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1
#130.
무력하다 (5)
“보육원 문제를 매듭지어 놓고 가고 싶어서요.”
“성심 말입니까?”
“예.”
설명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아 말을 덧붙였다.
“원장님이 살아 계시다는 전제로 일을 처리했는데, 이제 원장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소유권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이런저런 문제가 많을 것 같아서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미리 논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침부터 실례를 범하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뇨, 죄송하긴요.”
조규민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겁니다.”
강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강진호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느긋하게 대답을 했다.
“딱히 생각한 건 없습니다.”
“예?”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일 때문에 찾아왔다면서 생각한 바가 없다니.
“제가 잘 모르는 일에 대해서 나설 생각은 없습니다. 전문가가 하는 게 옳겠죠.”
“아…….”
그 말이 옳았다.
사실 실무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빤히 알면서도 지시 사항을 지키느라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일이 많았다.
“카드 가지고 계시죠?”
“예.”
“필요한 금액은 거기서 쓰세요. 맡기겠습니다.”
“저 강진호 씨.”
“예.”
조규민이 조금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CD기에서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인지는 아세요?”
“……그것도 한도가 있습니까?”
“뽑아보신 적이 없군요.”
강진호의 평소 생활을 보면 현금 100만 원도 인출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쓴웃음을 머금은 조규민이 설명을 했다.
“지금까지야 가볍게 지원하는 정도였으니 카드를 긁는 걸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소유권의 문제가 되면 제가 이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계좌 관리를 제가 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리 쉽게 대답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강진호 씨의 통장 안에는 회장님이 입금한 거액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남에게 맡기시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를 믿으십니까?”
강진호는 가만히 조규민을 보다 대답했다.
“믿기도 하지만, 더 믿는 건 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게 무슨?”
강진호가 미묘하게 웃었다.
“저를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제 돈을 사사로운 데 쓰지는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조규민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뒤로 갈수록 흐려졌다.
‘확실히 이상한데…….’
그가 아는 강진호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의 강진호였다면 ‘저는 그쪽을 믿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하는 동시에 돈에 대한 초연함을 보였을 것이다.
이상한 점은 많지만, 따져 물을 일은 아니었다.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예. 그럼.”
“자, 잠시만요.”
“예?”
“OTP와 인증서를 주셔야죠.”
“예?”
“인터넷뱅킹 모르십니까? 인터넷뱅킹?”
조규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원시인을 데리고 은행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부우우웅.
강진호는 차를 몰았다.
은행에 들러 창구에서 인터넷뱅킹을 신청하려 했지만, 고객 조회를 한 창구 직원이 기겁을 하고 지점장을 소환해 VIP실로 끌려 들어가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잘 해결을 할 수 있었다.
“골치 아프군.”
이런 쪽은 영 잼병이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문명의 이기들을 곧잘 썼던 것 같은데, 중원에서 살았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이제는 뭔가 새롭다 싶으면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긴, 내 나이가…….”
따져 보면 황정후와 그리 차이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름 얼리 어답터인 황정후가 들었으면 치를 떨었을 생각을 태연히 하는 강진호였다.
“음…….”
살짝 브레이크를 밟은 강진호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남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조금 타이트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타이트한 건 그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전력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은 이동식이 앞차를 향해 마구 욕을 내뱉었다.
“으아아! 브레이크 밟지 말라고, 이 미친놈아!”
눈앞에 보이는 차는 너무도 생소하다.
저 낮은 차체와 새하얀 바디는 보고 있으면 너무 좋지만, 그 보기 좋은 차가 자신의 앞을 달리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왜 이 시간에 저런 게 돌아다녀!”
차가 도로를 달리는데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애마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국산 중형 세단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보이는 차는 그가 사랑하는 세단을 소나 타는 차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차, 차선을 바꿔야 하는데…….”
좌우로 차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차선 바꾸기도 쉽지 않았다. 앞 차와 거리를 20m 이상 띄워놓았건만, 빵빵거리고 있는 차들 중 단 한 대도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뒤태는 진짜 죽이네.”
남자라면 피가 끓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피만 끓어야 하는데, 애간장도 같이 끓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 선명한 브레이크 등에 불이 살짝만 들어와도 1㎜ 앞이 절벽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실수로, 정말 실수로 저 차와 가볍게 접촉이라도 하는 날에는 남아 있는 인생을 인간이 아닌 노예로 살게 될 것이다.
“무서워서 운전하겠냐고…….”
게다가 타고 있는 놈이 누구인지 운전을 하는 폼이 영 이상하다.
슬쩍슬쩍 이유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지를 않나, 앞쪽이 좁은데도 무턱대고 빠져나가지를 않나.
“……좀 더 띄워야지.”
