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36
#1235.
장악하다 (5)
“그러니까…….”
최연하가 이마를 짚고 소파에 앉았다.
“아니, 그러니까…….”
살짝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잔을 잡으려고 하던 최연하가 비어 있는 잔을 보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 빨리!”
“넵.”
강진호가 바로 일어나 물을 떠 왔다. 냉수를 받아 든 최연하가 컵 가득 담긴 냉수를 지체없이 원샷해 버리고는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같은 말만 세 번째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런 최연하의 반응을 이해했다.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인계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그런데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강진호가 한국 무인계의 지배자라는 말을 들었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일단 이거, 다 사실인 거죠?”
“…….”
“사실이겠지. 당연히 사실이겠지. 강진호 씨가 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보다는 고양이가 리어왕을 쓰는 쪽이 더 쉬울 테니까.”
미묘하게 아까부터 악담이 자꾸 따라붙는 것 같은데…….
할 말이 조금 생긴 강진호지만, 지은 죄가 있어 입을 꾹 닫았다. 지금 괜히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세상에 초능력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초능력이 아니라 무학.”
“그거나 그거나!”
“……네.”
최연하가 인상을 확 쓰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초능력을 쓰는 사람이고, 두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
“…….”
“연배는 오백 살이 넘었고?”
“그건 아닙니다.”
강진호가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 시대를 산 거지, 오백 년을 산 게 아닙니다.”
“백 살은 넘은 거잖아요.”
“어, 음…….”
이건 부정하기 좀 애매한데.
물론 부정하려면 부정할 수 있다. 두 번째 삶과 지금의 삶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강진호의 두 번째 삶은 죽음이란 완전한 종결을 맞이했다.
지금 강진호는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다. 전생이 기억났다고 해서 전생의 나이를 더해야 한다면, 누가 억울하지 않겠는가. 물론 강진호는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육체적 나이는 이제 스물…….”
“의미 없는 변명은 그만둬요, 영감님.”
“…….”
아프다.
칼로 맞은 것보다 더 아프다. 강진호가 고통에 신음하는 동안 잔인한 최연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어디, 황정후 회장님의 숨겨둔 아들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유력 정치인의 사생아라든가. 조폭 두목까지는 각오했는데, 이게 뭔 판타지야?”
최연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거꾸로 치솟는다.
“정리하자면…….”
최연하의 눈이 이글거린다.
“진호 씨가 그 초능력자들이 모여 있는 한국 뭐 어쩌고 회의 회주고, MK는 그 회의 자회사라는 거죠?”
“네.”
“바지회장이 아니라 진짜 회장이었고?”
“네.”
“아이고, 두야.”
최연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물 한 잔 더.”
“네.”
강진호가 물을 뜨러 가자, 최연하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뭔 영화 한 편 본 기분이네.’
그것도 장르가 SF다.
뭐? 미스터리나 판타지 아니냐고?
지금 사람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데, SF 말고 무슨 장르를 들이밀겠는가.
‘와. 이건 생각보다 더하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최연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웃으며 전화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정신병원에 전화했겠지. 이 인간, 당장 입원시키라고.
하지만 최연하가 알기로 강진호는 딱히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거짓말이라기에는 너무 쓸데없이 디테일하고 장황하다.
이만한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재능을 썩히지 말고 소설가로 데뷔하는 쪽이 낫다. 물론 강진호는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럼 진실이라는 건데…….’
하지만 진실이라기에는 너무 파격적이지 않은가.
“여기 물이요.”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최연하가 손을 뻗어 강진호의 볼을 꼬집었다.
“으…….”
“잡히는 걸 보면 사람은 맞는데…….”
손을 뗀 최연하가 물을 받아 들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도무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진호 씨.”
“말씀하세요.”
“나 진짜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닌데요.”
못 믿는 것 같은데…….
“진짜 그런 건 아닌데…… 있잖아요, 그런 거. 뭔가 그, 어…… 이해는 하는데 납득이 안 되는, 그런 느낌? 그런 어…… 미묘하고 이상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알 것 같습니다.”
“알죠? 그죠? 알죠? 그러니까…….”
최연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증명할 만한 거, 그러니까 눈에 확실히 보이는 거 있잖아요. 이건 평범한 사람은 못…….”
그 순간, 강진호의 손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
불꽃이 그 크기를 키워 확 커지더니, 다시 성냥불 크기로 줄어든다.
“와, 나…… 돌겠네.”
최연하가 싱글 몰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연 세 잔 마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머리로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와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다.
‘나도 미쳤지.’
이 와중에 강진호가 미워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뭔가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건 비밀이 아니라 폭탄 수준이다. 강진호가 평범한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반쯤은 슈퍼맨처럼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비유지, 진짜 사람이 아닐 줄 알았나!
아, 아니, 사람은 사람이지. 이상한 사람.
“아, 머리에서 김 날 것 같아.”
