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23
#1322.
대기하다 (2)
“말씀하신 부분은 컨택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시간은 아직 있으니 급하지 않게 처리해 주세요. 속도보다는 엄밀함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요.”
“예, 사장님.”
황민수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인재야.’
처음에는 나이도 어린 사람이 MK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이현주와 몇 주 같이 일을 해보니 그런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어린 사람이 높은 직책을 맡는 게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단순히 꼰대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사업적 지식이라는 것은 도서관에서 배울 수 없다. 아무리 젊은이들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현장에서 직접 사회를 겪은 이들과는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황민수가 본 이현주라는 사람은 자신이 과한 자리를 맡을 능력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던 모습도 저런 거겠지.’
황민수도 황정후의 아들이기에 나이가 차기 전부터 고위직을 맡았다. 하지만 그건 황민수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황정후는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를 억지로 맡고 있는 것처럼 후안무치한 일이 없다며 황민수를 끝도 없이 다그쳤다.
과한 자리도 소화할 수 있다면 능력에 맞는 배치가 되지만, 소화할 수 없다면 낙하산이 되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황민수는 낙하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나쁘지 않게 평가했지만, 황민수 자신은 안다. 자신이 능력에 비해 과한 자리를 맡았다는 걸 말이다.
뭐가 다른 걸까?
“그리고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이번 일에 대한 기획서를 작성해 봤습니다. 물론 사장님께서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아시는 분야겠지만, 어린 치기라고 생각하시고…….”
“기획서요?”
“예.”
“좋네요. 업로드해 주세요.”
“예, 사장님.”
황민수는 이현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른 거구나.’
이현주의 눈빛은 과거 그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이현주 스스로가 일에 열정이 있고,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을 즐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민수는 저렇지 못했다.
언제나 부담감에 눌려 있고,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의 이현주처럼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일에 의견을 내고 기획서를 작성한다는 건 과거의 황민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뿐 아니라 앞으로도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 제안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지.
황민수는 훌륭한 경영자가 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황정후와 같은 리더십이 없고, 자신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는 자신감도 없었다.
하지만 황민수에게는 황정후가 가지지 못한 경험이 있다.
‘세상에는 천재만 있는 게 아냐.’
평범한 이들도, 조금은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도 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능력 있는 이들이 알아서 능력을 발휘하는 회사는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황민수가 만들고 싶은 사내 문화는 그런 게 아니다.
“그 외에 다른 보고 사항은?”
“없습니다.”
“음…….”
황민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는 강유환 씨와 현장 시찰을 나가봐야 할 것 같으니,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예, 사장님.”
“그래요. 나가보세요.”
말이 끝났지만 이현주는 자리를 지킨 채 가만히 황민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민수가 모니터에서 고개를 떼고 이현주를 바라봤다.
“다른 할 말이라도?”
“사장님.”
“네.”
“사장님께서 오셔서 직원들은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황민수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었다.
“갑자기 뭔 그런 이야기를…….”
“사장님뿐 아니라, 새로 오신 부장님들에 대해서도 만족도가 높습니다. 사실 저희 회사는 업무를 배울 수 있는 고위직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요.”
“아…… 그래요.”
그건 맞는 말이다.
이 회사는 중간이 없다.
강진호와 이현수, 그리고 이현주가 고위직을 구성하고, 그 외의 이들은 그냥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문제는 그 이현주와 강진호들도 현장 실무에는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저 역시 사장님께는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크흠.”
황민수가 어색한 손길로 입가를 문질렀다.
이런 평가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만…….”
황민수가 움찔했다.
저 다만이라는 말만큼 무서운 게 없다. 보통은 ‘다만’ 다음에 나오는 말이 진심이니까.
“아무래도 새로 오신 분들이 낯선 것도 사실입니다. 직원들이 좀 더 편하게 가서 보고를 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은 회식부터 한 번 해서 서로 조금 더 친해지는 게 어떨까요?”
“회, 회식?”
“예.”
황민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보통 직원들은 회식을 싫어하지 않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싫은 건 회식이 아니라 회식을 함께하는 사람이겠죠.”
“…….”
황민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그게 필요하다면 해야겠죠. 그럼 이 실장이 일정 한 번 잡아주세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사장님이 직접 이야기를 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 미안해요. 그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맡기면 안 되는데.”
