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27
#1426.
미국 가다 (1)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언제나 시작은 미약하다. 하지만 끝은 창대한 게 아니라 그냥 끝도 없이 커진다.
‘이게 다 몇 명이야?’
비행기를 타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보육원 아이들만 서른에 가까운데, 거기에 위긴스를 비롯한 마법 병단들이 합류했다. 그러다 보니 얼핏 봐도 오십에 가까운 대인원이 만들어졌다.
‘결승 한 번 보러 가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많은 인원을 무리 없이 미국까지 갈 수 있게 만든 스스로가 대견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항공사에 이럴 때 쓰는 100석 규모의 전세기가 따로 있어서 좌석을 재배치한다고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다는 점이다.
일이 꼬였으면 이코노미석을 뜯어내고 비즈니스석을 설치한다고 개고생을 해야 했을 테니까.
물론 이현수가 아니라 항공사가.
여하튼 어떻게든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미국에 가서 할 일이 더 생기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냐고 하니!
“비행기다!”
“조용 좀 해! 쪽팔리게!”
“왜? 신기하잖아!”
“비행기 처음 타보냐?”
“응. 오빠는 타봤어?”
“……아니. 나도 처음이지.”
수학여행이 따로 없다.
보육원 아이들은 그냥 비행기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현수가 흐뭇하게 웃었다.
‘사람이 이 맛에 고생하는 거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보니 피로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미국 가니까 좋니?”
이현수가 넌지시 묻자 아이들이 해맑게 웃었다.
“아뇨. 학교 안 가서 좋아요.”
“…….”
“한 이틀 더 빼먹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요즘 애들은 만만치 않구나.
아니, 나도 저랬나?
한진성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이거, 떨어지는 건 아니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오빠! 안 그래도 재수하는 사람이라 찝찝한데.”
“여기서 재수가 왜 나와!”
“재수 없는 소리 하니까 그렇지!”
한진성이 침울한 얼굴로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공부 빼먹고 미국에 가는 판이라 미묘한 죄책감이 있는데, 그걸 지적당하자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번에는 꼭 대학 갈 거야. 아메리카의 정기를 받아서.”
“네. 변명 잘 들었구요. 자.”
“뭔데, 이거?”
“뭐긴 뭐야, 책이지. 내가 오빠 비행기에서 심심하지 말라고 참고서 챙겨 왔어. 공부해.”
“…….”
사탄도 이러지는 않겠다, 사탄도!
악마가 따로 없네, 진짜.
보육원 아이들이 모두 타는 것을 확인한 한진성이 한숨을 쉬며 비행기로 올랐다.
‘그래도 진호 형 덕분에 신기한 경험 하네.’
미국을 가볼 일이야 나중에도 있겠지만, 설마 보육원 아이들이랑 같이 단체로 미국을 가볼 줄은 몰랐다.
‘저 형은 통이 너무 커.’
보육원 시설이 별로라고 보육원 뒤집어엎어서 새로 세울 때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맙지 않다는 게 아니라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애들 공부하라고 학원 올리고, 거기에 잘나가는 1타 강사들 다 불러서 강의시킬 때는 이게 좀…… 뭐랄까, 투자 대비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이제 경기 보러 간다고 애들을 단체로 비행기에 실어버리고 있다. 그것도 전세기를 불러서.
스케일이 일반인과는 삼만 광년쯤 벌어져 있다.
‘이게 돈지랄인데.’
강진호가 하는 돈지랄이 딱히 꼴사나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돈이 자신을 위해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날 후줄근한 옷이나 입고.’
한진성이 강진호였으면 백화점에서 살았을 텐데. 명품관 직원이 300미터 밖에서 발견하고 무릎걸음으로 현관까지 뛰쳐나오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한진성이 강진호가 아니라서 문제지.
“또 무슨 잡생각을 해! 빨리 올라가!”
“끄으으응.”
조미혜에게 타박을 받은 한진성이 한숨을 푹푹 쉬며 비행기로 올라갔다.
귀신은 뭐 하나, 얘 안 잡아가고.
최근 조미혜는 말 그대로 막을 사람이 없는 보육원의 독재자로 진화해 버렸다.
한진성이 자립관으로 옮기고, 박유민이 대회 때문에 보육원에 자주 들르지 못하고, 강진호도 드문드문 보육원에 얼굴을 들이밀다 보니, 보육원의 모든 권력이 조미혜에게 집중됐다.
애초에 중학생 때부터 같은 나이 대 남자들 다 씹어 먹고 중딩 최강의 전설을 쓴 조미혜다 보니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그 누구도 조미혜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남자 원생들이 힘을 합쳐 대항해 보려 했지만, 시도도 하기 전에 진압을 당하고는 분루를 삼키는 중이었다. 애초에 한진성이 고3일 때도 조미혜에게는 깝치지 못했으니, 지금이야 오죽하겠는가.
‘불쌍한 놈들.’
최근 한진성이 가장 감사하는 건 조미혜보다 그래도 일찍 태어났다는 것이다. 오빠 소리 들으면서도 이 꼴을 당하는데, 조미혜보다 어린 애들은 오죽하겠는가.
비행기에 오른 한진성을 승무원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 네. 혹시 여기…….”
“신발 벗고 타냐고 드립 치면 던져 버릴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조미혜의 목소리에 한진성이 입을 꾹 닫았다.
‘애가 유우머가 없어, 유우머가.’
사람이 개그를 통해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하는데!
하지만 승무원들도 그런 개그를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듯 조미혜를 향해 눈인사로 감사를 표한다.
……그냥 들어가야겠다.
개드립 욕심을 버려야지.
“이쪽입니다.”
