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30
#1329.
폭발하다 (4)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하지만 한은솔과 최연하는 쉽게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거, 기싸움이네.’
먼저 이야기를 하는 쪽이 자신의 급함을 토로하는 느낌이 되어버렸다. 이리되면 먼저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는 없다.
최연하와 한은솔이 시선을 교환했다.
“저번 드라마는 참 좋았어. 나도 참 재미있게 봤지. 우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저희도 아쉽게 생각해요.”
“그랬으면 최연하 씨도 좀 더 뜰 수 있었을 테고. 그렇지?”
“지금이라도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면 괜찮은 것 아닐까요?”
최연하가 배시시 웃자 우차오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렇지, 그렇지. 그 말이 맞지.”
그의 얼굴은 이미 불콰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말이야…….”
처음에는 자오쉬가 대부분 말을 했지만, 술이 몇 순배 돌자 자오쉬는 말이 없어지고, 우차오가 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 쉽지가 않다는 말이지.”
우차오가 고개를 돌려 최연하를 바라봤다.
“왠지 아는가?”
“글쎄요, 저는 잘……. 제가 부사장님의 맘에 들지 않았나 보죠.”
“하하하하, 그럴 리는 없지. 이렇게 아름다운걸.”
통역을 전해 듣는 최연하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린다.
‘아오, 진짜 성질 같아서는.’
힐로 얼굴을 걷어차 버리고 싶다.
다른 이에게 들었다면 그냥 넘길 수 있는 말이지만, 이 아저씨에게 들으니 뒷골이 당긴다. 아까부터 자꾸 음흉하게 그녀의 가슴과 다리 쪽을 힐끗거리는 걸 애써 참고 있어서다.
“왜냐면 이건 내 손을 떠난 문제기 때문이야.”
한은솔이 슬쩍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해 그러는데…… 조금 자세한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지. 이미 알 것 아닌가. 당에서 한국 배우들을 쓰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단 말이지.”
우차오가 술잔을 들어 술을 호쾌하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잔을 테이블에 올리고 최연하를 빤히 바라봤다.
“어디, 미녀가 따라주는 술 한 잔 받을 수 있을까?”
“네. 어렵지 않죠.”
최연하가 술병을 움켜잡고는 우차오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한은솔을 최연하가 잡은 술병이 16비트로 떨리는 걸 보며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참겠지?’
아니, 못 참으려나?
이쪽이든 저쪽이든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면 한은솔이 먼저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 같으니까.
“하하하, 이런 맛좋은 술은 오랜만이군.”
우차오가 술잔을 들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이런 맛있는 술을 몇 번이고 먹어보고 싶지만, 상황이 녹록치가 않아. 당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럼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네요.”
“그렇지, 그래. 그런데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어떤?”
“하늘은 사람의 길을 끊지 않는다.”
조용히 통역만 하던 통역사가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죠.”
‘그거 중국 속담이었나?’
최연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차오가 살짝 과장되게 손짓했다.
“다행히 당의 한 분이 최연하 씨를 눈여겨보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마음만 돌릴 수 있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거야. 워낙에 힘이 있는 분이라.”
최연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니까…….
원래는 한한령 때문에 출연이 불가능한데, 그걸 무효화시켜 줄 수 있는 권력자나, 아니면 한한령 자체를 심의하는 쪽과 연줄이 있다. 그러니 그 사람과 이야기를 잘해보면 가능하다. 대충 이런 뜻인 모양이다.
“부사장님이 아시는 분인가요?”
“물론이지. 그러니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었으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일은 없지.”
우차오가 다시 술을 쭉 들이켰다.
입만 대도 바르르 떨리는 독주를 물처럼 마셔 대고 있다. 문제는 술이 센 게 아니라 그냥 술 먹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우차오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고 눈이 살짝 풀려 버렸다.
“그러니 그분만 잘 설득하면 돼. 그럼 우리는 시청률을 잡을 수 있고, 최연하 씨는 돈을 벌고. 모두가 좋은 일이지.”
우차오가 최연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야기만 잘된다면 받을 돈도 확연히 늘어날 거야. 이건 내가 장담하지. 물론 눈에 보이는 대로 돈을 그리 올려주지는 못하겠지만…… 뒤로 줄 수 있어, 뒤로.”
“…….”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오자 최연하가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우차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가더니, 잡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잘만 풀린다면 말이야.”
‘이 새끼, 짜증 나게 하네.’
최연하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건지, 아니면 대놓고 성희롱을 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결례인 건 분명하지만, 어느 선에서 대응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럼 부사장님께서 그분을 설득해 보신다는 건가요?”
“아니지.”
우차오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으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겠나. 이미 가서 설득했지. 그분을 설득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최연하 씨지.”
“……예?”
“좋은 기회야, 아주 좋은 기회. 이만한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이 기회만 잘 잡을 수 있다면, 최연하 씨는 중국에서 아주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게 되는 거지. 지금까지 생각해 온 그런 시시한 길이 아니야. 정말 화려한 삶을 손에 넣게 될 거야. 그게 대국의 힘이지.”
