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399
#1398.
거래하다 (3)
혈마는 바닥에서 머리를 떼지 않았다.
더없는 공경.
그리고 강자에 대한 예우.
그 모습을 보며 강진호는 미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가 지금 몸을 담고 있는 곳은 한국의 무인계이지만, 그를 가장 우대하고 두려워하는 곳은 오히려 중국이다.
특히나 마교와 적천마존의 전설을 듣고 자라난 이들이 강진호를 더더욱 어려워했다.
장민이 그러하고, 지금의 혈마가 그렇다.
물론 혈마는 한 번 강진호를 습격한 적이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확고한 공경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을 테니까.
혈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들은 마존을 원합니다.”
“날 죽이겠다고 그 난리를 쳐놓고?”
“실패했으니까요.”
담담한 말이었다.
“내가 그 손을 잡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닙니다. 마존이시여, 저들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게 아니면 저들이 살아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흠.”
혈마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저들과 삼왕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저들이 가져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힘. 삼왕 중 누구도 먼저 그들을 건드릴 수 없는 힘입니다.”
혈마가 고개를 살짝 들어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 힘을 마존께서는 가지고 계십니다.”
“…….”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혈마가 설명을 이어갔다.
“저들은 그 힘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죠. 군의 화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삼왕계와도 자웅을 겨뤄볼 수 있다고 믿은 겁니다. 하지만 마존 덕분에 깨닫게 된 거지요. 그게 꿈같은 이야기였다는 걸.”
강진호가 살짝 고개를 뒤로 튕겼다.
머리가 벽에 닿으며 콩콩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북한에서 겪어본 바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건 북한이니 가능한 거지요. 지금 마존께서 여기 계시단 걸 안다 해서, 국가가 이곳으로 포를 쏘고 미사일을 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지.
한국처럼 발달한 국가라면 인적 없는 산에다가 쏜 포라도 금세 발각이 될 것이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지만, 중국은 인구 역시 많다. 그 많은 눈을 속이고, 그 많은 입을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더구나 저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번처럼 마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삼왕계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건 내전이나 다름없는 일이 됩니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내전이라는 건가?”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을 중앙의 힘으로 억눌러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조금의 틈만 생기면 수많은 독립국가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티베트지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이 티베트의 독립을 막기 위해서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고 그들의 자유를 완전히 제한한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내전이 벌어지면 독립하려는 곳이 티베트 하나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내전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지금 중국의 힘은 그 크기와 인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인구가 3할만 줄어도 중국의 영향력은 절반 이상으로 감소하고 말 것이다.
“계속해 봐.”
“그렇기에 저들에게 있어서 마존과 동맹을 맺는 것은 선택이나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지상 과제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혈마를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문 강진호가 불을 붙였다.
찰칵.
새하얀 담배 연기가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진다.
“흐음.”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혈마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강진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네 태도는 그들의 사자로 온 것 같지는 않군. 굳이 이런 정보를 나에게 오픈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존이시여.”
혈마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저들의 의도는 그러합니다. 저들은 무슨 대가를 내주더라도 마존과 동맹을 맺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면피일 뿐, 마존께 충성을 바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은 백기를 들었지만, 저들은 언제고 다시 마존을 배신하려 들 것입니다.”
“너는 아니라는 건가?”
혈마가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린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더없이 진지했다.
“마존이시여, 저는 저들의 개입니다.”
“잘 아는군.”
“하지만 제가 저들의 개가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개가 되었다는 건가?”
“잘못되었습니까?”
혈마다 되물었다.
“티베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대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어중간한 무파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습니다. 포달랍궁이 그랬고, 마교가 그랬습니다. 마존께서 나타나시지 않았더라면 마교는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그 명맥이 끊겼을 겁니다.”
강진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강진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교가 그나마 그 이름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이유는 장민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민 역시 영원히 살 수는 없다. 그의 천수가 다하는 순간, 마교는 모든 응집력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마교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마교가 받은 탄압은 혈교가 받은 탄압에 비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두에게 경원당했습니다. 심지어 같은 마도에게조차.”
“웃기지 마.”
