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13
#1412.
종결하다 (2)
“손자분은 곧 재판을 받을 겁니다. 유죄는 거의 확정적입니다.”
“그렇겠지.”
“뇌물죄는 생각 이상으로 커질 것 같습니다.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나오니까요.”
“적당한 데서 끊지 않겠나? 파다 보면 청와대고 국회고 다 드러내야 할 텐데, 설마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으니까.”
“자제분의 횡령 정황도 잡혔습니다.”
“인연 끊은 지 오래네.”
“그리고…….”
이종욱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살인 교사죄는 거의 확정입니다. 중국 측에서 관련 자료를 연신 언론을 통해 터뜨리고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채널을 통해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지금 거의 단교 수준으로 이쪽의 연락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작정을 해도 제대로 한 것 같습니다.”
“그럴 작정이 아니었다면 시작도 안 했겠지.”
모든 사안이 이종욱이 아닌 김명찬과 관련된 일이지만, 되레 김명찬은 느긋하고 여유로웠고, 이종욱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총리님…….”
이종욱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총리님의 모든 것은 무너질 겁니다. 더는 자랑스러운 민주 투사로 남지 못할 것이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총리로서의 업적도 부정될 겁니다. 그리고 총리님이 그간 정계에서 해오신 것들도 모두…….”
“알고 있네.”
김명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총리님.”
“자네도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내부 정보라면 지금 자네보다 많이 알고 있는 이도 없지 않은가.”
“…….”
이종욱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김명찬의 말이 맞다. 그는 이 일을 벌이는 주체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명찬과 함께 강진호를 파멸시키려던 이들, 동료라고 불러야 할 이들이 지금 김명찬을 매장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말해보게. 강진호가 저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나?”
“……그렇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지.”
김명찬이 다 타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한길을 걷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자발적으로 내 등을 찌르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그게 자발적과 뭐가 다릅니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저들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
“총리님을 몰락시키면서 본인들도 다시 깨달은 거죠. 다음에 몰락하는 이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그 공포감 때문에라도 더 철저하게 총리님을 부수려 들 겁니다. 어떻게든 강진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쿡쿡쿡.”
김명찬이 나직하게 웃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꼴이 우습게 됐군. 일개 개인에게 살려 달라고 비는 꼴이라니.”
김명찬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기야 그 꼴을 만들어낸 게 다름 아닌 나니, 내가 할 말은 아니로군.”
김명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총리님, 저들은…….”
“됐네.”
김명찬이 손을 내저어 이종욱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었네. 모를 수가 없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나와 그들만 알고 있는 정보가 언론에 버젓이 나오는데, 내가 왜 모르겠는가.”
“…….”
“나라고 언제 남 등에 칼을 박아보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남이 아니잖습니까.”
“이보게. 동료라든가 친구라든가, 그런 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일세. 지옥에는 동료도 없고, 친구도 없는 법이지. 차이가 있다면 나는 지옥에 떨어졌고, 저들은 한 발 걸치고 있다는 것뿐이지.”
김명찬이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그걸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총리님.”
이종욱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말을 해야 하는가는 여기로 오면서 계속 고민한 일이다. 하지만 이종욱은 결국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김명찬은 대답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종욱도 김명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직 총리님이 완전히 무너지신 건 아닙니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김명찬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누가 해결한단 말인가.”
“이 일에 관해서는 대통령 이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잖습니까.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김명찬이 가만히 이종욱을 바라보았다.
“강진호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김명찬이 말없이 텀블러를 들어 커피를 홀짝였다. 한참 동안 텀블러에 채워져 있는 커피를 내려다보던 김명찬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없이 무거운.
“재미없는 농담이로군.”
“농담이 아닙니다.”
“이보게, 이군.”
김명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와 나는 원수네.”
“총리님, 세상에는…….”
“알고 있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원수도 없다는 것.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지. 하지만 말일세,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을 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야. 지금의 내가 강진호에게 무슨 이득을 줄 수 있겠는가.”
“있죠.”
“……뭐라 했는가?”
“있다고 했습니다.”
김명찬의 시선과 이종욱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종욱이 확고한 눈으로 김명찬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총리님이 하실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이종욱의 말투에 독기가 묻어난다.
“어차피 강진호 씨라고 하더라도 총리님께 벌어진 모든 일을 수습하지는 못합니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총리님의 주변이 아닌, 총리님에게 걸려 있는 혐의 정도겠죠.”
