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95
#1394.
적대하다 (4)
“인출이 막혔다구요?”
“……예.”
황민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근거로 인출을 막는다는 겁니까? 법인은 자체로 인격을 가집니다. 법인의 대표에 종속되어 있는 곳이 아니에요. 법인의 대표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법인 통장의 인출을 막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아직 판결이 난 것도 아니고, 이제 겨우 조사를 시작한 단계인데!”
이현주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 쪽과 당국에 문의를 넣어두었습니다.”
“거참.”
황민수가 살짝 이를 갈았다.
“문의하고 나면 며칠 뒤에 착오였다면서 슬쩍 풀어주겠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황민수가 얼굴을 문질렀다.
‘빌어먹을 놈들.’
이건 길들이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길들이기라기보다는 꼬장에 가까웠다. 당국에서 이게 위법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영장도 없이 통장을 압류하거나 입출금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보통 이럴 때는 은행에 직접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살아 있는 권력이 대놓고 시키는 일에 위법 운운하며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네요.”
이현주가 의문 어린 눈으로 황민수를 바라보았다. 황민수가 지체 없이 말을 이어 이현주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회장님은 죄가 없으시네.”
“당연합니다.”
황민수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강진호가 정말 죄가 있었다면 이런 치졸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정식으로 영장을 신청하면 그만이니까.
이리 꼬장을 부린다는 건 어떻게든 강진호를 압박하겠다는 의미였다.
‘빌어먹을, 하필 이때에.’
황민수가 야심차게 준비하던 프렌차이즈가 이제 막 첫 삽을 뜰 시점이다.
물론 준비를 다 끝내놓고 오픈하기 직전에 일이 터진 것보다는 손해가 덜하겠지만, 한창 교육과 준비를 해야 할 시기에 회장이 구속된 것 역시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가맹점주들은 어떤가? 굉장히 동요할 것 같은데.”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다구요?”
“네.”
황민수가 멍한 얼굴로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괜찮을 리가 있나?’
가맹점주들 입장에서는 거금을 투자하고 시작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회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고, 연일 메스컴에서 MK의 이름을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 안닌가.
가맹점주들이 단체로 회사로 밀고 들어와 관계자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괜찮다니.
“정말입니까?”
“이상하게 생각되시겠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되레 구치소나 경찰소로 가서 난장을 부릴까 봐 걱정이네요.”
“…….”
황민수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자, 이현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하게 설명드리기는 어렵지만, 가맹점주를 맡을 이들의 회주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입니다.”
“……그렇군요.”
황민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경우를 몇 번이나 봤기 때문이다.
‘하기야 여기도 마찬가지지.’
회사의 회장이 구속되었다. 그것도 다른 혐의도 아니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이 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동요?
물론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동요의 방향이다. 일반적인 회사라면 회사의 명운이라든가, 대체 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관심을 가질 텐데, 이 회사의 사원들은 회장이 구치소에 들어가 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숫제 회사가 아니라 종교로군.’
이걸 신뢰라 불러야 할지, 신앙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하다.
“현주 씨.”
“예, 사장님.”
“잠시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겠죠.”
황민수가 진중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새로운 사업을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가맹점주들이 이해해 준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에요. 프렌차이즈라는 건 소비자들에게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사업입니다. 소비를 해줄 사람들이 기업에 나쁜 인식을 가지게 되면 망하는 건 순식간입니다.”
이미 판로를 확보하고 고객을 확보해 놓은 중견 기업도 불매운동 한 번에 회사가 휘청거리는 시대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소비자들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진다면, 그 끝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빤하다.
황민수는 자신의 복귀 첫 사업을 망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회장님에 대한 변호인단 구성은 끝났습니까?”
“아니요. 그건 제 쪽이 아니라…….”
“이현주 씨.”
황민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낮은 목소리에 이현주가 움찔했다.
“회장님이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현주 씨의 소속은 여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회장님의 일을 해결해 주길 손가락 빨면서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그럴 거면 이현주 씨는 왜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현주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이 안 계실 때 진짜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움직이세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뭔지를 고민하고, 직접 발로 뛰세요.”
“예.”
이현주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다 맞는 말이야.’
은연중에 이현수가, 그리고 총회가 이 일을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현주는 황민수를 도와 MK만 단속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MK는 총회 휘하 단체가 아니라 독립된 법인이라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고 다녔음에도 막상 일이 터지자 이현수에게 일을 맡긴 채 손을 놓으려고 했다.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당하고, 좋은 것만 빼먹으려 한다고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
“최대한 빠르게 변호인단부터 구성해 보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이현주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민수를 바라보았다.
