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30
#1429.
미국 가다 (4)
[예. E스포츠의 레전드가 지금 입장을 하고 있습니다. E스포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죠? 갤럭시의 지배자였던 박유민, SS_Chaser가 지금 입장합니다.] [환호가 장난이 아니네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캐스터께서도 조던이 다시 돌아와 농구를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빤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바로 불스의 표를 구매해야죠.] [E스포츠 팬들에게는 SS_Chaser가 바로 그런 존재죠. E스포츠의 조던. 하지만 살짝 올드한 조던이죠. 많은 사람들을 SS_Chaser가 활약하던 시대는 지금처럼 E스포츠가 활성화된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레전드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인기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적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미국에서조차 말이죠.] [레전드에 대한 예우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법이죠. 이곳에 모인 미국 팬들은 대부분은 북미팀이 이기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SS_Chaser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지는 않을 겁니다.]아니나 다를까, 아나운서의 말과 함께 박유민의 아이디를 외치는 챈트가 이어졌다.
그 함성이 얼마나 컸는지, 뒷사람의 입장이 지연될 정도였다.
“와! 유민이 형 인기 많구나!”
“그러게. 진짜 인기가 많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여기서 인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미국 애들은 화끈하네.”
보육원 아이들의 반응을 들으며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한국보다 여기의 반응이 더 크게 느껴졌다. 문화의 차이인지, 아니면 예우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즐길 줄 아는 거야.”
최연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그러면서 노는 거지. 한국도 콘서트장은 그렇잖아.”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요.”
“……언니가 미안하다. 꼭 데리고 갈게.”
강진호도 최연하의 말에 동의했다. 한국은 승패가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승패보다는 그저 이 결승을 즐기겠다는 마음이 강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문화가 한국보다 뛰어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차이는 확실해 보였다.
[하하하, 그렇죠. 제가 하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왜 박유민의 아이디가 추적자라는 의미를 가지냐는 겁니다. 박유민 정도 되는 레전드라면 포식자나 사자 정도는 붙여줘야 할 텐데 말이죠. 예전에는 SS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있었죠. ‘길드명이다’부터 시작해서. 하지만 다 틀린 걸로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본인이 아직 말하지 않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죠. 혹시 압니까, 오늘 우승하게 되면 그 의미를 들을 수 있을지.]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박유민의 아이디 앞에 붙는 SS의 뜻은 별게 없다. 그냥 성심의 약자다.
박유민이 프로로 입단하면서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경기한다는 의미로 앞쪽에 성심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추적자의 의미도 별게 없다.
[너, 쫓아갈 거야.]‘바보 같기는.’
누가 누굴 쫓는단 말인가. 지금은 되레 강진호가 박유민을 쫓아야 할 판이다.
“유민이 형, 엄청 긴장한 것 같은데?”
“……저 형, 얼굴 썩었어.”
“원래 썩어 있잖아.”
“방금 누구야? 자수해. 담가 버릴 테니까.”
“죄송.”
강진호가 박유민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부산 때보다 컨디션이 더 안 좋아 보인다.
아이들도 그걸 느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유민을 향해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박유민은 이쪽의 아이들을 발견 못했는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무대에 서본 경험이 많은 최연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명을 저렇게 쏴대면 관객이 안 보여. 아마 지금 보이는 건 하얀 빛뿐일걸? 아무리 손 흔들어도 안 보여, 얘들아.”
“아, 그럼 미리 만났어야 하는데…….”
“형, 유민이 형 잘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불안한 물음에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잘 못해도 돼.”
“응?”
“꼭 이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이왕이면 이기면 좋지.”
물론 그 말에는 강진호도 동의한다. 패배한다고 해도 박유민을 보는 그들의 시선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
그동안 한 노력을 생각해서도, 박유민의 커리어를 생각해서도 여기까지 왔으면 이기는 게 좋다.
강진호가 박유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겨라.’
* * *
‘아무것도 안 보이네.’
박유민이 멍하게 앞쪽을 바라보았다. 쏘아대는 조명 때문에 눈이 아프다.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사람이 온 것 같은데, 괜히 인파를 눈으로 보기라도 했다면 질려 버렸을 것이다.
“집중하자.”
박유민이 막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려는 순간,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뭐라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통역이 재빨리 동시통역을 시작했다.
“E스포츠의 레전드로서 마침내 최고의 무대까지 올라오셨는데요. 감상이 어떤지, 그리고 이 결승에 임하는 각오를 부탁드립니다.”
박유민이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팀원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뜬 박유민이 조금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가 레전드라 불리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팬분들께서 좋게 봐주셔서 가능했던 호칭이죠.”
이건 솔직한 박유민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박유민이 단호한 얼굴을 한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 그리고 보육원의 아이들. 아마도 지금쯤 다 TV 앞에 모여 앉아서 그를 응원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 그에게 하고 있을 말도 알 것 같다.
