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83
#1382.
벌어지다 (2)
“그렇게 본다고 휴대폰이 뚫어집니까?”
“……은솔아.”
“네?”
“사람이 왜 눈치가 있어야 하는 줄 아니?”
“…….”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말도 날 잘못 만나면 대가리 깨지는 법이거든. 너는 어떨 것 같니?”
“주둥아리를 닫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연하가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자, 한은솔이 깨갱 하며 고개를 숙였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한은솔은 이미 서른여섯 번쯤 죽었을 것이다.
“은솔아.”
“예?”
“사람이 왜 사고를 치는 줄 아니?”
“글쎄요…….”
“아는 걸 못해서 그렇다, 아는 걸.”
“…….”
“나는 네가 아는 걸 당연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
“아니면 코가 부러지든 머리채가 뜯겨 나갈 테니까.”
한은솔이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는 걸 못하는 건 누나가 제일 심하면서.’
물론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다.
최연하의 기분이야 심심하면 나빠지고 좋아지기를 반복하는 주식시장 그래프 같지만, 오늘처럼 저점을 찍는 날은 흔치 않았다.
으득.
“누, 누나, 손톱! 손톱! 그거 비싸게 주고…….”
“그럼 니 손톱 줄래?”
“……그건 아니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주둥아리 닫겠습니다.”
“그냥 대답도 하지 마.”
“예.”
한은솔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잘못 건드리면 사단 난다.’
등 뒤에서 뭔가 음울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호러 영화 감독이 지금 이 광경을 봤다면 억만금을 들고 와서라도 캐스팅을 하겠다고 난리를 쳤을 텐데.
‘하기야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당장 한은솔만 해도 초조함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입장을 바꿔 한은솔이 최연하라고 해도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달달댔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대범한 것 같기도 하고.
“아아아아악! 이 새끼, 왜 연락 안 해!”
아니네.
대범은 일단 취소하자.
최연하가 휴대폰을 잡아 소파로 던졌다. 그래도 최소한의 생각은 있는지, 바닥에 던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줄 만하다.
“살았으면 살았다! 죽었으면 죽었다고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
“죽었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요?”
“왜 못해! 하면 되지!”
한은솔은 대화를 포기했다. 이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빨리 어떻게든 결론이 나야 할 텐데.’
이러다가는 최연하는 둘째 치고 한은솔 자신이 말라 죽을 판이다.
“……그럼 그러지 말고 먼저 전화를 해보시는 게?”
“그랬다가 진호 씨한테 사고라도 나면 니가 책임질래? 어?”
어쩌라고…….
한은솔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연예인 매니저를 골라 버린 한은솔의 잘못이다. 아니, 그 수많은 연예인 중에서 하필이면 최연하의 매니저를 해보겠다는 말을 꺼낸 이 주둥아리가 문제겠지.
인생이란 결국 선택이고, 모든 선택은 합당한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 대가가 너무 맵다는 게 문제지만.
“아니,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대체 언제까…….”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최연하의 목이 획 돌아간다. 얼마나 급격하게 꺾였는지, 목이 삐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러고는 비호같은 동작으로 소파로 몸을 던져 전화기를 낚아챘다.
“여보세요!”
[별일 없어요?]“…….”
최연하의 손이 파들파들 떨린다.
‘머리, 저…… 저 머리카락 치솟는 거 아닌가?’
한은솔은 순간 최연하를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저러다가 정말 쌍욕 치는 게…….
“진호 씨는 괜찮아요?”
어?
이게 아닌데?
한은솔이 멍한 눈으로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뭐지?
저 부드러운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눈에 보이는 건 다 씹어 먹을 것 같던 악마는 어디가고, 어찌 저런 온화한 목소리라는 말인가.
‘칸도 씹어 먹겠네.’
연기가 물이 오르다 못해 물이 철철 넘치는 수준이다.
한은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연하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피가 날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면서도 목소리는 부드럽게 내는 신기를 보여주는 최연하였다. 감탄이 절로 난다.
[네, 괜찮아요.]“지금 어디에요?”
[오늘 한국 들어왔어요. 이제는 와도 괜찮을 거예요.]“진짜죠? 어디 다친 데 없죠?
[네. 멀쩡합니다.]최연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이게 강진호가 무사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인지, 아니면 이제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왜 연락이 이렇게 늦었어요! 속 터져 죽는 줄 알았잖아요!”
[바로 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았네요.]“여하튼 무사하다니까 다행이네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누나, 방금 전까지 이 새끼, 저 새끼 하지 않으셨나요? 말이 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제 한국으로 가도 된다구요?”
[네. 괜찮을 겁니다.]“그럼 저 바로 들어갈게요.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나도 할 말 많으니까.”
[네.]“진호 씨, 진짜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이번에 제가 폐를 끼쳐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폐는 무슨, 우리 사이에. 됐으니 이만 끊어요. 낯간지러우니까.”
최연하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짐 싸! 한국 가도 된대!”
“저도 들었어요!”
“빨리빨리! 이제 중국 공기만 맡아도 죽을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중국 음식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면서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인마! 라면 땡겨 죽을 것 같다! 집에 가자!”
한은솔이 피식 웃었다.
하기야 그 심정이야 한은솔이라고 다를 게 없다. 이제 정말 해외라면 지긋지긋하다. 집에 전화해서 일정이 늦어지는 이유를 변명하는 것도 끔찍하고.
“얼른 집에 가자구요. 우리 엄마는 제가 범죄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줄 알아요.”
“……진짜?”
