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41
#1240.
수립하다 (5)
“커피?”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 좀 바빠서 올라가 봐야…….”
“커피?”
“아니요. 괜찮…….”
“커피?”
“따뜻한 걸로.”
강진호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겠습니다.”
“괜찮아.”
강진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 이현수를 지그시 눌렀다. 물론 아무리 손가락 하나라고 해도 이현수가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강진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금세 뽑아져 나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온 강진호가 이현수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사장님이 이제 커피 잘 뽑으셔.”
“아, 그렇습니까?”
개밥이든 죽밥이든 먹을 수만 있으면 아무거나 퍼 먹는 강진호가 유일하게 가리는 것이 커피였다. 그런 강진호가 괜찮다고 했으니 커피는 분명 맛있을 것이다.
물론 이현수는 그런 걸 가리지 않는다.
커피를 들고 나선 이현수가 카운터로 가서 시럽을 짜 넣었다.
쭈욱, 쭈욱, 쭈욱, 쭈욱.
시럽이 한 번 쥐어짜일 때마다 강진호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연이어 다섯 번을 펌프질한 이현수가 개운하다는 얼굴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설탕물.”
“저는 이게 취향이라…….”
“커피 맛이…….”
“다 느껴집니다. 커피 좀 마신다는 분들은 이상하게 남의 취향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시더군요. 설탕을 타든 고춧가루를 타든 맛만 있으면 그만인데 말이죠.”
“음, 그렇지.”
강진호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기가 먹는다는데 남이 뭔 소리를 하겠는가.
“맛있어?”
“반은 맛이고, 반은 열량이죠. 아침에 당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머리 도는 게 한 2할은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평소에는 포도당 캔디라든가 급속 당 충전용 액상 같은 걸 먹는데, 오늘은 마침 커피도 있겠다, 고급스럽게 충전해 보죠.”
강진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식생활마저 일과 연관 지어 최적의 효율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이다. 그런 생활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강진호의 무학에 대한 집착조차 초월하는 부분이 있었다.
“장민 장로에게서 어젯밤 연락이 왔습니다. 보고서를…….”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네.”
이현수가 말없이 커피 잔을 잡았다.
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강진호와는 매번 그런 이야기들만 했으니까.
강진호가 출근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대화가 끊기자 지나는 이들이 강진호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주님!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회주님, 저희 용품 떨어진 게 아직 충원이 안 됩니다!”
마지막은 조금 이상했지만, 대체적으로 다들 인사 한마디를 빼먹지 않았다.
“그냥 가도 될 텐데 말이야.”
강진호의 말에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었다.
“인사라는 건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친분을 확인하는 과정이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 하는 인사는 건성이 될 수밖에 없고, 어떻게든 감정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다들 회주님이 좋은 거죠.”
강진호가 살짝 어색한 얼굴을 했다.
“내가 뭘 했다고.”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지만, 꼭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날 이용하려 하는지, 아니면 뭔가 해주려고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죠.”
“그래?”
“예. 지금까지 회주님이 해오신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강진호가 묘한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진 것 같은데?”
“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보고서 바로 올리겠습니다.”
“어…… 어, 그래.”
“어제 결제 올라간 거 안 내려왔습니다.”
“응? 다 했는데? 올라가면 바로 확인해 줄게.”
“좋은 아침입니다!”
쏟아지는 인사에 이현수도 살짝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현수는 다들 출근하는 아침 시간에 로비를 차지하고 앉아본 적이 없다. 사무실에 올라가 일을 하는 것만도 바빴으니까.
그러다 보니 어색하다.
누군가의 호의가 자신에게 쏟아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한참 동안 인사를 받고 사람들이 조금 줄어든 후에야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강진호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어때?”
“……주둥아리는 함부로 놀리는 게 아니네요. 굉장히 민망합니다.”
“이 실장이 해온 일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 아닐까?”
“하지 마십쇼! 와, 내 손발!”
이현수가 질색을 했다.
강진호가 그 광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은 싸늘한 아침 공기와 커피 향, 그리고 강진호의 모습을 보며 이현수가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여유라는 거구나.’
일이 바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여유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시간이 있는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이 빈곤한 자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있어도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과거의 이현수처럼 말이다.
조금 나른해지는 걸 느낀 이현수가 퍼뜩 커피를 들이켰다.
‘아직은 아니지.’
여유를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현수에게 여유는 아직 이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이상하네요.”
“음?”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뭔가 나아진 건 아닙니다. 일은 여전히 바쁘고, 위협적인 적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를 갈고 있고, 총회는 발전하고 있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죠.”
“음…….”
“그런데도 뭔가 하나 해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제가 예전보다 물러진 건지, 아니면…….”
“쉴 때가 된 거지.”
“아니, 아직은…….”
강진호가 이현수를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말을 타고 가장 멀리 가는 법이 뭔지 아나?”