승무원이 안내하는 대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 한진성이 입을 벌렸다.
“와, 비행기라는 게 원래 이렇게 좌석이 넓은 거야? KTX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이래서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는구나.”
조미혜가 달아오른 얼굴로 한진성의 등을 꾹꾹 찔러 댔다.
“제발 말하지 말고 그냥 가서 앉아. 제발!”
“왜? 넌 안 신기하냐?”
“비즈니스석이라 그런 거잖아! 알았으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마. 보육원의 체면과 사회적 위상도 제발 좀 고려를 하고!”
“…….”
아니, 뭔 사회적 위상까지 나오나.
억울함을 성토할 시간도 없이 등을 밀어 대는 조미혜에게 떠밀려 한진성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만 신기해하는 것도 아니구만!’
그냥 신기해하는 것과 그 신기함을 사방팔방에 광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모르는 한진성이었다.
“여기 앉아. 어서.”
“응.”
한진성이 자리에 앉자 조미혜가 그 옆에 앉았다.
“너는 왜 여기 앉아?”
“그럼 어디 가라고? 앞쪽에는 진호 오빠 앉을 거잖아. 그럼 내가 여기 앉아야지.”
“…….”
거, 뭐 틀린 말은 없는데, 이상하게 껄끄럽네.
하지만 조미혜의 말에 집중할 시간은 없었다. 이내 아이들이 한진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형! 형! 이거 자동이야! 버튼 누르면 의자가 누워!”
“…….”
“이거 위에서 에어컨도 나온다? 신기하지 않아?”
그제야 한진성은 조미혜가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했다. 막 한진성이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앞쪽에서 한 사람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조용히 해야지. 승무원 언니들이 힘들어하잖아. 니들도 돈 받고 일해봐라. 어린놈들이 땍땍대는데 한마디도 못하는 게 얼마나 속 시끄러운 일인지 알게 될 테니까.”
“언니!”
“언니이이이이!”
조미혜와 여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연하가 선글라스를 벗고 웃으면서 미소를 짓는다.
“미국 간다고 꾸미고 온 것 봐. 얘들 신났네.”
“언니, 같이 가시는 거예요?”
“우린 이야기 못 들었는데. 언니랑 같이 가면 두 배는 재밌겠다!”
아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최연하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래서 내가 여기가 좋다니까.’
여기의 아이들은 스타인 최연하가 아니라 인간 최연하를 좋아해 준다. 스타인 최연하를 좋아해 주는 팬들을 차별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래도 편함의 정도가 다르다.
일단 얘들 앞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뭐니? 니들 그렇게 입고 미국까지 가려고?”
나름 한껏 꾸민 모두를 보고 최연하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여행이니까 예쁘게 입으려구요.”
“음, 좋은 생각. 그런데 이거 비행기가 열네 시간 정도 갈 텐데, 괜찮겠어?”
“그렇게나 오래가요?”
“미국이 좀 멀단다. 내가 그럴 줄 알고 트레이닝복 준비해 왔지. 은솔아, 애들 하나씩 나눠 줘.”
“……왜 고생은 제가 하는데, 누나가 생색내시는 것 같죠?”
“돈을 내가 냈으니까.”
“아…….”
그렇지. 돈이 최고지.
최연하가 싱긋 웃었다. 비행기에 잠옷이 준비가 되어 있긴 하지만,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민망하다. 그리고 애들에 따라서는 호텔에서 입을 편한 옷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사이즈별로 다 사버렸다.
아이들이 옷을 나눠 가지는 모습을 보며 한진성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부창부수지.’
통 큰 걸로 따지면 최연하도 강진호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통으로 따지자면, 최연하가 더한 건지도 모른다. 강진호는 돈을 써야 할 때 크게 질러 버리는 타입이지만, 최연하는 돈을 안 써도 되는 곳에 ‘으아아아’ 하고 질러 버리는 타입이니까.
아이들이 옷을 나눠 가지는 것을 본 최연하가 미간을 좁혔다.
“야! 여기서 옷 벗지 마! 어디서 살덩어리를 드러내! 이따 이륙하고 화장실 가서 갈아입어!”
“예! 누나!”
“예! 언니!”
교육이 참 잘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최연하가 미간을 좁혔다.
“필요한 거 있으면 승무원 언니들에게 이야기해. 그런데 귀찮게 해드리면 안 된다. 알았어?”
“예!”
최연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내 이현수가 총회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와 앞쪽으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안에 들어온 강진호가 앞쪽과 뒤쪽을 번갈아 보다가 최연하와 눈이 마주치고는 슬그머니 뒤로 들어온다.
아무래도 총회 사람들과 앉아 가기에는 최연하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강진호가 다가와 옆에 앉자, 최연하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사람이 눈치라는 게 생겼네요?”
“살아남으려고 애쓰다 보니…….”
“쓸데없이 뒷말 붙이는 거에서 1점 감점.”
“…….”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합격점 줄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강진호 씨, 미국 처음 가보죠?”
“네.”
“그렇겠다.”
“최연하 씨는 몇 번 가보셨어요?”
“아, 당연하죠. 저는 영화제나 이런 것 때문에 여러 번 가봤어요.”
“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
“하나도 모르는데요?”
“…….”
“돈 주고 통역 쓰면 되지, 뭐 하러 그런 어려운 거 배워요? 저는 괜찮아요.”
언젠가는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게 꿈인 배우의 당당한 선언이었다.
지적하고 싶은 게 여러 개 있지만, 강진호는 평화를 위해서는 때로는 말을 삼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미국이라…….’
강진호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리 좋은 일은 없던 것 같지만, 이번에는 별일 없겠지.
강진호가 빙긋 웃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