“……그렇겠지.”
“그것만으로도 총리님은 모든 걸 잃는 겁니다. 결국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재산과 자유의 몸, 둘뿐입니다.”
김명찬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타인의 말로 듣게 되니 허탈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몸뚱아리라도 기어나가 편한 말년을 보내고 싶으면 강진호에게 머리를 처박고 용서를 빌라는 건가?”
“……총리님.”
김명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났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지 이종욱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 김명찬은 이종욱이 짐작도 못할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다고 그가 나를 용서할 것 같은가?”
“그렇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총리님은 그 대가로 바칠 것이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목숨과 교환할 만한 정보 말입니다.”
“…….”
“억울하시지 않습니까?”
“…….”
“총리님이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총리님은 그저 총대를 멘 것에 불과합니다. 총리님이 강진호를 파멸시키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 과실은 모두가 나눠 먹었겠죠. 하지만 일이 틀어지자 저들은 그 책임을 회피하고 총리님만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아니요. 저들이 총리님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안 그래도 초췌한 김명찬의 얼굴은 그새 몇 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저들의 비리를 밝혀 파멸시킨다면, 총리님은 살아나실 수 있습니다. 강진호 씨 역시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건 거래입니다.”
김명찬은 아무런 대답 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려앉는다.
천장이 내려앉고, 그가 내려앉고, 세상이 내려앉고 있었다.
“전에…….”
“……예.”
“강진호를 설득하려는 이유가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리고 정권이 무너지면 국민이 고통받는 게 싫다고.”
“싫다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당신들의 죄로 그들이 고통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좋겠지. 그럼 왜 지금은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이종욱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저들을 내버려 두고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패해서?”
“…….”
김명찬이 낄낄 웃었다.
“바꾼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 그래도 우리가 정권을 잡을 수 있던 건 야당 놈들보다는 우리가 조금이나마 더 깨끗했기 때문이네.”
“압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기껏 노력해서 더 더러워지는 것 아닌가?”
“저도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어째서?”
이종욱이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더 나쁜 쪽으로 변화하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게 변화하지 않는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놈들보다 조금 더 낫다는 게 모든 것의 면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을 쥔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언제든 파멸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는 법이죠.”
김명찬이 이종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열정을 보고 있자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예전의 내 눈빛도 저랬을까?’
한때는 그에게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김명찬이 지금의 김명찬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김명찬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총리님.”
“얼버무리려는 게 아닐세. 자네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았네. 다만, 이건 자네와 할 이야기가 아니잖은가.”
“…….”
“중간에서 중재를 해보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주제넘지는 말게. 이건 나와 강진호가 해야 할 일이니까.”
“여기서 총리님이 강진호 씨를 만날 수는 없잖습니까.”
“왜 그리 생각하지?”
“…….”
김명찬이 희게 웃었다.
“이보게, 내가 더 잃을 것이 있어 보이나?”
“……예?”
“나는 더 잃을 게 없어. 파멸했다는 소리지. 이제 나는 그저 이 작은 구치소 수형실에서 늙어가겠지.”
“…….”
“모르겠나?”
김명찬의 눈이 서서히 붉어졌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눈의 모세혈관이 터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지옥의 밑바닥에 있네.”
그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네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걸세. 하루하루 내 삶이 파괴되고, 내 영혼이 부서지지. 그리고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네. 살아서 이걸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 것 같나?”
“……이해합니다.”
“이해? 하, 하하!”
김명찬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의 눈에 들어찬 광기를 보며 이종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네는 이해 못하지. 지옥에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아나? 이 상황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내 발로 웃으며 대공분실로 걸어 들어갈 수 있어. 평생을 증오해 온 고문기술자, 그 인간 백정 놈과 웃으며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일세.”
“총리님…….”
이종욱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내가 왜 아직 살아 있는 줄 아나?”
“…….”
“곧 그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일세.”
김명찬의 표정은 도무지 이 세상의 말로는 형용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감정을 그 얼굴에 모두 담은 듯, 김명찬이 낮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 오겠지, 곧. 여기가 지옥이니까. 내가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면 온다고 했으니까. 흐흐, 흐흐흐…….”
이종욱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김명찬의 낮은 웃음소리와 이종욱의 낮은 숨소리만이 방 안을 낮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