“티는 안 내려고 하는데, 그런 눈치더라구요. 빨리 집에 가야 안심하시지.”
“진짜 가야겠네. 얼른 준비해. 티켓이야 가면 있겠지.”
“예.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한은솔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최연하도 그런 한은솔을 거들었다. 해외 촬영이 잦아지다 보니 이제는 짐 싸는 데 귀신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캐리어가 채워졌다.
캐리어들을 입구에 차곡차곡 쌓은 두 사람이 방 안을 다시 살폈다.
“놓고 가는 거 없지?”
“시뮬레이션만 몇 번을 했는데요. 그리고 여권이랑 지갑, 휴대폰만 챙기면 다른 건 놓고 가도 됩니다.”
“그건 그렇지. 여권 챙겼지?”
“당연하죠. 여기…… 어? 여기…….”
품 안을 뒤적거리던 한은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상하다? 아까 분명히…….”
“빨리 찾아, 인마!”
“넵!”
한은솔이 기겁을 하여 캐리어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여권을 찾은 한은솔이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기 있어요.”
“……내가 이런 놈을 믿고.”
한숨을 푹 내쉰 최연하가 바깥을 향해 턱짓 했다.
“그럼 이제 간다고 말은 해야지.”
“아, 그렇죠. 그게 예의니까. 잠시만 계세요. 제가 가서 바로 말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한은솔이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사이, 최연하는 문을 고정하고 캐리어를 하나씩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걸 미리 옮겨둔다고 시간이 뭐 그리 단축되겠냐마는, 한시라도 빨리 공항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빨리 한국 가서 샤워하고 쉬고 싶다.’
한국 가면 라면 끓여먹고 침대에 늘어져야지. 이왕이면 소주도 한잔…….
아니, 진호 씨부터 보러 가야지. 목을 졸라 버릴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캐리어를 옮기던 최연하의 눈에 한은솔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누나, 그 양반 지금 없다는데요?”
“응? 왜 없어?”
“일하러 나갔다는데요?”
“……그래?”
최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걔 전화번호 있냐?”
“없죠.”
“그럼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지?”
“그렇죠?”
최연하가 상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억울하면 지가 알아서 연락하겠지. 그냥 가자.”
“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한은솔이 재빨리 캐리어를 잡았다.
“택시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공항으로 가야 한다니까, 차 한 대랑 운전기사 빼준대요.”
“그 차이커창인가 하는 양반이 없는데도 그게 돼?”
“불편함 없이 모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신경 쓰지 말라던데요?”
“그래주면 우리야 편하지. 안 그래도 여기로 택시가 올까 걱정이었는데 잘됐네. 그럼 얼른 가자.”
“예!”
최연하와 한은솔이 입구 쪽으로 캐리어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처음 올 때는 한 사람당 두 개씩 들면 딱 맞던 캐리어가 그새 두어 개 늘어나 있었다.
“쇼핑 좀 작작하라니까!”
“인마! 여기서 쇼핑이라도 안 하면 무슨 재미로 버텨! 너나 폰 게임 좀 그만해!”
“그건 돈 안 들잖아요!”
“니가 게임에 현질하는 돈보다 누나가 옷 사는 돈이 비율로 보면 더 적어!”
“…….”
어? 그건 맞는데…….
와, 세상 억울하네.
그렇게 따지면 최연하는 무슨 짓을 해도 검소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버는 돈을 생각하면 지나가다 자동차 판매점에 들어가 차 한 대 체크카드로 질러 버려도 평범한 사람이 장난감 차를 사는 정도의 소비밖에는 안 될 테니까.
“더러운 자본가 같으니.”
“그 자본가한테 월급 받아 먹고사는 사람이 누구더라?”
“제 월급은 강진호 씨가 주는데요?”
“그 진호 씨가 더 더러운 자본가야, 인마!”
“아, 그것도 그러네.”
평범한 서민인 한은솔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그의 주변에는 더러운 자본가와 더 더러운 자본가들이 득실득실거렸다.
이곳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사람이라 해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거대한 저택에 버젓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여하튼 중국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오기는 해야겠지만, 일단 한동안은 편안한 한국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비행기 있겠죠?”
“검색해 보든가.”
“아, 몰라요. 일단 갈래요.”
“그래. 나도 그냥 갈란다. 차라리 공항에서 밤을 새면 샜지, 이제 여기는 더 있기 싫다.”
“동감. 격하게 동감.”
두 사람이 마지막 남은 캐리어를 들고 대문으로 향할 때였다.
“아오, 여기는 뭔 마당이 이렇게 넓어? 운동장도 아니고!”
“그래도 입구에서 가까운 쪽이라 다행이지, 안쪽 방 받았으면 캐리어 옮기다 숨 넘어갔겠어요.”
“내 말이!”
마지막 캐리어까지 모두 대문으로 옮긴 최연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다. 이제 공항으로 가면 되네. 차 대문으로 오는 거 맞지?”
“예. 그럴…….”
그 순간, 한은솔이 눈을 크게 뜨고 뒤쪽을 돌아보았다. 마당에서 검은 밴 한 대가 대문 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차가 왜 안에서 나와?”
“그러게요?”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딱 그 짝이네. 썩을.”
최연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기다렸다가 캐리어를 실으면 되는데.
“어쨌든 차에 짐을 싣…….”
그때, 최연하의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는 건가?”
두 사람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아…….”
중국 전통 복장을 걸친 거대한 사내를 보는 순간, 최연하의 눈이 흔들렸다.
홍왕.
그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