20m 벌려놓았던 간격을 30m까지 더 뗐지만, 중간으로 파고드는 차는 없었다. 이동식은 눈물을 머금으며 차를 더 천천히 몰았다.
뒤에서 속도 모르는 것들이 자꾸 빵빵대지만, 차라리 욕을 먹고 말지, 절대로 아벤타도르의 뒤에 붙을 생각은 없는 이동식이었다.
‘뭐가 좀 시끄러운데?’
원래 길이 이리 시끄러운가?
아까부터 저 뒤에서 자꾸 빵빵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강진호였다. 바로 뒤차가 빵빵거리면 내가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건데, 저 뒤에서 규칙적으로 빵빵거리고 있으니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도 같고.
“그래도 뭔가 찝찝한데…….”
재경까지 금동이를 타고 오는 건 너무 멀었다. 일전의 강진호였다면 아무리 멀더라도 금동이를 고수했겠지만, 나름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살지는 않기로 다짐한 결과였다.
“실수였어.”
강진호는 차를 몰면서 그리 생각했다.
누릴 수 있는 걸 포기하고 어쩌고가 아니라, 마음 편한 것이 최고인 것을!
답답하게 막혀 있는 도로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금동이를 탔으면 벌써 이미 도착했을 텐데, 이대로 가면 30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았다.
빠르게 가라고 있는 차다.
그리고 이 차는 스포츠카가 아닌가. 그런데 차를 탔기 때문에 자전거를 탔을 때보다 느리다니.
“끄응.”
강진호는 한숨을 쉬며 막힌 도로를 바라보았다.
* * *
“원장 수녀님은?”
박유민이 병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금 주무셔.”
“그래?”
“그래도 너 왔다고 하면 일어나실 텐데.”
“됐어.”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주무시는데 괜히 깨울 것 없어. 얼굴만 보고 가면 된다.”
“으응.”
박유민은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휴가를 나오면서부터 가라앉아 있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돌아왔네.’
“들어간다.”
“응.”
강진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낮은 숨소리와 심전도 소리만이 병실에 낮게 울리고 있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스레 걸어 침대에 다가갔다.
강진호는 의식이 없는 원장 선생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췌한 얼굴과는 다르게 그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전능하지 않다.’
그리고 전능에 가까워진다고 해도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나아가는 거겠죠.”
지금이 완벽하지 않기에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
그 기본적인 것을 강진호는 잊고 있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원장 수녀님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조금은 늦어버린 후회였다.
“앞으로는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나직하게 말을 마친 강진호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강진호는 그 후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원장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박유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드렸어?”
“그래.”
“……복귀 언제야?”
“내일.”
“음, 그래.”
조금 더 기다린다면 임종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강진호는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원장님에게서 들어야 할 말은 이미 모두 들었다.
그가 해야 할 말도 모두 했다.
그렇다면 끝난 것이다. 임종을 지키고 그녀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게 만들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별소릴 다한다.”
박유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얼른 가봐. 휴간데 너도 좀 쉬어야지.”
“그래. 다음에 나와서 보자.”
강진호는 미련을 남기지 않고 돌아섰다. 병원을 빠져나가는 길에 조금은 몸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 * *
“일병, 강진호!”
“복귀했냐?”
“예, 그렇습니다.”
“엄청 일찍 왔네? 뭔 해도 안 떨어졌는데 벌써 들어오냐?”
“그렇게 됐습니다.”
전혁수의 말에 성태호가 웃으며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에이, 그거야 휴가 고픈 애들이나 하는 것 아닙니까. 진호야 휴가를 쌓아놓고 있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하기야 그렇다. 얘 5일 다녀왔으니 아직도 25일 남은 거 아냐? 그것도 포상으로만? 일병 정기 포함하면 장난 아니네.”
“그렇지 말입니다.”
부대에 복귀를 하니 역시나 시간이 잘 흘렀다. 그동안 못한 정비를 하고 부대에 적응하니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갔다.
[강진호, 행정반으로 와라. 강진호.]점호 시간이 끝나고 스피커에서 울리는 소리에 강진호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전화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은 것은 확인일 뿐.
행정반으로 가 전화를 받자 담담한 박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에.”
“응.”
“그래. 그럼.”
“그래, 잘 치르고.”
그것이 전부였다.
박유민도, 강진호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굳이 서로를 위로하겠다고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위로는 충분히 했으니까. 예의 삼아 하는 어설픈 위로가 필요한 사이가 아니니까.
강진호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담배 끝이 타들어 간다.
깊게 들이마신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녀의 신이 그녀를 보살핀다면, 그녀는 지금쯤 천국에 갔을까?
그럼 그 곳에서는 이제 행복할 것인가.
“나는 진호가 다른 사람의 약함마저도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