“괜찮은 것 같은데…….”
최연하가 눈을 흘기자, 강진호가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뒤로 몸을 물렸다.
입이 방정이지.
“저…….”
“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요. 나 지금 정리하는 중이니까.”
“…….”
몇 번 탄식하고, 한숨 쉬고, 심호흡을 한 끝에 최연하가 본연의 신색을 되찾았다. 여전히 상기된 얼굴이지만, 표정은 거의 본래대로 돌아왔다.
“하…….”
짧게 탄식한 최연하가 강진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고는 살짝 떨리는 손을 강진호의 얼굴로 뻗었다.
살짝 강진호의 뺨을 쓰다듬는다 싶던 손이 볼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
“아픈 척이라도 해!”
“아야야!”
“제길!”
강진호의 얼굴에서 손을 뗀 최연하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아, 사기당했어. 세상에, 나는 그래도 내가 연상인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사고의 방향이 조금 이상한 쪽으로 흐른다.
“이봐요, 사기꾼 씨.”
“네.”
“어떻게 그런 걸 숨겨요?”
“…….”
“아니, 아니지. 이건 안 숨길 수가 없겠다. 괜히 말했다가 미친놈 취급받겠지.”
잘 아시네요.
“아, 얄미워. 짜증 나.”
최연하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어요. 어쨌든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믿어요?”
“안 믿을 도리가 있나. 사람이 평소에 좀 날티라도 나면 구라겠거니 하겠는데, 세상 진지한 양반이 그런 얼굴로 거짓말할 것 같지도 않고.”
최연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 이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최연하는 강진호를 안다. 잘 안다는 말은 지금 들은 이야기 때문에라도 함부로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강진호가 어떤 감정으로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놓는 강진호의 얼굴은 절대 거짓을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입을 삐죽이던 최연하가 강진호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 쉬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요.”
“무슨 얼굴요?”
“내가 뭐, 그런 이야기 들었다고, 찝찝해하기라도 해요? 왜 사람 못 믿는 얼굴을 하고 있어요? 애도 아니고.”
“…….”
내가 그랬나?
강진호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평범한 사람이야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다고 표정을 알 수 있을 리 없지만, 강진호의 예민한 감각은 그걸 가능케 했다.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참 신기한 일이다.
정밀한 기계를 동원해도 자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잡아내기 쉽지 않을 텐데, 최연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해낸다.
“신경 쓰지 마요. 좀 있으면 적응될 거예요. 너무 한 번에 많은 이야기를 들어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 거니까.”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최연하가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만…….
“아, 이제 좀 진정이 되네.”
다시 한 번 냉수를 들이켠 최연하가 입가를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리 와봐요.”
강진호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빨리.”
최연하가 재촉하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쭈뼛대며 다가갔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최연하가 빤히 강진호를 올려다본다. 그러고는 양팔을 뻗어 강진호를 끌어안았다.
강진호가 본능적으로 꿈틀댔다.
“가만히 있어봐요. 어디서 앙탈이야?”
“…….”
강진호가 긴장한 얼굴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탁, 탁.
최연하의 손이 가볍게 강진호의 등을 두드렸다.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우선 이거부터 해줬어야 하는데, 좀 늦었어요.”
“…….”
“고생했어요,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최연하의 말대로 그는 백 년에 이르는 세월을 살아왔다. 육체가 젊어짐에 따라 그의 정신도 젊어졌다지만, 백 년의 삶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강진호는 가슴에서 울컥하고 차오르는 이상한 감정에 당황하고 있었다.
최연하의 손이 가볍게 강진호의 등을 두드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서 더 슬프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혼자서.”
강진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해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저질러 버린 사람이니까.
하지만 뭐랄까…….
등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람을 쓰다듬는다.
갈라진 무언가를 어루만진다.
조금은 간지럽고.
따뜻하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처럼.
“고생했어요. 이제 괜찮을 거야.”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구나.
그저 이 말이…….
손길이 생각난다.
추운 겨울의 밤.
쓰러져 죽어가던 그에게 내밀어졌던 그 손.
그 온기.
평생 다시는 느껴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그 따뜻함.
사부가 그에게 내밀었던 손.
‘수녀님.’
다른 이의 상처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사람.
부르튼 상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
그저…….
그저 먼저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
겁에 질려 있는 이에게 손을 내밀고,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사람.
이상하지.
이제는 강진호가 다른 이를 위로해 줘야 하는데, 아직도 강진호는 이 작은 손길에 위로받고 있다.
강진호가 손을 들어 최연하를 끌어안았다.
살짝 당황한 듯한 최연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시곗바늘 소리.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창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이제 괜찮아요, 괜찮아.”
사람의 온기가 따뜻하다.
뜻하지 않은 위로, 기대하지 않던 어루만짐.
강진호는 그렇게 아이 같은 얼굴로 온기 속에 스며들었다.
조금은 멋쩍고.
조금은 따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