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71
#1370.
증명하다 (5)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며 이현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영 찝찝한데, 이거.’
음식에 독을 탔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위생이 불결해 보여서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차린 건 없지만, 조금이라도 드셔주신다면 삼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저리 공손히 비는 이들의 몰골을 보니 거지 굴에 쳐들어와 거지 밥을 빼앗아 먹는 느낌이 난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마교.
중국 무인계의 쓰레기 청소부라 불리던 하층민들.
수많은 마교도들이 강진호와 장민을 따라 중국으로 넘어왔지만, 더 많은 마교도가 중국 땅에 남아 있었다. 가족의 부양과 결코 적지 않은 나이라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은 분루를 삼키며 한국으로 넘어가는 이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마교의 잔당이 여전히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이들은 그 중국의 마교도들이었다.
‘이거, 기분이 영 이상한데.’
마교도들은 마치 삼 대조 할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공손했다. 하지만 이현수는 곧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들에게 있어서 강진호는 삼 대조 할아버지보다 더한 사람이 아니던가.
삼 대조 할아버지가 직접 와도 일단 바닥에 엎드리고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다.
“마존이시여, 이리 뵙게 된 감동을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를 돌아보고는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움켜잡으며 웃음을 참았다.
‘곤란해하고 있어, 이 양반.’
흰머리가 성성한 이들이 머리를 숙이는 광경을 보는 게 영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강진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를 어떻게 찾은 거지?”
“마존이시여, 마존의 존안은 모든 마교도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습니다. 혹여나 마존을 만나 뵙게 되었을 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장민이 시켰겠지.
그 인간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
“하지만 이현수를 알 수는 없었을 텐데?”
“마존이시여, 그 얼굴과 이름 역시 모든 마교도가 알고 있습니다. 이건 장로…….”
“됐다.”
강진호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내저었다.
“장민이 알렸겠지.”
“예. 이현수라는 자가 마존의 곁을 지키는 경우가 많으니, 혹여나 이현수를 보게 된다면 마존께서 함께함을 확인하라는 것이 장민 장로의 전언이었습니다.”
강진호의 볼이 살짝 떨렸다.
‘사람이 이렇게 오지랖이 넓어도 되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장민이라는 이름 앞에서 납득이 가버리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래서 우릴 알아봤다고?”
“그러합니다, 마존이시여!”
“어…….”
강진호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긁었다.
‘이거, 생각해 보면…….’
신분증으로 위장하고 어쩌고 하는 게 다 헛짓거리였던 것 아닌가.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선양에서조차 길거리에서 강진호를 알아보는 이들이 나타나는데, 베이징에서 강진호를 알아본 이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CCTV고 뭐고, 앞으로 잠입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말아야겠어.”
“동감입니다.”
강진호와 이현수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한숨을 내쉬는 동안에도, 장필재는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이분들은?”
“……마교도라네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왜 강진호 씨를…….”
“저분이 교주시거든요.”
장필재의 눈이 흔들렸다.
“사이비도 하십니까?”
“…….”
강진호의 눈가가 경련을 일으킨다.
이현수가 강진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제낄까요?”
“…….”
“상태 영 별론 거 같은데, 적당히 교육 한 번 해야 할 것도 같고.”
“냅 둬. 환자잖아.”
“많이 나았는데.”
“냅 둬.”
“그럼 다음 기회에.”
이현수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장필재도 이제는 총회의 식구로 봐야 한다. 강진호가 장필재를 받아주겠다고 공언한 이상은 말이다. 얼굴은 노안이지만, 실제로는 이현수보다 어린 사람이 아닌가. 이제는 슬슬 총회의 분위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강진호가 피식 웃고는 마교도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장민이 보낸 이들인 줄 알았는데 알아서 강진호를 찾아왔다니, 황당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미묘한 심정이다.
“그러니까…….”
“저, 그런데!”
장필재가 번쩍 손을 들어 강진호의 말을 막았다. 강진호가 의문 어린 눈으로 돌아보자 장필재가 단호하게 말한다.
“배고파 뒈질 것 같은데, 먹고 하면 안 됩니까?”
이현수가 다시 조곤조곤 물어왔다.
“제낍니까?”
“……냅 둬. 먹어야 산다며?”
“그럼 저도 먹습니다?”
“너는 먹지 마.”
“…….”
이현수가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진호는 피식 웃는 것으로 이현수의 항의를 넘겨 버리고는 다시 마교도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장민의 연락을 받았나?”
“장민 장로가 저희에게 따로 한 전언은 없었습니다. 저희는 감히 장민 장로의 연락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지위가 아닙니다.”
강진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위로 볼 때,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보인다.
“이곳에 교의 지부가 있나?”
