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288
#1287.
정비하다 (2)
“……이제 와?”
황당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황민수는 난처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늦긴 했지?”
“조금이요?”
“…….”
날카롭게 쏘아져 오는 반문에 황민수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너무 그렇게 쏘아붙이지 말라고.”
“안 그러게 생겼습니까? 근 오 년을 폐인처럼 지내시던 분이 이제 와 다시 뭘 시작해 보자고 하는데, 하려면 진작 했어야죠.”
“그렇긴 하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포기하고, 이제야 겨우 자리 좀 잡아가는데. 예? 맨바닥에서 다시 시작하자구요?”
“맨바닥은 아니지. 나름 탄탄하다니까.”
“듣도 보도 못한 회사구만!”
황민수가 입맛을 다셨다.
MK를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황민수도 황당한데, MK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 무슨 수로 납득하겠는가.
그리고 이들이 지금 이 부분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단순히 MK에 대한 불신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예전에는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뛰어들었을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 그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장님.”
“이제는 사장도 아닌데.”
“그럼 황민수 씨라고 부릅니까?”
“……사장으로 하자.”
불만 어린 입이 툭 튀어나온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 저런 얼굴을 하는 게 귀여울 리 없지만, 황민수에게는 그 사실을 지적할 용기가 없었다.
“너무 늦었습니다.”
“늦어?”
“예. 너무 늦었어요.”
구정범. 과거, 그의 오른팔이던 구정범 이사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희도 이제야 먹고살 만합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도 쪼들립니다.”
“그렇겠지.”
황민수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이들은 폐족이 된다. 그건 과거 왕가만의 일은 아니었다. 라인을 잘 타면 쾌속 승진이 기다리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라인을 잘못 타는 순간 패가망신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애초에 라인을 탄다는 건 그 라인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뜻이니 딱히 누구를 원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겠지만, 이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설사 황민수가 황민재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렸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안정된 미래가 보장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황민재라고 하더라도 황민수를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는 없으니까. 적절한 지분을 나눠 주고 타협하는 게 누가 이기든 받아들일 결과였다.
하지만 황정후의 복귀라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터지면서 모두가 박살 나버렸다.
그나마 부장급들까지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황민수의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었다. 당연히 숙청을 피할 수 없던 사람들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미안하네.”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사장님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구정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랬지.”
“저희가 사장님께 실망한 건 그게 아닙니다. 깨졌으면 다시 뭐라도 해야지. 뭡니까, 그게?”
황민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황민수는 알고 있었다. 당시에 어떻게든 먹고살 길을 마련해 볼 능력이 있는 이들이지만, 황민수를 기다리느라 그 시간을 놓쳤다는 걸 말이다.
그때, 황민수가 좀 더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더라면…….
‘아니, 그게 아니지.’
또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황민수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네.”
“아, 아니, 사과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황 회장님을 무슨 수로 당합니까?”
“아니, 그게 아니야. 내가 사과하는 건 대처를 잘못한 걸세. 내가 자네들에게 못난 꼴을 보였어.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허송세월하고 말았구먼.”
“…….”
구정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즉에 좀 연락하실 것이지.’
다시 시작하려는 황민수를 보고 있으니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특히나 날려 버린 시간은 지금의 황민수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장님.”
최병찬이 가만히 황민수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용서하신 겁니까?”
“아닐세.”
황민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과는 상관없네.”
“회장님이 용서해 주지 않았는데도 사장님을 쓰겠다는 간 큰 곳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일세. 있더군.”
황민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그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기는 하다.
“담배 한 대 하겠나?”
“끊었습니다.”
“……담배를 끊었다고?”
구정범이 살짝 역정을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도 못 벌어오는 놈이 집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으면 바가지 깨집니다. 담뱃값도 못 버는데, 담배는 무슨 놈의 담배입니까?”
“…….”
“뭐, 이제는 아니더라도…… 그때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지는 않더라구요. 담배만 피우면 옛날 생각이 나서…….”
구정범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감정이 살짝 북받치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황민수도 입맛이 썼다.
한창 일할 나이의 사십 대다. 그것도 사십 대의 나이에 재경의 이사까지 올라간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의 인생을 황민수가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죄스럽다.
“그만 좀 징징대라.”
“뭐?”
노태광이 눈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사내새끼가 뭐 그렇게 불만이 많아? 누가 칼 들고 따라오라고 협박이라도 했냐? 네가 선택했으면 그 책임도 네가 져야지! 왜 네가 선택해서 벌어진 일을 남보고 징징이야.”
“이놈이?”
구정범이 눈을 부라리자, 노태광이 피식 웃었다.
“관둬라. 화내지 마라. 예전에는 화를 내면 귀찮기라도 했지. 지금은 안쓰럽다. 가발이라도 하나 맞추든가.”
“인마! 그거 공격하기 있어?”
“보이는 걸 어떻게 하라고? 머리카락 팔아서 먹고살았냐?”
“……인간 같지도 않은 놈.”
