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22
#1321.
대기하다 (1)
“와인 좀 드릴까요?”
“……아까 마셨는데?”
“후후, 하지만 리무진에서 와인을 마시는 경험은 꽤나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술을 마신다기보다는 상황을 경험하는 거죠. 더구나 이사님처럼 고급 진 이미지를 가진 배우에게는 이런 상황을 연기해야 할 날이 반드시 오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위해 이런 경험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는 이현수를 보며 최연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한 잔 줘봐요.”
“예!”
이현수가 냉장고에서 스파클링 와인과 잔을 꺼내 채웠다. 그러고는 최연하에게 잔을 넘겼다.
“고마워요.”
“회주님도 한 잔?”
“…….”
강진호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은 안 열어도 이 정도 창 크기면 사람 하나는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될 수 있으면 도로가 넓었으면 좋겠다.
8차선이라든가…….
영원히 못 돌아오게.
“이 실장.”
“예, 회주님.”
“우리, 여기 놀러 온 것 아닐 텐데?”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 내도 되는 건가?”
이현수가 씨익 웃었다.
“이건 기분을 내는 게 아닙니다. 역할을 지키는 거죠.”
“응?”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의 주머니 쪽을 바라보았다.
“김철수 씨는 실존 인물입니다.”
“응?”
“없는 이름으로 여권 하나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죠. 하지만 더 좋은 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 여권에 사진만 바꿔 넣는 거죠.”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김철수 씨는 그런 사람이죠. 굉장히 돈이 많고 철도 없는데, 얼굴은 외부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예,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죠. 대기업 회장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말입니다.”
강진호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르고 고른 사람이랍니다. 모 기업 회장님…… 아니, 정확하게 모 기업 회장님의 자제분의 사생아인데, 나이가 딱 스물다섯쯤 됩니다. 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갔다가 최근에 한국으로 들어온 사람이라 얼굴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 회장님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럼…….”
강진호에게 순수한 의문이 생겨났다.
“이영희도?”
“……아뇨. 그건 그 새끼가…….”
이현수가 살짝 이를 갈았다.
“크흠, 여하튼 그러니 역할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모 기업의 후계자분이 성질을 감당 못해서 해외로 보내 버린 천둥벌거숭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얌전히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간다? 에이, 그건 아니죠.”
강진호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뭔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일리라는 게 사람을 미묘하게 거슬리게 만든다. 이 기분을 어디선가 느껴봤는데…….
‘정치인이군.’
명분은 확실하지만 속내는 다른,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강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수를 쏘아봤다. 하지만 강진호에게 충분히 단련이 된 이현수는 겨우 그 정도의 눈빛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현수와 청마를 비교하는 일이 잦았지만, 이제는 비교가 무의미해지는 느낌이다. 청마가 현대로 와 이현수가 하는 걸 봤다면, 대가리를 깨버리겠다고 쇠로 된 부채를 휘둘렀을 게 분명하다.
청마가 아무리 마교의 브레인이라고는 해도 그 역시 훌륭한 마인이었으니까.
참 재미있는 건 이현수가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서도 밉기는커녕 웃기게만 느끼는 강진호 자신이었다.
아마도 과거의 청마와는 다른 미묘한 유대감 때문이겠지.
강진호가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하자 이현수가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해방이라는 게 필요합니다. 사실 회주님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이긴 하지만, 부자 티를 내고 살아본 적은 없잖습니까? 한 번씩은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저기요.
저 억억대는 스포츠카 타고 다니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사님?”
“흐음.”
최연하가 미묘한 표정으로 동조를 거부하자, 이현수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게 다 경기 부양과 민생을 위한 일이죠. 돈 있는 사람이 돈을 펑펑 써줘야 돈이 돌고 경기가 살아나는 겁니다. 회주님은 돈을 쓰실 의무가 있습니다.”
“중국에다?”
“…….”
“그것도 세금으로?”
“…….”
강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임무의 일환이라고 하니 더는 말 안 한다.”
“감사합니다.”
“대신…….”
강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카드 긁은 거 다 취소시키고, 내 카드로 다시 긁어.”
“헐, 회주님, 이건 공식적인…….”
“해.”
“넵.”
이현수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우리가 해주는 게 얼만데 이 정도는 경비 청구해도 되지.’
사실 이 정도 돈이야 강진호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봐야 티나 나겠는가.
하지만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시키는 일 하는데 내 돈까지 낼 수는 없잖아!’
이모저모로 불만이지만, 강진호의 얼굴이 워낙에 단호하다.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현수의 입장에서는 강진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공금을 낭비하는 일이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총회는 실정법을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걸 고려하면 이 정도야 별일도 아닐 텐데…….
“그냥 이제부터 아껴 쓰는 걸로 하시면…….”
“그냥 찝찝해서 그래.”
“끙.”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찝찝하다는데 별수 있겠는가.
“회주님, 그래도 이거…….”
“잠깐만요.”
그때, 최연하가 살짝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 돈을 쓰느냐로 문제가 생겼다는 거죠?”
“정확하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비슷합니다.”
“그럼 뭐 어려울 것 없네요.”