― 당당하게.
그래, 당당하게.
“오늘 이 자리에서 이기고 진짜 레전드라는 호칭을 얻어 가겠습니다. 살아 있는 레전드라는 호칭을요.”
통역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말에 흥분한 건 보육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아아! 유민이 혀어어어엉!”
“저 형이 웬일로 멋진 소리를! ‘그냥 열심히 하겠습니다’나 할 줄 알았는데!”
“죽여! 죽여! 다 죽여 버려!”
“야, 저 새끼 말려라. 흥분했다.”
최연하가 휘파람을 불었다.
“유민 씨가 저런 말도 할 줄 아네요?”
“사람은 계속 성장하니까요.”
강진호가 박유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자신감이 없을 이유도 없지.
쌓아왔으니까.
강진호만 싸워온 게 아니다. 강진호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싸워왔다. 박유민 역시 자신만의 전장에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가 가진 재능이 유별났다지만, 한계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면 절대 여기까지는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박유민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미리 만날 필요 같은 건 없지.’
강진호가 도와주지 않아도, 컨디션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지 않아도, 이제 박유민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승리에 불순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박유민이 말을 하고 나서 겸연쩍은 표정을 짓자, 진행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상대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겠다는 건가요?”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질문이다. 박유민도 통역을 듣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얼굴을 굳혔다.
“가르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E스포츠계에서 아직은 제가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보육원 아이들이 박수를 친다.
“미쳤다. 유민이 형 오늘 미쳤어!”
“저 사람이 만날 카레만 하는 사람이라니!”
“그게 여기서 왜 나와?”
“여하튼 멋있잖아!”
“그건 인정합니다.”
강진호조차 뭔가 흥분되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살면서 박유민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오늘 유민 씨 건방 좀 떠네? 너무 좋은데?”
박유민에게 항상 부족하던 게 자신감이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지금 이 순간 폭발하고 있었다.
진행자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추임새를 넣었다.
“와우, 정말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럼 이어서…….”
인터뷰가 뒤로 넘어가자 박유민이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듯 얼굴을 주물러 댄다. 하지만 역으로 그의 안색은 입장할 때에 비해서 훨씬 풀려 있었다.
강진호의 뒤쪽에 앉은 이현수가 작게 속삭였다.
“이런 데는 처음 와보는데, 이거 뭔 투기장 같은 느낌이 드네요. 분위기도 엄청 살벌하고.”
“나도 처음에는 그 생각 했어.”
“……이거 재밌을 것 같은데, 총회에도 도입할까요? 투기장 만들어서 애들끼리 싸우게 하고, 내기도 걸게 만들면 부수입이…….”
“너는 게임 끝날 때까지 입 열지 마.”
“…….”
이현수의 난을 간단히 제압한 강진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유민 씨 엄청 부럽네요.”
“네?”
“이 많은 사람들이 유민 씨가 경기하는 걸 보러 여기에 온 거잖아요. 미국인데도. 나는 명함도 못 내밀겠어.”
강진호가 그 말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박유민은 이미 스타다.
예전부터도 스타였지만, 지금은 정말 위상이 말도 못할 정도로 올랐다.
“다시 해보려고. 내가 잘하는 게 게임이니까, 종목이 바뀌어도 나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죽을 각오로 노력해 보려고, 쉽지는 않겠지만.”
강진호의 입꼬리가 자꾸 말려 올라간다.
이상한 기분이다.
친구들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지만, 친구의 일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진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승패가 어찌 되든 박유민을 업어 들고 ‘이 사람이 내 친구다!’라고 사방에 소리치고 싶다.
자랑스러운 친구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경기 시작하는 모양인데?”
“유민이 형 잘 봐! 헤드폰 거꾸로 쓴 거 아닌지!”
“아니! 아까부터 어떤 새끼가 중간에 자꾸 악담 넣어! 자수해!”
“형이다! 인마!”
“……진성이 형, 형이 자꾸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뭘 어쨌…… 아아아악! 아악!”
조미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강진호조차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좀 맞아야 돼.’
여하튼 한진성이 정리되자 모두가 손을 덜덜 떨며 무대를 바라봤다. 중앙에 있는 거대한 화면에 선수들의 얼굴이 하나씩 잡힌다.
채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경기가 시작되자, 강진호가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박유민이다. 그리고 이 결승은 박유민의 노력을 평가받는 자리다.
그저 응원하고 박수를 치는 것 외에 할 게 없는 강진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돼요?”
최연하의 물음에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른 사람들이 강진호 씨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에요.”
“…….”
뜬금없이 날아온 돌직구에 강진호가 움찔했다.
“오늘 벌 좀 받아야 돼. 경기 엄청 오래갔으면 좋겠다.”
“…….”
할 말이 없어진 강진호가 최연하의 시선을 외면하며 화면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이 정말 이 기분으로 강진호를 보고 있다면, 앞으로는 조금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