“아니요. 절대 그런 말이 아닙니다.”
“네?”
이현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실은 직원들이 저와 대화하는 걸 좀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제가 회식을 할 테니 참가하라고 하면 그리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
뭘 얼마나 갈궜기에?
황민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젊은 커리어 우먼 같은 이현주지만, 아랫사람들이 보는 이현주는 그가 보는 이현주와는 다른 모양이다.
그 사실을 이현주도 알고 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말해보죠.”
“예. 인원이 많으니 일단은 팀장급들만 먼저 회식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황민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살다 보니 먼저 회식하자는 말도 듣는다. 이래서 사람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봐야 하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예.”
“회장님은 지금?”
“출장 중이십니다.”
“우리 회사와 관련이 없는 일입니까?”
이현주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관련이 없다고 하기는 애매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회사와 연관이 있는 일은 아닌 걸로 압니다.”
“음, 그래요.”
강진호가 MK 말고도 다른 일들을 맡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황민수가 기이하게 생각하는 건 지금 MK 역시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를 겪고 있는데, 강진호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황민수가 실무를 맡고 있다고는 하나 회장이 자리에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게 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강진호가 그 정도의 생각도 못할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말인즉슨…….
‘그럼 회장님이 맡고 있는 일 중에서 MK가 그리 큰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MK는 큰 회사다. 물론 무척이나 기형적이고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회사가 가진 자금력과 영향력은 무시무시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 회사 이상으로 신경 써야 할 곳이 있다?
그럼 대체 강진호라는 사람이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크다는 소리인가.
‘아버지보다 더하다고?’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디 MK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회사던가.
머리가 복잡해진 황민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람과 손을 잡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어디 계시죠?”
“한국에는 안 계십니다. 하지만 연락은 가능하니 상의하실 일이 있으면 전화를…….”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어디 계신지 궁금해서 말이죠.”
황민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아니지.’
지금 강진호에게 보고하는 건 그가 사양해야 할 일이다. 아직은 구체적인 윤곽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강유환과의 일처리가 조금 더 마무리되어야 강진호에게 보고할 수 있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이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주가 먼저 센스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아, 고마워요, 이 실장.”
“예, 사장님.”
이현주가 미소를 짓고 뒤로 걸어가 문을 연다. 그러자 부장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럼.”
이현주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구정범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젊은 사람이라 참 활기가 넘치는군요. 아들놈이 나이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어떻게…….”
“이현수 실장 여자 친구란다. 야산에 묻히고 싶지 않으면 말조심해라.”
“……과외 선생으로라도 모시고 싶네요.”
구정범이 부드럽게 말을 바꿨다.
이현수는 그도 몇 번 마주친 적 있지만, 웬만해서는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조직 개편한 것하고, 일정 등을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회의 시간 기다리지 말고 보고할 것 있으면 바로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내가 확인을 못했네.”
황민수가 PC에서 구정범이 올린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원을 더 뽑아야 한다고?”
“예. 있는 인력을 가용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러면 너무 많이 끌고 옵니다. 다른 일도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신입을…….”
“그냥 끌어다 써.”
“예? 그럼 업무가 획획 바뀌어서 불만이 치솟을 텐데요?”
“그럴 사람들로 보이든?”
“…….”
구정범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지.’
이곳의 직원들은 무척 특이하다. 기본적으로 회사의 직원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에는 손을 대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든다.
진취적이다?
아니,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굶주렸다고 할까.
“일을 시키다가 다른 부서로 간다고 해도 불만이 있을 사람들이 아냐. 그러니 그냥 있는 인력부터 끌어다 써.”
“알겠습니다.”
구정범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순리대로 따진다면 구정범의 보고서가 맞다. 하지만 모든 일은 그 회사와 상황의 특성을 감안하여 진행해야 한다.
“그건 그렇고, 가맹점주들 확보하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건 사장님이 알아서 하신다고 했잖습니까.”
황민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게 말인데…….”
“예?”
“뭐, 잘되겠지.”
“무슨 태평한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이거, 사운이 걸린 일인데!”
“내 말이 그거라니까!”
“…….”
“사운이 걸린 일인데, 왜 처리를 다 안 하고 해외로 가냐고!”
“…….”
머리를 벅벅 긁어 대는 황민수를 보며 구정범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회사,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