“네?”
최연하가 가방에 손을 넣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뽑아 이현수에게 내밀었다.
“이건……?”
“예약 취소하고 7성급으로 다시 예약해요.”
“…….”
최연하의 말에 이현수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그…….”
“그리고 그 리무진 대여비는 그냥 그쪽이 내라고 해요. 숙박비 이쪽에서 낸다고 하면 그쪽도 불만은 없겠지.”
물론이다.
리무진 대여비가 아무리 비싸다고는 해도 특급 호텔 숙박비에 비길 수야 있겠는가. 국정원 쪽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 그런데 특급 호텔 숙박비가 만만찮을 텐데…….”
“만만찮아?”
아…….
이 사람도 부자지.
이현수가 살짝 슬픈 눈으로 리무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의 주변에는 부자들이 넘쳐 날까. 그도 어디 가면 나름 대접받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영…….
“돈 가지고 싸우지 마. 누나가 사 줄 테니까.”
“…….”
“…….”
최연하가 어깨를 쭉 폈다.
그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강진호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 말에 이현수와 강진호가 동시에 최연하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한 이야기 오가는 것 같은데, 혹시 나라에서 뭐 시켰어요?”
“…….”
이현수가 미묘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말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강진호가 헛기침을 했다.
“비슷합니다.”
“흐응, 나라에서 시킨 일이라…….”
최연하가 혀를 찼다.
“보나마나 나쁜 짓이겠네.”
“크흠.”
“에에에취!”
이현수가 크게 기침을 하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 아니, 왜 그런 생각을?”
“영화 보면 그러던데, 보통 나라에서 무슨 임무를 주고 해외로 보내는 건 나쁜 짓 시키는 거잖아요.”
“…….”
“007도 따지고 보면 남의 나라에서 깽판 치는 살인자지, 뭐.”
아니, 그거 틀린 말은 아닌데…….
세상을 이렇게 시니컬하게 바라봐도 괜찮을까?
“아니, 저희는 그런 게 아니고…….”
“그럼 좋은 일 하러 온 거예요?”
이현수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좋은 일?
이걸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
이거 미묘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좋은 일일 수는 없다. 아무리 이현수가 끝까지 가버린 인간이라고 해도 그만한 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들의 사익이나 정권의 이득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국가의 안정과 이득을 위해서 어느만큼의 부도덕이 용인되는가.
거대한 집단의 이득을 위해서 악한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고민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다. 그만한 문제의 결론을 이현수가 무슨 수로 내리겠는가.
“나쁜 일 하러 온 것 맞습니다.”
동의한다는 말에 최연하가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막 스파이 그런 거?”
“조금 다르지만.”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나쁜 일이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겠네요.”
“흐응.”
최연하의 눈이 반짝였다.
“강진호 씨가 생각하는 나쁜 일의 기준이 있어요?”
“네.”
“오, 그게 기준이 있을 수가 있네? 기준이 뭔데요?”
“말하기가 좀 애매한데…….”
“그럼 없는 거네.”
“있습니다.”
강진호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한테 말씀 못 드리는 일이면 나쁜 겁니다.”
“…….”
“…….”
이현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와, 이거…… 기준 미쳤다.’
어떻게 저리 확고하고도 남부끄러운 기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말이야 맞지. 엄마한테 말 못하면 나쁜 짓이지. 세상이 순식간에 한 세 배쯤은 명확해진 느낌이다.
“마마보이 같아.”
“…….”
아, 그거도 명확해졌지.
강진호가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여하튼 그리 떳떳한 일을 하러 온 건 아닙니다. 그래서 최연하 씨도 신경을 좀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신경이요?”
“중간중간 임무 때문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시점이 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대해주세요.”
“아…… 네, 뭐, 걱정 마세요. 제가 직업이 직업인데, 설마 눈치 없이 연기 못하는 일이야 있겠어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최연하를 보며 이현수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빠진 게 뭔지를 알아챈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회주님이 나쁜 일을 하러 오셨다고 직접 말하셨는데, 괜찮으신가 해서…….”
“아, 그거?”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뭐, 새삼스러울 거나 있나요? 강진호 씨 좋은 사람 아니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는데?”
“……네?”
“심심하면 사람 패고, 누가 봐도 불법적인 일 벌이고, 갑자기 강남에 빌딩을 세우질 않나, 정치권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
“마피아지, 마피아. 보나마나 인천 앞바다에 시멘트 통도 여러 번 굴렸겠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이현수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됐어. 이제 와 뭘 어쩌겠어. 이미 버린 몸. 할아버지랑 연애도 하는데, 그 할아버지가 나쁜 놈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어요.”
최연하가 말 한마디를 보탤 때마다 강진호의 몸이 점점 시트로 파묻혔다.
‘대미지가 제대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천하의 강진호도 육체적인 공격은 막아도 정신적인 공격은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뭐 그게 상관있나?”
최연하가 씨익 웃으면서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나한테만 잘하면 되지. 그죠?”
“하하…….”
“그죠?”
“……네.”
최연하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강진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잘 만났네, 잘 만났어.’
대단한 커플 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