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11
#1310.
잠입하다 (5)
정보는 힘이자 칼이다.
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이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은 이런 빤한 말이 아니었다.
이종욱이 항상 머릿속에 품고 떠올리는 정보에 관한 격언은 단 하나였다.
‘정보는 독이다.’
그래, 독.
정보를 지칭하는 말 중 그보다 더 정확한 건 없었다.
정보란 힘이 될 수도 있고, 권리가 될 수도 있고,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원에게 있어 정보란 언제 자신을 파멸시킬지 모르는 독과 같다.
가치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보원들은 언제나 정보를 노리는 이들의 표적이며,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명심해야 할 것.
가진 정보를 다 내놓은 정보원은 살아남을 수 없다.
독니가 빠진 독사처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잃은 자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후의 하나.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정보만은 어떻게든 발설하지 않고 함구해야 한다.
그 어떤 모진 고문을 겪더라도, 지독한 자백제가 정신을 짓밟더라도 목숨 줄만은 내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종욱은 오늘 깨닫고 말았다.
선배들이 임무에 실패하고 결코 발설하지 말아야 할 정보를 밝힌 이유를. 스스로 목숨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눈썹을 타고 눈두덩으로 흘러내린 땀이 눈가로 스며들었다. 눈이 따끔했지만, 차마 눈 감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뭔가 정신없이 떠들어 댄 것 같은데, 정작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니. 세 살짜리 아이라도 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종욱은 그 상황을 실제로 겪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실감한 이종욱이 슬쩍 고개를 들어 눈앞을 바라봤다.
“…….”
다리를 꼰 강진호가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절로 침이 넘어갔다.
하지만 바짝 마른입에는 더 이상 삼킬 것이 없기에 되레 목구멍만 찢어질 듯 아팠다.
그때, 눈을 감고 담배를 피우던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떴다.
오싹.
강진호와 눈이 마주친 이종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거리에서 맹수를 마주한 인간은 달아날 생각도 못하고 몸이 굳어버린다고 한다. 마치 자신에게 덤프트럭이 달려오는 걸 보고도 몸을 피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회주님.”
“음.”
이현수가 넌지시 부르자 강진호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 단순한 변화만으로 그는 조금 전에 마주한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흐으…….”
이종욱의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금세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종욱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풀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곳은 여전히 사지다.
“그러니까…….”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를 빼 재를 털었다.
“북한의 호위는 더 엄중해지고, 중국 쪽에서도 지원한다. 그런데 일련의 사태가 어떻게 벌어졌는지에 대해 감이 잡히는 게 전혀 없다?”
이종욱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죄,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렇습니다.”
“흠.”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뭐라고 할까. 무척이나 음…….”
강진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빤하군.”
이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전형적이네요.”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나 했다. 그럴 리가 없지.”
태연한 반응에 이종욱이 멍하게 강진호와 이사들을 바라봤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아니, 분명 방금 강진호의 입으로 상황이 어떤지 모두 들은 것 같은데,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이종욱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직접 간다는 정보는 아직 안 풀린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죠.”
“그렇겠지.”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리 단정 지을 일도 아니지. 겉으로 요란하게 준비를 하는 것보다 뒤로 함정을 파는 쪽이 나을 테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관건은 하나뿐이지.”
위긴스가 가만히 이종욱을 바라보았다.
딱히 압박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숨이 막혀온다.
“이들의 정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이종욱의 얼굴이 굳자, 위긴스가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오해는 마시게. 그쪽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보낸다는 말이 아니라, 정보 수집 능력을 믿을 수가 없…….”
위긴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현수를 돌아봤다.
“한국어는 어렵군.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은데.”
“…거, 필요할 때만 외국인인 척하지 마십시오. 양심도 없습니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니까.”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탓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중국에 대한 정보는 어느 나라라도 쉽게 손에 넣지 못하니까.”
“원탁도?”
강진호가 슬쩍 물었다.
“예, 쉽지 않습니다. 폐쇄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인구가 많고 땅도 넓어서… 거꾸로 인구가 적고 땅이 좁아도 조사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닙니다. 게다가 원탁의 특성상 그쪽에서 활동하는 건 전담 정보원을 양성하지 않는 이상 영 쉽지 않은 일이지요.”
“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러고 보면 원탁이 처음 한국에 손을 뻗을 때도 삽질을 꽤나 했다.
