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37
#1236.
수립하다 (1)
“아니, 서류 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냐고!”
“테스크포스 명단 나왔어? 1차 명단 나와야 결제받을 거 아냐!”
“양식표! 양식표 있는 사람!”
“야, 이 새끼야! 양식표도 없어서 남한테 달라고 해?”
“죄송합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무력대의 전쟁은 끝났지만, 사무직들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그 뒤처리는 상상을 불허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번 전쟁은 며칠 만에 끝이 났고, 해야 할 일이 크게 많지는 않았다.
다만, 시급을 요할 뿐이다.
이현수가 난장판이 된 사무실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지.”
예전이었으면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멍때리고 있었을 놈들이 자체적으로 할 일을 찾아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광경일지 모르겠지만, 이현수는 원숭이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막말로 저놈들이 어디 사람이었나.
완전한 원숭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완전한 인간도 아니었다. 인간과 원숭이의 사이 어디쯤을 살던 놈들이다.
그런 이들이 마늘과 쑥…… 아, 이건 곰이구나.
여하튼 뭘 처먹었는지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는 써먹을 수 있느냐 써먹을 수 없느냐가 아니던가. 이제 사무실에 일을 하는 이들이 가득가득 들어찼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이현수였다.
“조규민이한테 술 한잔 사야겠네.”
이게 다 재경과 조규민이 힘써준 덕분이다. 물론 힘이야 황정후가 썼지만, 실제로 일을 진행한 건 조규민이니까.
슬쩍 모니터를 훔쳐본 이현수가 아빠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기업 클라스.’
이래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대기업으로 보내라는 말이 생겨난 것 아닌가.
재경의 연수를 마친 이들은 무려 액셀을 사용할 줄 아는 신인류로 진화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명단 나왔어?”
“아직 취합 덜 됐습니다!”
“서둘러, 이 새끼들아! 오늘 내로 결제 다 올라가야 한다고! 이 새끼들이, 무인이라는 새끼들이 손가락 놀리는 꼬라지 봐라! 빨리빨리 작성 안 해!”
물론 사무실 분위기는 현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좀 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상사가 저런 식으로 굴면 당장 모가지가…….
아니지, 아니지. 아직도 사무실에서 폭행을 저지르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사장도 나오는 판에 무슨 일인들 안 벌어질까.
여하튼 일반적인 사무실의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총회 특유의 강압적인 목소리와 거친 언사가 오갔지만, 이건 총회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서로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에서 나름의 활기는 느껴진다.
“뭐, 이 개새끼야!”
“아니, 씨바! 마우스 선 뽑힌 걸 몰라서 고장 났다고 사람을 부르냐, 이 꼴통 새끼야! 조선 시대에서 왔냐?”
“나와! 마우스 선도 뽑은 김에 니 대가리도 뽑아줄 테니까!”
“나오라면 못 나갈 줄 알아?”
봐라.
활기차지 않은가.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아직은 조금 부족하지만…….’
아무리 재경의 연수를 받고 왔다지만, 한 명, 한 명이 다들 제 몫을 하는 건 아니었다. 연수는 말 그대로 전반적인 교육에 불과하다.
연수가 끝난 신입 사원은 숙련된 사무직의 지도를 받으며 일인분을 하는 훌륭한 사원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총회에는 그 숙련된 사무직이 부족하고, 당장 이들을 전력화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1인분은 못해도 0.5인분만 해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여……야 하는데.
사무실 문을 연 이현수가 더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러냐고! 빌어먹을!”
그의 눈에 탑처럼 쌓인 서류들이 보인다.
얼마나 쌓아뒀는지 그의 책상이 서류 더미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실장님!”
그도 모자랐는지 서류 더미를 한 아름 안아 든 이들이 문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게 다 뭐야?”
“결재 서류랑 검토 서류입니다! 빨리 확인해 주십시오. 이거, 허가 떨어져야 진행되는 일들입니다.”
“아니, 지금이 무슨 쌍팔년대도 아니고! 이걸 왜 뽑아서 가져와! 니들 거기서 전자 결제하는 법도 안 배웠냐?”
“시스템이나 확인하고 말씀하십시오. 전자 결제로 올릴 수 있는것들은 다 거기로 올리고 있습니다. 얘들은 그거 빼고 남은 서류들이에요. 컴퓨터로 보낸 게 다섯 배는 될 겁니다.”
“……농담이지?”
“농담 아니니까 그만 노시고 빨리 일하십시오. 남들은 바빠 죽는데, 왜 혼자서 태평하십니까!”
“…….”
이현수가 질린 얼굴로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아니…… 일이 줄어야 하는데, 왜 일이 더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일이 왜 줄어듭니까, 애들 능력이 올랐는데. 옛날이면 이 서류들 다 들어오는 데 5일은 걸렸을 겁니다. 애들이 능력치가 올라가니까 올라오는 서류도 많은 거잖아요.”
“아?”
그건 생각 못했는데?
잠깐만.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럼 이제 일이 계속 늘어나는 건가?
“속도만 빨라진 거지? 양이 늘어난 건 아니지?”
“양도 늘어났습니다. 지금까지는 몰라서 뭉개던 것들 다 찾아내서 정리하는 중입니다.”
이현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니,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이 부장님이 시켰습니다.”
“현주가?”
“네.”
이현수가 말을 잃고 멍하니 서류를 바라봤다.
“특히나 회계 자료 신경 쓰랍니다. 1원만 틀려도 대가리를 쪼개 버린다고 하던데요.”
“너무 과격하게 말 바꾸지 말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말한 겁니다.”
“……팩트로 때리지도 말고.”
