더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애들에게 부모가 있는 사람들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는 없겠구나 하는 불안함이요.”
강진호는 말없이 한진성의 목소리를 들어주었다.
지금은 그저 듣는 걸로 족하다.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겠죠. 그리고 저라도 저 같은 보육 교사와 살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음…….”
볼을 긁던 한진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자란 부분은 제가 더 노력하면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보육원에서 워낙 받은 게 많으니까. 그러니까 저도 아이들한테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강진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가슴이 뭔가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수녀님의 말을 전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한진성도 지금 원장 수녀님의 유언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원장 수녀님이 성심 보육원에 내린 싹이 아이들에게서 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그런 얼굴 하지 마요, 형. 저도 한심한 생각인 건 알아요. 제가 뭐라고.”
“아니.”
강진호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기특하다.
누군가를 기특하게 느껴본 것이 언제 가진 감정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냥 생각은 그랬어요. 그럼 이제 결정해야죠. 보육원에서 나가 학교를 다니든가, 아니면…… 음.”
한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냥 결정은 난 것 같아요. 보육원 나가야죠.”
“오빠!”
조미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한진성은 조미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보육원에 더 있고 싶어요. 자립관에 있으면서 애들한테 잔소리도 좀 하고 싶고, 떨어지고 싶지 않죠. 그런데 여기서 제가 다른 학과를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복수 전공이라든가 다른 방법도 있잖아.”
“그럴 여유 없어. 아르바이트도 병행해야 하는데, 어중간하게는 못해.”
“그래도…….”
“결정했으니까 두말하지 마.”
강진호가 뚱한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걸 지금 선택해?”
“네?”
“재수해.”
“……네?”
한진성이 멍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봤다.
“재수하면 되잖아. 1년 더 하면 성적도 더 오를 테고, 그럼 좋은 학교 가면 되지.”
“아, 아니, 형. 자립관은 재수생은 못 들어가요.”
“누가 그래?”
“원래 그래요.”
“여긴 안 그래.”
“아니, 그게 법이…….”
“내가 돈 내는데 법이 왜?”
한진성의 눈이 떨렸다.
뭐랄까, 이…….
엄청나게 듬직하면서도 무지막지하게 재수 없다.
“너 말고 다른 애들도 재수하고 싶으면 재수하라고 해. 학원도 만들어놨겠다, 애들만 보내기는 아깝잖아.”
“……그래도 돼요?”
“안 될 이유라도?”
한진성의 눈이 살짝 떨렸다.
“밥만 축내는데.”
“지금은.”
“……따뜻한 말로 위로해 줄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현실을 이야기한 거지.”
“끄응.”
한진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한 해라도 빨리 일하고 싶은데.”
“괜찮아. 한 해 늦는다고 많이 늦는 것도 아냐.”
조미혜가 거들었다.
“맞아, 오빠. 요즘 재수는 필수라잖아. 삼수는 선택이고.”
“싸우자는 거냐?”
“좋게 좀 들어! 인성이 배배 꼬여 가지고!”
“끙.”
고민이 많은 듯 한진성이 장고에 빠졌다. 그런 한진성을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고민해? 너는 어차피 군대도 안 가잖아. 그럼 한 해 재수해도 남들보다 1년 빠른 거지.”
“그건 그런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강진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지금 조금 돌아가는 게 늦는 게 아닐 수도 있다. 더 멀리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웅크릴 줄도 알아야 돼.”
“예, 형. 근데…….”
한진성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 이 짓을 일 년 더 하려니까…… 죽을 것 같아서 그러죠.”
“…….”
“…….”
“아, 미친. 일 년 공부하느라 죽을 뻔했는데, 한 번 더 해야 한다니. 아, 미리미리 공부 좀 할걸!”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가 하는 후회를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한진성이었다.
“그럼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일단은.”
“그래.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고민해 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예.”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네.’
한진성이 보육 교사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아, 애들이나 괴롭히러 가야겠다. 이번에 고3 되는 애들한테 내 꼴을 보여줘야지. 속 쓰리게.”
…….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