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77
#1276.
협력하다 (1)
“깝치고 있어.”
“네?”
“아뇨, 아무것도.”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아마 지금쯤 고아름은 뱃속이 타는 듯한 짜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고아름 같은 타입을 상대하는 방법은 링 안에서 내가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애초에 그 링에 오를 급을 넘었다는 걸 인식시켜 줘버리면 된다.
고아름이 아무리 업계에서 치고 올라와 최연하를 따라잡는다고 해도 최연하는 이미 더 높은 세계에 있어 어울릴 수 없다. 최연하를 목표로 삼은 고아름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허무한 일이 있을까.
‘애초에 그럴 일도 없겠지만.’
싹수라는 게 있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 십 년을 굴러먹은 최연하다. 딱 보면 이 사람이 이 업계에서 성공할지 성공하지 못할지 알 수 있다.
한 해, 두 해 최연하 이상의 화제성을 얻고, 최연하 이상의 인지도를 얻은 배우는 열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다. 하지만 그들 중 아직까지 그때의 기세를 이어가며 최연하 위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기에 최연하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인기라는 건 변덕스러운 대중의 기분에 따라 순식간에 오르고 내린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루머에 휩쓸리든, 스캔들이 시달리든 변치 않고 선택받을 수 있는 확고한 무기다.
고아름에게는 그게 없었다.
‘그래도 촬영은 잘 마무리해야 할 텐데, 걱정이네.’
아무래도 최연하와 투 컷으로 나가는 만큼 그림이 이쁘게 뽑혀주는 게 좋다. 아니, 뭐, 이상하게 나와도 상관없고. 아무려면 어떠랴, 이래도 저래도 최연하는 이득인데.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래요?”
“…….”
그 대답에 미묘한 어감을 감지한 강진호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경험상 나름 최연하 대처법을 확립한 강진호다.
“여자 친구가 새파란 것들한테 늙었다고 괄시받고 왔는데, 기분이 좋아 보여요?”
“……늙지 않았어요.”
“네. 강진호 씨 기준으론 그렇겠죠. 아주 새파란 영계겠지.”
빌어먹을, 대답을 잘못 선택했어.
괜히 대답 한 번 잘못했다가 뼈아프게 얻어맞은 강진호가 재빠르게 다음 대답을 물색했다. 하지만 치고 나갈 말이 마땅치 않다.
“그냥 그런 거예요.”
“네?”
“예전에는 저런 애들 보면 미쳤나 싶었거든요.”
“…….”
“주제도 모르고 깝친다 싶기도 하고, 지가 깝친다고 나를 밟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했는데…… 이제는 뭐랄까, 그냥 이해가 좀 되기는 해요. 여기도 어차피 파이가 한정되어 있잖아요.”
“음…….”
“배우라는 게 참 이상한 직업인 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파이를 나눠 먹을 수가 없어요. 왜냐면 일 년에 제작되는 드라마나 CF, 그리고 영화의 수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거든요. 사실 내가 인기가 있어서 그런 걸 많이 따낸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 돌아갈 기회를 빼앗는 거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배우가 잘나간다고 해서 그 배우를 위한 편성이 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편성이 많아질 뿐이다.
결국은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니 쟤들도 필사적이겠죠. 그 인기를, 그 기회를 자기가 얻어내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머리로는 정확하게 이해 못해도 대충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언을 해준 겁니까?”
“아뇨. 짓밟았는데요? 자라나는 새싹?”
“…….”
강진호가 살짝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돌아봤다. 최연하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방긋 웃는다.
“보통 자라나는 새싹은…… 밟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괜찮아요. 잡초니까.”
그렇지.
잡초도 새싹은 새싹이지.
“한 번 밟힌다고 뭉개질 애도 아니고, 그래도 알아서 잘 살아남겠죠. 그게 안 되면 거기까지.”
“그럼 잡초가 아닌 애들은 물을 주고, 잡초는 밟는 거군요.”
“아뇨. 잡초가 아닌 애들은 더 열심히 밟는데요?”
“…….”
강진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렇지.
이런 여자였지.
잠시 잊었네.
“나도 먹고살아야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고 올라오는 애들 키워주겠어요. 결국 걔들이 내 밥그릇 뺏을 것들인데.”
강진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회사의 후배들은…….”
“걔들은 번 돈 나랑 나눠 먹으니까 예외죠.”
간명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확실히…….’
배울 점이 있다.
조금 냉정한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최연하는 무척 현실적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
어물쩍 그 두 영역을 뭉개고 있는 강진호보다는 최연하가 훨씬 어른스러웠다.
“여하튼 잘했어요. 이쁘게 하고 왔네. 오늘 내렸는데 트레이닝복 입고 있었으면 대충 한 달은 지옥 봤을 거야.”
“…….”
강진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데이트하자는 말에 나름 차려입고 나온 게 신의 한 수였던 모양이다.
“뭐, 트레이닝복 입어도 잘생겼지만.”
최연하가 빙그레 웃으면서 강진호를 바라본다. 강진호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때때로 최연하가 이리 빤히 바라볼 때면 굉장히 어색해진다.
“할아버지치고는.”
“크흐흐흐흠!”
이제 안 어색하다.
이제.
“그런데 왜 갑자기?”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랑 데이트 하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는구나. 그 나이 대는 그런 모양이죠?”
“…….”
강진호가 조금은 서글퍼진 눈으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괜히 이야기했다. 그냥 끝까지 비밀로 할걸.