“힘내십쇼. 농담 아니라 빨리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결재 서류가 안 내려와서 애들이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내가 총회에서 일 재촉을 당하는 날이 오다니.’
이게 좋아할 일인가, 슬퍼할 일인가.
뭔가 기뻐해야 할 일 같기는 한데, 이상하게 서글픔이 밀려온다.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건만, 이현수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이거, 까딱하다가는 일이 늘어나게 생겼다.
“……금방 처리해 줄게.”
“저거 다 하고 퇴근하셔야 됩니다.”
“……알았다고.”
이현수가 터덜터덜 컴퓨터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위장약 통을 꺼냈다.
알약을 입안에 탈탈 털어 넣은 이현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으적으적 알약을 씹었다.
‘이러다가 일찍 죽을 것 같은데…….’
무인이 과로사라니.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쓰지 않을 황당한 소재다. 하지만 이현수는 지금 이 순간, 정말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오늘은 자정 전에 퇴근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개고생을 해가며 애들을 연수 보낸 의미가 없다! 반드시! 반드시 12시 전에는 퇴근한다! 저녁 있는 삶이여, 오라! 아니, 새벽 있는 삶…….
RRRRRRRR.
하지만 그 순간, 이현수가 순순히 일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휴대폰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버리려던 이현수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삑.
“예, 총리님. 이현수입니다. 요즘 꽤나 자주 통화하는 것 같네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말에 이현수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다.
“예. 일단 말은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회주님이 좀 바쁘십니다. 시간을 내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네? 네. 물론 큰 불이야 껐죠. 그런데 불이라는 게 불씨 하나만 놓쳐도 다시 타오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본 쪽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회주님도 자리를 비우기 힘드십니다.”
물론 거짓말이지.
강진호가 전쟁 뒤처리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할 정도면 총회라는 조직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조직이 되어버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현수가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하지만 총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절대 저쪽에 강진호가 시간이 남아도는 쉬운 남자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강진호도 최근에야 정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정치, 그러니까 관계라는 건 이런 작은 곳에서 시작한다. 부르는 쪽은 갑이 되고, 불려가는 쪽은 을이 되기 마련이다.
정부와 힘 싸움을 할 생각은 없다. 정부의 이름으로 초청한다면, 강진호에게도 권유해 볼 의향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총리는 아니지.’
하루살이 임명직이 힘을 휘두르려 하면, 이쪽에서 곱게 보기 힘든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김명찬과 아무리 관계를 좋게 유지해 봐야 어느 날 총리가 교체되어 버리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간다. 후임 총리가 김명찬과 성향이 다르다면 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고.
그러니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네. 그럼 날씨가 찬데 건강 관리 잘하십시오, 총리님.”
전화가 끊기자 이현수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거참, 생색 더럽게 내려고 하네.”
이래서 정치인들은 피곤하다.
당연하게 해줘야 할 것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공을 티 내려고 안달이다. 공이라고 할 것도 없으면서.
“자, 그럼 일을…….”
그때였다.
벌컥!
문이 과격하게 열린다.
인상을 쓰고 고개를 든 이현수가 들어오는 이를 보고 바로 얼굴을 풀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이현수라고 할지라도 강진호를 보며 인상을 쓸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회, 회주님?”
강진호의 얼굴이 이상하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던 강진호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수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 회주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강진호가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휘젓었다.
“커, 커피 한 잔만 진하게 내려줘.”
“예!”
이현수가 화들짝 놀라 커피를 내리러 갔다. 평소 이현수가 탄 커피는 맛이 없다고, 꼭 제 손으로 커피를 내려 먹는 강진호다. 그런데 이현수에게 커피를 부탁한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커피를 잔에 담아 강진호 앞에 내민 이현수가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빠져나간 영혼을 어찌어찌 갈무리한 강진호가 텅빈 동공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이야기를 했거든.”
“이야기요?”
“최연하 씨한테.”
“아!”
이현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꽤나 민감한 문제다. 평범한 이들은 무인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기에 끝내 주변에 자신이 무인이라는 것을 숨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게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끼니까.
게다가 강진호는 그 무인 중에서도 특별하지 않은가. 최연하가 기겁을 해서 관계를 끊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거기까지야 안 가겠지만.’
관계의 경색은 어떻게든 벌어질 수 있다.
“언제 말하셨습니까?”
“어젯밤에.”
“……어떻게 됐습니까?”
“어…….”
강진호가 고개를 꺾었다.
“뭐, 어떻게 잘됐는데, 좋게 풀렸는데…….”
“이해해 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뭐가 문젭니까?”
강진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잔소리가 끝이 없다.”
“에이, 그 정도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듣고 왔다.”
“…….”
이현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시간이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열두 시간?
아니면 열여섯 시간?
그정도면 고문 아닌가?
이현수가 그런 고문을 받는다면 3대조 할아버지의 팬티 색깔까지 불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죠.”
그 정도면 싸게 먹혔지.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려는 찰나, 강진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러 오겠대.”
“……뭘요?”
강진호가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
“여기.”
“……네?”
“총회 보러 온대.”
“네?”
이현수의 뇌가 과부하를 일으켰다.
“네? 최연하 씨가…… 그러니까 사모님이…… 아니, 이사님이 총회를 보러 온다구요?”
“……어.”
이현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미친! 차라리 일본이랑 다시 전쟁하는 게 낫지.’
이현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그래서 허락하셨습니까?”
“아니. 안 된다고 했는데…….”
“했는데?”
“자기도 MK 이사니까 올 자격이 있다네? 할 말이 없더라고.”
“…….”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어떻게든 말렸어야지! 이 양반아, 무슨 생각이야!”
강진호의 휘하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강진호에게 삿대질을 해버린 이현수였다.
한국 무도 총회의 권력 서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