한은솔은 우차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최연하는 우차오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한 듯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그럼 이야기 끝났네요.”
“만나볼 텐가?”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최연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우차오가 손을 뻗어 최연하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아아, 잠깐만, 잠깐만.”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경고했어요.”
“그렇게 화를 내지 말고 들어보란 말이야.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니까.”
최연하가 우차오를 노려봤다. 하지만 우차오는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어디, 말씀해 보세요.”
“최연하 씨, 최연하 씨는 운이 좋았어. 원래 최연하 씨가 찍은 드라마는 그렇게 뜰 게 아니었단 말이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최연하 씨는 그런 드라마에 출현할 수가 없어.”
“…….”
“그런 드라마에 출현할 수 있는 건 인정받은 배우뿐이란 말이야.”
“당신에게요?”
“아니, 더 높은 곳. 그걸 정하는 분들이 인정을 해야 대배우가 될 수 있지. 최연하 씨는 그냥 한 번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그 운은 두 번 오지 않아.”
최연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보통은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 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아. 그래서 좌절하고 다시 길을 찾다 보면 이번 같은 조건은 못 받는 거야. 대배우와 대배우가 아닌 이들의 차이는 하나뿐이지. 기회가 왔을 때 잡는가, 그게 아니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가.”
우차오가 씨익 웃었다.
그는 이런 일을 꽤나 자주 해보았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눈 여배우 중 반쯤은 최연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끝까지 그런 태도를 유지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은 현실이란 이름 앞에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이건 내 제안이 아니야. 그분의 제안도 아니지. 이건 당의 제안이야. 굉장한 일이지. 당이 외국인인 당신을 한 가족으로 받아준다는 뜻이니까.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란 말이지. 이것만 받아들이면 최연하 씨는 물론이고, 최연하 씨의 소속사 배우들도 중국인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그럼 부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지.”
“전 이미 부자인데요?”
“천만에. 조막만 한 한국 땅에서 말하는 부자와 대국에서 말하는 부자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 당신들의 땅에서 말하는 부자는 여기에 오면 부자 취급도 못 받아. 진짜 부가 뭔지, 진짜 부자가 뭔지 모른다는 소리지.”
입을 닫고 있던 자오쉬가 슬그머니 거들고 나섰다.
“중국의 스타는 굳이 타국으로 진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국에서만 버는 돈이 전 세계를 돌며 버는 돈보다 더 많으니까요. 중국인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걸 아셔야지.”
“…….”
“눈 딱 감으면 돼. 이건 어찌 보면 은총이지. 이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 기회가 중국인도 아니고 가오리…… 아니, 한국인인 당신에게 주어진 거라고.”
최연하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미소를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우차오가 슬그머니 손을 뒤로 뻗는다.
우차오의 손이 최연하의 허리를 감싸 쥔다.
“그리 나쁜 제안도 아니란 말이지. 이 나이까지 연애를 못해보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러니 중국에 있을 동안은 적당히 잠자리만 해주면 되는 거야. 물론 나도 중간에서 연결을 해주니 수고비는 받아야겠지. 그렇지 않나?”
우차오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그의 손이 엉덩이 어림을 더듬는데도 최연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지금 오가는 대화가 뭔지 알아챈 한은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앉아.”
“누나!”
“앉으라니까.”
“…….”
한은솔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우차오를 노려보다가 최연하에 눈빛에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저런저런. 쯧쯧,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더니.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분위기를 망치는구만.”
“어려서 그래요. 이해하세요.”
“흐음, 이해하라고?”
“네. 그보다…….”
최연하가 술잔을 내밀었다.
“주세요.”
“응?”
“술 주세요. 친구가 되려면 술을 같이 마셔야 한다면서요?”
“아, 그렇지, 그렇지.”
우차오가 웃으며 최연하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최연하는 잔에 찬 술을 단숨에 원샷해 버렸다.
“하하하! 여장부야. 진짜 여장부야.”
“크…….”
손으로 입가를 닦은 최연하가 술병을 잡았다.
“자자, 한 잔 따라봐. 이제 우리는 한 식구가 되는 거지. 다 같이 성공하는 거야.”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연하가 술을 내려놓고는 옆에 있는 맥주병을 잡았다.
“맥주는 별론데?”
“아마 이제 좋아지실 거예요.”
“응?”
최연하가 빙그레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매하게 우차오의 손이 최연하의 몸에서 떨어진다. 그 순간,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감질나게 한 잔씩 드시지 마시고, 그냥 한 번에 드시죠.”
“뭐?”
그 순간, 최연하가 손에 든 맥주병으로 그대로 우차오의 머리를 내려쳤다.
퍼억!
순간적으로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우차오가 머리를 잡고 옆으로 넘어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부, 부사장님!”
자오쉬가 기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린 룸 안에서 유일하게 태연한 얼굴을 한 최연하가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진 우차오를 향해 소리쳤다.
“이 개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대가리 깨버릴라!”
그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건물을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