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7
#136.
징치하다 (1)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내렸다.
강진호를 태운 세단은 빗속을 뚫고 도로를 가로질렀다.
“……지금 입원해 있는 분이 저번에 백일휴가 같이 나오셨던 그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쩌다가…….”
강진호가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조규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이 뭔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강진호가 말을 해 줄 것이다.
강진호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그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관여는 할 수 있을까?’
황정후라는 권력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은 쉽게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군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군 장성들의 입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군대 내에서 생기는 사고에 관련된 문제는 군 장성의 손을 떠나 버린다.
언론이 때리기 시작하는 순간, 군대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는 이들이 한낱 노인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인들은 언론을 타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황정후가 입김을 불어넣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실적에 치명타가 될 군 사고를 자신들의 손으로 밝히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꼬였어.’
조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진호가 요구한다면 노력을 해보기는 하겠지만,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요소들로는 풀 수가 없는 문제였다.
“회장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말도 안 했는데 잘 알고 계시는군요.”
강진호의 목소리가 어쩐지 싸늘하게 들렸다.
“죄송합니다.”
“탓하는 건 아닙니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혹행위가 있었던 겁니까?”
“…….”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친구가 아닌 것 같았는데…….’
그가 보았던 주영기의 인상이라면 그런 가혹행위를 묵묵히 참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속은 모르는 것이니까. 의외로 심약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장님께 부탁하시면 정치권을 압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 하나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조사가 다시 시작될 것이고, 친구분의 억울함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강진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강진호가 말이 없으니 조규민도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그렇게 묵묵히 성남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옷이요?”
“대충 손은 써두었지만 그래도 군복을 입고 면회를 가면 기록이 남으니까요.”
“……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조규민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으니까.
‘아니, 대부분이겠지.’
강진호는 옷을 갈아입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몇이나 있단 말인가.
강진호는 말없이 옷을 갈아입고는 병원 안으로 향했다.
데스크에서 주영기의 병실을 확인한 강진호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조규민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주영기의 병실에 도착한 강진호가 문을 열지 않고 앞에 서서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조규민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1분이 넘는 시간을 가만히 문만을 바라보고 있던 강진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삑. 삑. 삑.
강진호의 걸음이 멈춰 섰다.
익숙한 광경이다.
얼마 전에 지독하게 봐온 광경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나마 산소호흡기는 하지 않고 있던 원장 수녀님에 비해 주영기는 산소호흡기까지 매달고 의식이 없다는 정도랄까?
강진호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뱃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든다.
또 겪어야 하는 건가.
우드득.
강진호의 꽉 쥐어진 주먹이 뼈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주영기는 처음 보았던 얼굴만으로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강진호는 가만히 주영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병신 새끼.”
힘들었으면 말을 했으면 된다.
바로 옆에 동기가 있는데 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애만 끓이다가 이런 병신 같은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안타까움 이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저 손 한 번만 뻗었으면 되는데! 그저!
그랬으면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했을 텐데. 자신이 몇 번이나 부대를 뒤집어놓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왜 기대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왜!
강진호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손을 뻗는 사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도.
“일단은 의식을 되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알 수 없다구요?”
“응급처치는 적절했지만, 아무래도 심정지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다 보니…….”
“식물인간이 된 건가요?”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그게 언제일지, 확실히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소견입니다.”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속이 갑갑하다.
너무 속이 갑갑해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근차근 하자.’
강진호가 이를 악물었다.
주영기의 사태를 접했을 때, 좀 더 침착하게, 그리고 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면 지금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중한 것과 더딘 것은 전혀 다르다.
“일단은 영기가 우선입니다. 수도병원은 믿을 만합니까?”
“……일반 병원에 비해 딱히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처치는 가능하지만, 주영기 상병 같은 경우는 수도병원에 맡기기에는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호자와 연락을 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도병원에서도 상태가 심각한 환자의 경우는 타 병원으로 전원을 시키는 경우가 많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알아보고 재경으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할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진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보호자는 연락이 됐습니까?”