그 인연이 이어져 슈발리에들과 위긴스를 영입할 수 있긴 했지만, 당시를 돌이켜 보면 원탁이 동양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실소가 나올 정도다.
“여하튼 한국의 정보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정보를 수집해도 중국을 감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이종욱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위긴스의 말에 틀린 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노력하는 중이지만, 중국을 완벽하게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심층부에는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종욱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이현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실 수 있겠지만, 저희는 목숨을 걸고 일합니다.”
“…….”
“그쪽도 목숨을 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신뢰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잘 알고 계시겠죠.”
입맛이 쓰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쪽이 얼마나 열심히 정보를 모았는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쪽의 정보를 모두 신뢰할 수는 없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역정보도 있을 것이고, 잘못된 정보도 있겠죠. 그걸 모두 감안해 이 일을 성공시키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애초부터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군.’
꽤 듣기 좋게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애초에 자신이 가져오는 정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정보를 주겠다면…….”
이현수가 스산한 눈으로 이종욱을 노려봤다.
“차라리 완벽하고 확실한 정보만 넘겨주십시오. 무조건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말입니다.”
이종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 일은?”
“물론…….”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를 일별하고는 말을 이었다.
“진행합니다. 변수야 항상 존재하고, 이 정도의 변수가 생기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상정했습니다.”
“…….”
“신뢰라는 건 상대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오히려 그쪽 같군요.”
이종욱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깔끔한 패배다.
총회를 조금 흔들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그가 이현수나 강진호의 손에 놀아났다.
‘아니. 그런 것도 아니겠지.’
저쪽은 이종욱을 뒤흔들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고래가 그저 스쳐 가는 것만으로 피라미는 태풍이라도 만난 듯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종욱이 딱 그 피라미 꼴이다.
하지만 뭐랄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올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곳이다.’
김명찬 총리가 총회에 쩔쩔매는 꼴을 볼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 총리가 가진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더구나 대한민국 내에서라면 더더욱.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이런 자들에게 휘둘린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막상 이들을 만나보니 왜 김명찬이 그리 조심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폭탄을 배안에 품고 있는 기분이군.’
이런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과 함께.
왜 그동안 사고가 터지지 않았는지 되레 의아할 정도다.
다만…….
껄끄러운 점만 살짝 접어두면 지금 당장은 든든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강진호가 직접 나선다면 아무리 북한이나 중국이 막아선다 할지라도 임무를 성공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이종욱 과장님.”
“아, 예.”
이종욱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상대가 주도하는 자리에서 다른 생각에 빠지다니. 국정원에 몸을 담은 이후로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실수를 연이어 하는 날이었다.
“하실 말씀은 다 하셨습니까?”
“대충은.”
“그럼 이제 저와 정말 나눠야만 하는 이야기를 나누셔야죠.”
“…예?”
그런 게 남아 있었나?
아니, 할 말은 다했다니까 이게 무슨…….
“정보를 받는 방법이라든가, 협조를 구하는 방식이라든가 그런 문제는 부차적인 겁니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현대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는 법이죠.”
“그게 뭡니까?”
“이런저런 것들은 협의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신 김에 마무리하고 가시죠.”
이현수가 더없이 사람 좋은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를 목격한 이종욱은 슬슬 불안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카드 하나 주시죠.”
“예?”
“이왕이면 세탁된 카드로.”
“…….”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작 말씀드리려 했는데, 체류비와 활동비가 입금이 안 돼서 말입니다. 이만한 인원이 중국에 머무르려면 한두 푼 드는 게 아닌 건 알고 계시겠죠?”
이종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니들, 부자잖아. 그런데 활동비를 또 받아 처먹겠다고? 이거 세금이야, 이 새끼들아!’
하지만 이종욱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자자, 그건 여기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으니 저와 따로 말씀 나누시죠. 회주님, 제가 이 과장님 잠시 모셔가겠습니다.”
“…그래.”
“자, 여기로. 어서요.”
이현수가 이종욱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이종욱은 힘없이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탁.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진훈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새끼는 무인도에 던져 놔도 살아남을 놈이야.”
“야생동물 등쳐 먹고 살겠지.”
이종욱에게 격렬한 반감을 표하던 방진훈마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그가 끌려 나간 문을 바라봤다.
이종욱도 다른 곳에서야 나름 맹수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먹잇감에 불과한 토끼나 마찬가지다. 하이에나에게 물려간 토끼에게 남은 미래는 하나밖에 없었다.
“뼈라도 남아야 할 텐데.”
안타까운 탄식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