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08
#1307.
잠입하다 (2)
“아주 일을 잘도 하시네요.”
“…….”
“그래서 일정이 뭐가 어떻게 된다구요, 한은솔 씨?”
‘죽여라, 죽여.’
한은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무척 많았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결국은 밥 벌어 먹고살 길을 찾는 과정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는 쉽게 밥을 벌어 먹고살 길도 있지 않은가.
응?
뭐든 자기 일이 가장 힘든 거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멱살을 잡고 끌고 와 최연하와 딱 한 시간만 같이 앉혀두고 싶은 게 한은솔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세상 그 누구라도 이 자리에서 딱 한 시간만 일해보면, ‘바닥 밑에 지하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노라’를 외치며 맨발로 달아날 것이다.
“응? 한은솔 씨?”
“……예.”
“일정이 왜 이렇게 제멋대로인지를 묻고 있는데요?”
“그게…….”
한은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나. 아니, 이사님.”
“네.”
“사실 전 소속사에서는 중국 업무를 전담해 주는 직원이 있고, 통역이 붙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그걸 다 알아서 하잖아요.”
“물론 그렇죠.”
한은솔이 머리를 살짝 긁었다.
“그래서 나름 한다고는 했는데, 이게 중국어가 안 돼서 그런지 생각처럼 처리가 잘 안 되네요.”
“아, 그랬어?”
“……예.”
최연하가 부드럽게 웃었다.
누구라도 저 얼굴을 보면 불만이 사라지고 따뜻한 마음이 돋아날 것이다. 조명 하나 없이 후광을 불러오는 저 미소는 남녀를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저 미소를 기꺼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명, 한은솔뿐이었다.
‘빡쳤네.’
저거, 지대 빡친 얼굴이다.
한은솔은 안다.
그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달아난다고 해도 말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북경에서 미팅하고, 다음 날 홍콩에서 CF 찍고, 그다음 날 다시 북경에서 제작자를 만나는 일정을 잡으셨다?”
“…….”
한은솔이 슬쩍 최연하가 폰으로 켠 중국 지도를 보았다.
‘멀긴 하네.’
아주 하드하다.
거의 첫날은 뉴욕에서 보내고, 다음 날은 런던으로 갔다가 그다음 날 다시 뉴욕으로 가는 여정 수준이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는데…….”
최연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뭐? 그다음 날부터 나흘 동안 일정이 없고, 대기했다가 다시 스케줄 치러야 한다고?”
“…….”
“이게 스케줄이냐, 이게? 초등학생이 짠 생활 계획표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지키지 못할 빡빡한 계획은 포기를 부르는 법이죠.”
“은솔아.”
“예?”
“삶을 포기하게 해줄까?”
“죄송합니다.”
최연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그래서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 다 하라고 했잖아! 지원해 준다고! 네가 필요 없다고, 네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 그랬잖아! 아냐?”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래?”
“그게 말입니다, 이사님.”
“…….”
한은솔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의욕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나가 죽어, 인마!”
최연하가 쿠션을 집어 던지기 시작하자 한은솔이 한숨을 내쉬며 날아드는 쿠션을 받아냈다.
‘썩을 짱개 새끼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일정이 꼬인 이유는 한은솔과는 무관하다.
원래 일정이란 쌍방이 조율해 잡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게 당연했다. 최연하가 괜찮은 일정을 고르면, 중국의 업체 쪽에서 조율을 하고, 다른 일정과 겹치면 다시 조율을 한다.
그렇게 소모되는 시간, 최연하의 체력, 그리고 이동 거리까지 계산하여 일정을 잡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그들이 조율을 하려고 할 때마다 중국 업체들은 조율 불가를 외쳤다. 지금까지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말이다.
‘만만한 거지.’
그래도 그동안은 나름 이름 있는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던 최연하였다. 그런 최연하가 프리로 나와 기획사를 차리니, 지금까지 해주던 대접을 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MK가 나름 인지도가 있는 회사라면 분명 달랐겠지만, MK는 한국에서도 인지도로 따지면 듣보잡 중 듣보잡이다. 중국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럼 사실 그대로 말하고 같이 욕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안 되지.’
한은솔은 그 꼴은 못 보는 사람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한은솔은 면피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최연하의 자존심이 다치게 된다. 매니저란 자신이 욕을 먹을 때는 웃어도 배우가 욕을 먹으면 눈이 뒤집혀야 한다. 차라리 그가 무능한 것으로 처리해 버리는 게 낫다.
나은데…….
“이걸 일정이라고 짜? 경력이 몇 년인데!”
안 나은 것 같기도 하고.
한참 씩씩대던 최연하가 빡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안 되겠어. 그쪽 업체 연결해 봐. 내가 직접 통화할게.”
“……진정하세요, 이사님.”
“왜?”
“중국어 안 되잖아요.”
“간단한 회화는 가능해.”
“……이게 간단한 회화로 될 일이 아닌데.”
“그럼 통역이라도 불러와!”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한은솔이 우물쭈물하자 최연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 한은솔.”
“예?”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에이, 제가 누나한테 숨기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거, 그 새끼들이 꼬장 부린 거지?”
“…….”
귀신인가?
“이게 어디서 나를 속여 먹으려고 그래! 내가 이 바닥에서 눈칫밥만 십 년 넘게 먹은 사람이야!”
확실히 이런 부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래? 일정 조율 못해준대?”
“……네?”