“아뇨. 아직.”
조규민이 머리를 긁었다.
그의 일은 강진호를 지원 및 감시하는 것이지, 강진호의 주변인들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진호의 부대에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조사를 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규민이 주영기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환자가 상태가 심각한데, 보호자가 옆에 없는 게 좀 이상합니다. 조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그 부분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강진호는 묵직한 돌덩어리가 가슴에 얹혀 있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짓눌렀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군.’
조규민이 없었다면 이 상황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돈은 충분합니까?”
“……강진호 씨의 재산은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그럼 아끼지 말고 써주세요. 어떻게든 살려주세요.”
“노력해 보겠습니다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걸로 됐습니다.”
우산으로 내리꽂히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귀를 울리고 또 울리는 빗소리에 강진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강진호는 생활관 안으로 들어갔다.
“부대는?”
“분위기 씹창이지 말입니다. 숨소리도 잘 안 납니다.”
“그렇겠지.”
장재환은 지친 얼굴이었다. 하기야 최초 발견자라 가장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으니 지칠 만도 했다.
“강진호 상병님.”
“응?”
“……죄송합니다.”
“뭐가?”
장재환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제가 좀 더 침착해서 바로 구했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자책하지 마라.”
“그래도…….”
“그때 화내서 미안했다. 나도 이성을 잃어서 그래. 그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네 잘못 아니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예.”
반성하고 자책해야 할 사람은 장재환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주영기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떨고 있는 것은 장재환이었다.
그럼 그들은 뭘 하고 있을까?
강진호는 생활관을 나서서 1생활관을 향해 갔다.
채 다 다가가기도 전에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담담히 떠드는 말투.
강진호는 복도에 서서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딱히 이상하지는 않았다.
주영기에 대한 욕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강진호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함께 생활하던 사람이 하나 사라졌다. 지금 생사를 헤매고 있다.
그런데 사람을 그 꼴로 만들어놓은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로 돌아가 있다는 것이 강진호의 가슴에 불씨를 놓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렇다. 아무렇지 않게.
그렇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아야겠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진호는 가만히 복도에 서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점호가 끝나고 강진호는 눈을 감고 침상에 누웠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모든 이들이 잠에 빠지고 나서야 가만히 눈을 떴다.
강진호는 소리가 나지 않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불침번의 눈에도 띄지 않게 몸을 빼낸 강진호가 생활관 밖으로 나왔다.
“버렸다가 걸릴까 봐 숨겨놨지 말입니다.”
김학철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주영기가 남긴 것이 있다는 뜻이리라. 아마도 유서 같은 것일 확률이 높았다.
버렸다가 걸릴까 봐 숨겨놨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 곳에 두었을 확률이 높다. 이미 생활관은 한차례 검열이 오갔고, 심약한 김학철의 성정을 감안할 때 그만큼이나 중요한 물건을 생활관에 두었을 리도 없었다.
그럼 어디일까?
강진호에게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숨겨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타 분대원의 동선이 제한되는 동시에 그가 가장 잘 아는 곳.
강진호는 하나포의 포상으로 향했다.
인간이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결코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못하는 법이다.
산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혹여나 누가 발견할까 봐 산속에 두지 못한다. 그렇다면 김학철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안전한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나포의 포상에 도착한 강진호가 바로 포상 한구석의 물품 보관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포와 관련된 사고라면 이곳도 뒤집혔겠지만, 조사관들은 이곳으로는 발길을 주지 않았다.
포상 안의 박스들을 열고 살피던 강진호의 눈에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장막.’
손을 대는 것만으로 끝도 없는 흙먼지가 쏟아져 나오기에 누구도 손대기를 꺼려하는 것. 훈련을 할 때가 아니라면 결코 풀리지 않을 거대한 그물 위장막.
강진호는 지체하지 않고 그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한참을 뒤적거리고 포기하려는 순간,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음…….’
손을 더 뻗어보니 얇은 책자 같은 것이 손에 잡혔다. 강진호는 바로 책을 잡고 위장막에서 뽑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