강진호가 피식 웃으며 혈마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너희는 경원당한 게 아니야. 너희가 거부한 거지. 내가 마교를 통해 마도를 일통할 때 유일하게 나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 선언한 게 바로 혈교였고, 당대의 혈마였다.”
“그 어리석은 결정이 지금의 상황을 낳았습니다. 교도들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시 혈마의 생살을 씹어 먹으려 들 것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혈마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쿵!
혈마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때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마존이시여, 저희는 기댈 곳과 쉴 곳이 필요합니다. 마교가 마존의 품 안에서 안락을 되찾았듯, 저희도 처마와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마존을 모시며 충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혈마의 눈이 더없이 진중하게 빛났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나서 이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저들의 모든 것을 알고, 저들의 모든 정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마존께서 저들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 있는지 저보다 잘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혈마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강시를 보내 사람을 노리던 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마존이시여,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개입니다. 개는 그저 물어보는 것 말고는 상대의 강함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물어보고 얻어맞고 나서야 진정 주인을 알게 되는 법이지요.”
“충분히 맞았다는 건가?”
“제가 충성을 바쳐야 할 온당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결국 과학과 화기가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강한 이에게 붙었을 뿐이다. 하지만 강진호와 만난 경험은 혈마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분명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이 인간의 이름을 가진 괴물들이 살아 숨 쉬는 한, 아직 무인계의 세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혈마는 그리 믿었다.
강진호가 나직하게 웃었다.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모양이군. 청산유수처럼 지껄이는 걸 보니 말이야.”
쿵, 쿵!
다시 바닥에 두 번 머리를 찧은 혈마가 피가 흐르는 머리를 바닥에서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이 모든 일이 지난다면 저는 마존의 손에 웃으면서 죽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교도들만은 마교의 일원으로 받아주십시오.”
“고개 들어.”
혈마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배어 나온 피가 그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한 번 나를 노린 이를 살려두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진호가 벽에 고개를 기댄 채 말했다.
“예외는 있는 법이지.”
이미 바토르라는 예외가 존재하니까. 그리고 이현수라는 예외도 존재한다.
그럼 혈마 역시 그 예외에 포함되어도 될까?
글쎄.
“혈마.”
“하명하십시오, 마존이시여.”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는다.”
“…….”
“신뢰라는 것은 시간과 함께 쌓여가는 것이지. 나는 너의 충성을 믿을 이유가 없고, 너는 내게 그 충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저는…….”
“이득과 함께하는 충성은 충성이 아닌 법이지.”
혈마가 나직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강진호의 말이 맞다.
충성이라 대가 없이 바치는 것. 안전을 보장하면 충성을 바치겠다는 말은 그저 거래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실패인가?’
암담한 마음에 눈을 감으려는 순간, 강진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충성이니 어쩌니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나는 너희에게 그런 것을 바란 적이 없다.”
혈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게 이득을 가져와라. 그럼 너희를 지켜주겠다. 너희가 살 터전을 내주고, 너희의 이름을 교의 이름으로 영세토록 이어지게 해주겠다.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내줄지는 너희가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오느냐에 달려 있겠지.”
혈마의 얼굴에 희열이 들어찼다.
“물론입니다. 마존이시여,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꼴같잖은 연기는 그만하지. 보고 있으면 메스꺼우니까.”
혈마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마존을 올려다보았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보기 역겹더군.”
“죄송합니다. 좀 진지하게 굴어야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영 성미에 안 맞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이걸로 좋다.
“혈마.”
“예, 마존이시여.”
“애초에 혈교든 마교이든 마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가 내 것이다.”
“…….”
“가서 네 가치를 증명해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중요히 여길지는 네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마존이시여.”
혈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화려하게 저질러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지.”
혈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한 번 절을 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감히 마존께 대항한 자들에게 지옥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보여 드리겠나이다.”
“하나 명심하지.”
“예.”
“무공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마라.”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무학으로 할 일이었다면 마존께서 이미 저들의 목을 들고 계시겠지요.”
피로 물든 목을.
“가라.”
“예! 마존이시여, 머지않은 날 다시 뵙겠습니다.”
혈마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다.
그의 종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강진호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재미있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과연 저들이 말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지켜보는 것 역시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