“선양에는 딱히 지부라고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대신 교도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기는 합니다.”
“흠.”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지부가 없다면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들의 사정이야 빤하고.
‘하기야.’
북한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무슨 도움을 받겠는가. 북한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리 판단한 강진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회주님.”
“응?”
“이제부터는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회주님은 식사하시죠.”
“응?”
“잘 먹으셔야 합니다. 잘 먹어둬야 험난한 이북을 돌파할 수 있는 법이죠. 그럼 여러분은 잠시 저를 뵙죠. 이쪽으로. 자자, 이쪽으로.”
이현수가 마교도들을 잡아끌었다.
강진호가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 이현수가 모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대체?”
이현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장필재가 국수를 후루룩 마시고는 강진호의 옷을 잡았다.
“가시면 안 됩니다.”
“……응?”
“원래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하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뜯어내고 돌아오실 테니까요.”
“……응?”
뜯어?
뭘?
“마존이시여, 옥체 보존하십시오!”
“강녕하십시오!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마교도들의 열렬한 배웅에 강진호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자, 가시죠.”
이현수가 기름이 반들반들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는 강진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강진호의 입에서 혼이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교도들에게 삥을 뜯는 날이 오다니.”
“인생 다 그런 겁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삥은 무슨 삥입니까? 잠시 빌린 거지요.”
보통 그렇게 말하면서 삥뜯거든?
“그리고 진짜 갚을 거 아닙니까? 한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열 배로 돌려주면 그만이죠.”
그게 삥뜯는 거라고, 인마.
“아니면 지금이라도 돌려줄까요?”
“…….”
“기쁜 마음으로 준 돈이니, 요긴하게 쓰고 돌려주면 됩니다.”
“끄응.”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다. 돈을 빌린 이들이 고양이가 아니라 가난한 마교도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데 저 양반들, 생각보다 알부자인 모양입니다. 이게 짭짤한데요?”
“…….”
“회주님이 고개 들고 중국 순회 한 번 하면 웬만한 건물 몇 채 올릴 돈은 나올 것 같은데, 어떻…….”
강진호가 가만히 주먹을 쥐는 걸 본 이현수가 입을 닫았다.
‘그만 깝쳐야지.’
분위기를 풀어보겠답시고 평소보다 조금 더 날뛰어봤지만, 정도를 넘으면 허리 부러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강진호가 살짝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북한으로 들어가면 되나?”
이현수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필요한 물품을 몇 가지 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으로 진입하면 민가를 최대한 피해서 산길로만 남하해야 할 테니, 최소한의 물품은 갖춰야죠.”
“흠.”
강진호가 볼을 긁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산 며칠 탄다고 따로 필요한 물품이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강진호의 입장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납득할 수 있다.
“최대한 빠르게.”
“알겠습니다. 그럼 물품만 구입하고 나서 바로 북한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긴스 님과 연락하여 좌표를 다시 맞춰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저쪽 카페에서 쉬고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현수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이현수를 바라보고 있던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페라…….”
“저기 말하는 것 같은데요.”
장필재가 강진호의 허락을 구하고 앞장을 섰다.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장필재의 뒤를 따랐다.
베이징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소도시지만, 번화가는 한국의 모습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특히나 강진호의 눈에는 말이다. 꽤나 조용해 보이는 카페 안으로 들어간 강진호와 장필재가 커피를 시키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파라솔이 쳐진 간이 테이블에 앉은 강진호가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찰칵.
불을 붙인 강진호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저…… 강진호 씨. 아니, 회주님.”
장필재가 자신의 호칭을 정정했다.
“말해.”
“……긴장 안 되십니까?”
“북한으로 들어간다는 게?”
“예.”
“글쎄.”
강진호가 살짝 고민해 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긴장할 이유가 있나? 위험한 건 여기나 북한이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이제는…….”
강진호가 말끝을 흐렸다.
“한국도요?”
“그렇지.”
장필재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한국도 위험하죠.”
그 말이 가지는 무게가 새삼 장필재를 짓눌렀다.
‘조국이라…….’
평생을 바쳐 온 조국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여기까지 와서야 장필재는 그동안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우산이 되어주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국적을 속이다 발각되면 무국적자로 죽어야 하는 정보원의 삶을 사는 와중에도, 대한민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고 있던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뭐가?”
“제가 지금 뭐 하는 건지요.”
장필재가 쓰게 웃었다.
“나를 여기로 밀어 넣어버린 상사는 연락도 안 되고, 국가는 대놓고 제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같이하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니.”
장필재가 얼굴을 감쌌다.
정신없이 달아날 때는 의식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의 여유가 찾아오자마자 현실을 깨닫게 된다. 결코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이.
“회주님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 침착할 수가 있습니까?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
가만히 장필재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