“개새끼들.”
최연하가 미간을 좁힌다.
“안 간다 그래.”
“예? 안 간다구요? 일정 다 잡아놨는데?”
“이 새끼들이 우릴 우습게 보는데, 가서 호구될 일 있어?”
“누, 누나! 아니, 이사님! 이번에 물리면 다시 일정 잡을 때까지 반년은 더 걸려요. 이게…….”
“됐어. 차라리 놀지.”
한은솔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이제 막 회사 처음 시작해서 한참 돈 벌어야 할 시점인데.’
더구나 이번 중국행에는 최연하의 일만 걸려 있는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회사 소속 배우들의 중국 진출을 타진하는 것도 큰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엎어지면…….
“이사님, 그래도 이번 일은 계획대로 진행하시는 게……. 제가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해보겠습니다.”
“은솔아.”
“예.”
“이해가 안 가니? 저 새끼들이 지금 우리 우습게 보잖아. 그럼 가도 얻을 게 없어.”
“…….”
“일정만 그럴 것 같아? 기 싸움 들어간 거야. 이런 일정 잡는데도 좋다고 가면, 그 새끼들이 우리가 급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럼 후려치기 들어온다?”
“그 부분은 제가 확실하게 정리해 뒀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뭔 의미가 있어?”
“……예?”
“내가 너를 못 믿는 게 아니야. 나는 그 새끼들을 못 믿는 거야. 걔들이 말 바꾸는 것 한두 번 봤어?”
이 말만은 한은솔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합의한 사항도 당연하다는 듯이 뒤집어 대는 놈들이 중국 업체다. 신뢰의 문제를 떠나서 계약서를 작성한 일조차 은근슬쩍 다르게 처리하려 든다.
“쟤들은 지금 우리가 만만한 거야. 여기서 말려들면 계약 이행 문제까지 생긴다니까.”
“음…….”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아. 그럼 우리가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때 다시 조율하는 게 훨씬 이득이야.”
“물론 그렇긴 하지만, 쟤들이 저리 나오는 게 꼭 그것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럼 뭐?”
“한한령 때문에 더는 중국에 진출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중국 정부가 막고 있는 추세라…….”
“…….”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조금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밀어붙여 보는 게…….”
“안 가.”
“이사님.”
“나는 그렇게 못해. 괜히 시간 낭비만 할 게 빤하잖아.”
“그럼 그냥 여행 간다는 마음으로…….”
“중국에 여행 가서 뭐 하게? 나는 이제 중국이라면 지긋지긋한 사람이야.”
“물론 그렇겠지만…….”
최연하가 단호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안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더 이야기할 것 없어. 이건 내 뜻에 따라줘.”
“……알겠습니다.”
한은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최연하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우길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밀어붙여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연하가 저리 완고하게 나오는 이상, 밀어붙여도 결론은 같을 것이다. 그럼 괜히 서로 감정 상할 것 없이…….
그 순간, 최연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응?”
최연하가 전화를 받았다.
“네.”
가만히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던 최연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주, 중국이요?”
‘누구지?’
한은솔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어…… 네, 그때쯤엔. 아……. 네. 저야 괜찮죠. 응, 괜찮아요.”
한은솔이 더욱 미간을 좁혔다.
최연하의 얼굴에 떠오른 저 감정은 분명 당혹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광경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자세한 건 나중에. 네.”
최연하가 가만히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다.
그 도도한 자세에 한은솔이 살짝 움찔했다.
“야, 한은솔.”
“네.”
“너, 정말 말 잘해놨지?”
“예? 아…… 예.”
최연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는 믿고 가볼 테니까, 실수 없이 잘해.”
“네? 아니, 왜 갑자기 마음을…….”
“그냥 마음 바꿨어. 왜? 불만 있어?”
한은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얼굴에 살짝 떠오른 홍조는 분명 당혹과 부끄러움이다.
‘자기가 우기고 있다는 걸 아는군.’
그럼 뭘까,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혹시…….”
“뭐. 뭐!”
“강진호 씨가 중국에 가십니까?”
“……어머, 얘 이상하네. 무슨 소리 하고 있지? 거참.”
최연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부채질을 하면서 바깥쪽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 가시는데요?”
“화장실 갈 거야! 왜? 여자 화장실까지 따라오게?”
“조금 전에 다녀오셨잖아요!”
“또 가면 안 돼? 너는 뭐 여자한테 그런 것까지 검사하려고 해!”
“그래서 강진호 씨가 중국에 가냐구요.”
최연하가 대답 없이 재빠른 걸음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은솔이 미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중국 가는 비행기 미리 예약합니다. 우리 애들 것만.”
“그, 그거, 내가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생각할 테니까. 일단 대기해 봐.”
“늦으면 표 없어요.”
“표 있어! 무조건 있으니까 일단 대기하라고!”
“표가 없을 텐데.”
우뚝.
그 순간, 최연하가 걸음을 멈췄다.
“…….”
살짝 흥에 취했다는 걸 깨달은 한은솔이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최연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완전히 몸을 돌린 최연하의 표정을 본 한은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재밌냐?”
“…….”
“재밌지? 아주 재밌어 죽겠지?”
최연하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한은솔을 향해 걸어온다.
“내가 더 재밌게 해줄게. 우리 은솔이, 오늘 아주 재미나겠네.”
사, 살려줘!
정도를 지키지 못한 이의 최후는 늘 그렇듯 비참하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