“예?”
강진호가 이현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밤이 되면 말을 쉬게 해주는 거지. 좋은 풀 먹이면서.”
“…….”
“차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거야. 세상 모든 것이 다 같겠지. 재촉하고 악을 써서 속도를 높이면 지금 당장은 빨리 가겠지. 하지만 그것도 적당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파탄이 나는 법이니까.”
“그렇겠죠.”
“쉴 때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현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
하기야 생각해 보면 쉴 새 없이 일하기는 했다. 영남회에서도 제대로 쉰 날이 없고, 총회에 오고 나서도 쉰 날이 없다.
번 아웃이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녀와.”
“네? 어딜요?”
“휴가.”
이현수의 눈이 둥그레졌다.
“뭔 놈의 휴가입니까? 저 빠지면 총회 안 돌아갑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직장 다니는 사람이 제일 크게 하는 착각이 그거라더라. 나 빠지면 회사 망한다.”
“…….”
“그런데 실제로는 안 망해. 어떻게든 굴러가지.”
“아, 아니,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할 테니까.”
이현수가 의아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공식적으로 휴가를 준다고? 그것도 이런 시기에?
“아니, 휴가를 가라면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죠. 지금만큼 바쁠 때가…….”
“언제 안 바빠지는데?”
“어…….”
그런 시기가 있었나?
이현수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여유가 온다는 것도 그냥 희망 사항일 뿐이다.
홍왕계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고, 일본의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런데 언제 휴식하기 좋은 시기가 온단 말인가.
“다녀와.”
“왜 이러십니까, 회주님?”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생각 없어. 그냥 큰 산 하나 넘었으니까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저만 갈 수는…….”
“다 보내.”
“예?”
“일주일 정도씩 다 휴가 보내지.”
“아, 아니, 회주님.”
“일주일 쉰다고 별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다들 고생했으니, 이번엔 한 번 쉬어야지.”
목숨을 걸고 수련하라던 강진호 같지 않다.
“대신 돌아오면 더 빡세게 할 거니까 각오하라 그래.”
아니네. 강진호 맞네.
“언제부터 생각하신 겁니까?”
“전쟁이 끝나고 생각했지. 사람이란 건 당근과 채찍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어. 한 번씩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야지. 이번 전쟁으로 다들 느낀 게 많을 테니까, 딱 좋은 시기야.”
이현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많으시구나.’
전쟁이 끝나기 전, 대량의 탈퇴자가 나왔다. 총회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이들. 심지어는 전쟁이 대승으로 끝났음에도 총회를 그만두겠다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에 대한 무거움.
그리고 자신 역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모두가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강진호도, 방진훈도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보내주었다.
아마 지금 이 휴가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진짜 가도 됩니까?”
“알아서 진행해. 빨리 처리해 줬으면 좋겠군.”
“그럼 저…….”
“응?”
“이현주 실장이랑 맞춰 가도 됩니까?”
“…….”
강진호가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이현수는 당당했다.
“결혼해?”
이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들을 때마다 심장을 내려앉게 만든다.
“그럴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만, 혼자 휴가를 가서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음…….”
“한심하다는 말을 하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회주님께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강진호가 뼈를 맞았다는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진짜 후회 안 하시죠?”
강진호가 가만히 이현수를 보며 웃는다.
“뭔가 문제가 있기는 했다는 생각이 드네. 겨우 일주일 휴가 가는 걸로 이런 말까지 나오는 걸 보니.”
“양심적으로 회주님이 사람 좀 몰아쳤습니까? 안 세지면 죽는다고 사람 구박하셔 놓고, 이제 와 워라밸이라니. 당연히 당황스럽죠.”
“그때는 그렇게 안 하면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죠.”
멈춘 수레는 밀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달리기 시작한 수레는 억지로 멈추려고 해도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총회의 무인들은 이제 관성이 붙어 스스로 나아가고 있다. 굳이 강진호가 재촉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재촉이 아니라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최적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바쁜 것부터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애들 휴가계 받겠습니다. 진짜 후회 안 하시는 겁니다?”
“쉬고 와,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이 실장이 고생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다들 그러니까 이 실장에게 호의를 보내는 거겠지.”
“…….”
“조금 쉬고 재충전해서 와. 해외로 나가보는 것도 좋고, 집에서 굴러다니는 것도 좋겠지. 그건 선택에 따라.”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이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음, 수고해.”
“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하던 이현수의 발걸음이 멈췄다.
“…….”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로 머뭇머뭇하던 이현수가 미묘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저…… 회주님.”
“응?”
“이건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음?”
“혹시 이번 휴가 말입니다. 최연하 이사님이 총회 방문하기 전에 애들을 최대한 다른 데로 보내 버리려고 계획된 건 아니죠?”
“…….”
“회주님?”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