황민수가 슬쩍 입을 가렸다.
몇 해 못 본 사이에 구정범의 머리가 매우 반짝이고 있었다. 탈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황민수는 절대 웃어서는 안 되지만, 사람인지라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둘은 예전부터 이랬다.
둘 다 황민수의 측근이지만, 워낙에 앙숙이라 안건마다 사사껀건 대립하곤 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찬성하는 일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는 소리마저 있을 정도였다.
구정범, 최병찬, 노태광.
이 세 사람이 과거 황민수를 떠받치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황민수의 라인이 겨우 이 세 사람뿐일 리는 없지만, 이들은 황민수도 인정하는 핵심이다.
다시 시작하게 된 이상,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게 황민수의 솔직함 심경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면 됩니까?”
노태광이 담담히 말하자, 구정범이 눈을 부릅떴다.
“야? 너, 할 거야?”
“싫으면 너는 빠지고.”
“아니, 물어보는 거잖아.”
“안 할 이유라도 있나?”
“…….”
“적성도 안 맞는 기업에서 자리나 지키면서 돈 받아먹는 생활이 좋으면 계속 그러고 살아. 나는 그렇게는 못 산다.”
노태광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장님이 돌아오셨다는 건, 다시 뭔가를 해보겠다는 뜻이지. 바닥에서 시작하다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시 시작할 거다.”
“……아니, 바닥은 아니라니까.”
황민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거, 인지도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
그래도 나름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놈들인데, MK를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다. 귓등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광고를 때려붓든, 눈에 띄는 사업을 벌이든 이 지옥 같은 인지도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업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하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노태광의 말에 최병찬이 가만히 황민수를 바라봤다.
“사장님.”
황민수가 최병찬을 바라보았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묻게나.”
“이번 일에 얼마나 거셨습니까?”
“…….”
황민수는 대답을 망설였다. 대답할 말이 궁해서가 아니라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네들도 고민이 많았겠지. 다시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면 좀 변명 같긴 하지만, 자네들이 아무리 고민이 많았다고 한들, 나보다 고민이 많지는 않았을 걸세.”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 내가 마음먹고 자네들을 부른 걸세. 나는 여기에 목숨까지 걸었네.”
황민수가 형형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뒤는 없어. 여기서 실패한다면 나는 그걸로 끝난 놈인 거야. 얼마나 걸었냐고? 전부. 실패한다면 혀 깨물고 죽을 각오 정도는 했네.”
“으음.”
구정범이 침음을 흘렸다.
황민수의 각오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황민수의 눈에서 예전의 그의 모습이 보인다. 황정후에게 숙청을 당한 후 썩어버린 눈이 아니라, 재경이라는 험난한 산을 맨손으로 기어오르던, 그 젊던 황민수의 눈이다.
“언제까지 합류하면 됩니까?”
노태광이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야, 좀 고민을 해보고!”
“고민?”
노태광이 피식 웃었다.
“너는 고민해. 나는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
“니가 그러니까 인마, 매번 실수하는 거 아냐.”
“고민은 충분히 했어, 인마. 사장님이 언제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 안 했냐?”
“…….”
구정범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늦었을 뿐이야. 어쨌든 오긴 왔잖아. 그럼 다시 시작하는 거지, 뭐.”
노태광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어쨌든 나는 합류할 테니까, 너는 너 알아서 해. 안 와도 돼. 차라리 없는 게 편해.”
“이 새끼가!”
구정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니가 한다는데 내가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 같아? 너 같은 등신이 합류 안 한다면 몰라도…… 네가 합류하면 다 말아먹을 거 빤한데, 그걸 어떻게 두고 봐, 인마!”
“변명도 참 같잖게 한다.”
“아니, 이게 진짜.”
“그만.”
최병찬이 나직하게 말하자, 구정범과 노태광이 입을 다물었다.
“사장님.”
“음.”
“솔직히 불만은 많습니다.”
“알고 있네.”
최병찬이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황민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함께하자는 말을 들은 이상,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대신 하나 약속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가는 겁니다.”
“이를 말이겠나.”
세 사람이 제각각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황민수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일단은 프렌차이즈를 하나 만들어보라는데…….”
“프렌차이즈요? 호오.”
구정범이 흥미가 간다는 듯 볼을 긁어 댔다.
“종목은요?”
“이거.”
“예?”
“이거. 카페.”
세 사람이 동시에 주변을 둘러봤다.
“아…… 카페. 어떤 카페를…….”
“이거.”
“……예?”
“여기. 여기를 프렌차이즈화해 보라는데?”
세 사람이 조금 더 다급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구정범이 가볍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사장님.”
“…….”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뵈었으면 합니다. 그럼…….”
노태광이 구정범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구정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몇 년 쉬더니 감이 떨어지셨나! 이걸 어떻게 프렌차이즈로 만듭니까!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구만!”
구정범의 악담에 카운터를 지키던 성주찬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무공을 폐쇄할까?’
무인으로서 평범한 세상을 살아가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