‘황정후의 아들이라…….’
아니, 이제는 누군가의 아들이라 불리기에는 많은 나이다. 황정후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 황민수라 지칭하는 게 맞다.
그저 사업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사람이지만, 위기가 닥치자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막상 우왕좌왕해 버린 이현주와는 다르게 말이다.
‘배워야 해.’
지금의 이현주가 모자라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녀의 주변에는 보고 배울 사람이 널려 있으니까. 배우고 또 배우면 언젠가는 이현주도 그들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황민수가 낮게 한숨을 내쉰다.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봐야죠.”
황민수는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뒷말을 붙였다.
“좀 많이 껄끄럽기는 하지만…….”
* * *
이마에서 살짝 땀이 배어난다.
이현주 앞에서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황민수지만, 지금 그에게서 그때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꼭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하지만 이건 황민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니까.
이현주 앞에서야 노련한 사업가일 수 있는 황민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앉은 이에게는 세상 경험 부족한 애송이일 뿐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천하의 황정후이기 때문이다.
황민수가 들어와 앉았음에도 말없이 담배를 뻑뻑 피워 대던 황정후가 이내 노성을 내질렀다.
“대체 이게 뭔 일이야!”
“……회장님.”
감히 아버지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국보법이라니, 그럼 진호가 간첩질이라도 했단 말이야? 이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이거야!”
대노한 황정후의 분노를 정면에서 맞받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이라도…… 아니, 자식이기에 더더욱 어려운 면이 있었다.
“크흠.”
황민수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일단 저희 회사에서는 회장님이 그런 일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런 짓을 해!”
“……네?”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런 짓을 하냐’와 ‘그놈은 그런 일을 할 놈이 아니다’는 확실히 어감이 다르다.
“간첩? 허허,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놈이 마음먹고 간첩짓을 했으면 잡지도 못해! 그리고! 진호가 뭐가 아쉬울 게 있어서 간첩짓을 해!”
조규민이 황정후를 만류했다.
“회장님, 진정하십시오. 건강을 해칠까 걱정입니다.”
“건강이 문제야, 지금?”
황민수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황정후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아버지가 이리 화를 내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내심 속 쓰려 하거나 가슴 아파할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드러내 놓고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강진호에 대한 미묘한 질투가 피어났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황민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이 할 짓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짓이 있는 법이다. 죄 없이 구치소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질투라니.
‘정신 차려라.’
그는 황정후의 아들 황민수로서 황정후를 만나러 온 게 아니다. MK 그룹의 사장 자격으로 재경의 회장 황정후를 만나러 온 것이다.
길게 심호흡을 한 황민수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뭐야?”
“외람된 말씀인 줄은 압니다만, 저와 MK의 능력으로는 강진호 회장님을 돕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황정후가 살짝 못마땅한 눈으로 황민수를 바라보았다.
“그게 한 회사의 사장으로서 할 말이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안 되는 능력으로 억지를 부리느니, 빠르게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흐으음.”
황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정계와 접촉해 주십시오.”
“정계?”
“예. 여론을 바꿔야 합니다. 야당 쪽에서 의혹을 제기해 주면…….”
“해봤어.”
“예?”
황정후가 새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이미 연락해 봤다. 안 된다는구나.”
“벌써…….”
황정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쥐새끼 같은 것들. 평소에는 그렇게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더니, 막상 도와달라고 하니 입을 싹 닦아? 정치인 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놈들인 건 알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고정하십시오, 회장님.”
“끄응.”
황정후가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양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꾹 누른 황정후가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재계 쪽의 힘을 모아보고, 그래도 도와줄 국회의원이라도 하나 수배해 봐야지.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네가 예뻐서 해주는 것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민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황정후가 살짝 못마땅한 눈으로 황민수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지. 내가 이런 꼴로 보낸 사람들이 한둘이 아냐. 국가라는 건 숫제 괴물이야. 국민을 지키라고 만들어놓은 국가가 국민을 잡아먹으려고 들지. 이제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건만…….”
황정후가 씁쓸하게 뇌까렸다.
“어쩌면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지도 모르지. 결국 사람은 서로 헐뜯지 않고는 살지 못하니까.”
더없이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구해야지.”
황정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재경의 모든 돈과 힘을 다 써서라도 반드시 구해낸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놈이 당하는 꼴은 못 봐!”
재계의 사자가 조용한 분노를 내뿜었다.
재경 그룹 사옥의 최상층에서 황정후가 그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