“농담이에요. 삐치지 말고.”
“안 삐쳤습니다.”
“그냥.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얼굴 보고 싶었어요.”
“얼굴 본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나요?”
“음, 그런 말 들어봤어요?”
“네?”
최연하가 살짝 발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서 자기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사람에게 가장 호감을 느낀대요. 예를 들면 좋은 말을 해주거나, 선물을 사 주거나…… 뭐, 그런 거?”
“그런가요?”
“그런데 미남이나 미녀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주변에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호감도 스텟이 쌓인다네요.”
“…….”
이 세상의 평범한 이들이 들었으면 울부짖을 만한 소리를 태연히 내뱉는 최연하였다.
“말주변도 없고, 딱히 사람을 기쁘게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뭐, 그냥 옆에 존재해요. 그럼 내가 알아서 호감도 채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뭘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다.
최연하가 시트에 살짝 기대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는 그런 생각도 좀 해요.”
“어떤?”
“예전 소속사 사장님 찾아가서 홍삼이라도 좀 챙겨 주고 와야 하나.”
“…….”
“사장님이 나랑 같이 지내는 동안 머리가 많이 빠지셨거든요. 나는 그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까 그 빠진 머리의 반은 내가 잡아 뽑았구나 싶더라구요.”
이래서 사람은 역지사지를 해야 하는 거구나.
평범한 진리를 새삼스레 깨닫는 강진호였다. 소속사를 직접 돌리기 전의 최연하였다면 결코 이런 말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말도 못 걸었을 것들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왜 이건 안 되냐……. 전 사장님 머리가 아니라 그년들 머리채를 뽑아버려야 하는 건데.”
“하, 하하…….”
웃음이 안 나온다. 정말 그럴까 봐.
“그래서 성과는 좀 있어요?”
“벌써 성과 내라고 재촉하는 거예요?”
“절대 아닙니다.”
강진호가 도리질을 하자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잘되는 부분도 있고, 생각보다 잘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종합적으로 생각하면 처음에 계획한 것보다는 빠르게 뭔가 되고 있다는 정도?”
“좋은 거네요?”
“회사 입장에서는 나이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는 않아요. 바쁘고,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도 많고.”
최연하가 슬쩍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반성도 좀 하고.”
“네?”
강진호가 되묻자 최연하가 빤히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고,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 많은 사람 붙들고 매번 내 불만만 늘어놨구나 싶어서 반성하게 되더라구요. 내가 지금 이 상황인데 강진호 씨가 징징대면 나도 엄청 귀찮았겠지. 그게 꼭 애정이랑은 상관없이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다.”
“알아요. 그냥 내가 자체적으로 반성하는 거예요. 강진호 씨가 조금만 더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나 때문에 과부하 걸렸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강진호는 대답 없이 살짝 웃었다.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진호는 평범하지 않고, 최연하도 평범하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이 관계가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 해요?”
“네?”
“힘내라고 해줘야지. 그냥 씩 웃고 있지 말고.”
웃음이 나온다.
한 번씩 최연하의 이런 엉뚱함 때문에 웃게 되는 강진호였다. 총회의 일로 복잡하던 머리가 풀리는 느낌이다.
“힘내요.”
“네, 회장님. 제가 열심히 해서 회사에 돈을 벌어다 바치겠습니다.”
“……그런 힘 말고.”
“그럼 어떤 힘?”
최연하가 은근히 물어오자, 강진호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또 사람을 골탕 먹일 때의 눈빛이었다.
“힘은 내가 아니라 강진호 씨가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네?”
“아니에요.”
최연하가 손사래를 쳤다.
“여하튼 내가 이번에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하나 느꼈는데요.”
“네.”
“강진호 씨, 골치 아픈 일 있으면 나 불러요.”
“…….”
강진호가 영문을 몰라 하며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해결책은 못 내주겠지만, 마음은 좀 편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번에 내가 겪어보니까 사람이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머리를 비우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더라구요.”
맞는 말이다.
지금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가 그럴 때는 놀아줄게요.”
“바쁘잖아요.”
“회장님이 부르시는데 스케줄 취소하고 달려가야죠. 파리 목숨 직장인인데.”
“그럼 그래볼게요.”
“어쭈?”
최연하와 강진호가 마주 보고 웃었다.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이해의 영역도 다르지만,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거면 됐다.
“아, 그런데 다음 달 중순에는 안 돼요.”
“네?”
“중국 가야 하거든.”
강진호가 미묘한 시선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중국이요?”
“네. CF 들어왔어요. 그리고 다음 드라마 캐스팅 논의도 해야 하구요.”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강진호가 미소를 짓고는 가볍게 액셀을 밟았다.
‘중국이라…….’
머릿속에 차이커창과 홍왕의 얼굴이 떠오른다.
‘홍왕.’
지금은 홍왕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던 상대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홍왕에 대한 생각은 강진호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더 강해졌겠지.’
강진호가 그런 만큼 말이다.
그러니…….
“왁!”
“힉!”
깜짝 놀란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꾹 밟았다. 휘청거린 차가 겨우겨우 균형을 잡고 나아간다.
“뭐, 무슨!”
“어디 여자 친구 옆에 두고 다른 생각 하고 있어! 버르장머리 없이!”
버르장머리?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안 되겠어요. 가까운 데 차 세워요. 내가 오늘 나 말고는 아무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
홍왕보다 무서운 여자가 옆에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