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38
#1437.
회담하다 (2)
어디선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교육이 잘됐군.’
이현수가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총기로 무장한 병력이 밖에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도 미국에서는 나름 실력파라 불리는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강진호의 말에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는다.
아마 어떤 일이 있어도 강진호를 도발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무인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를 이현수가 아니었다. 무인은 기본적으로 오만하고 호승심 가득한 존재. 아무리 짓누르려고 해도 짓눌리지 않는다.
‘무인이라기보다는 군인이라……. 그 말이 딱 맞군.’
저들의 반응은 확실히 군인의 그것이다.
이현수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강진호가 화가 난 시점에서 입을 다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서 그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원래 있던 동맹을 파기하고 이쪽으로 붙으라는 건, 그들과 척을 지라는 뜻 아닙니까?”
이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감안했을 때, 저들이 어찌 나올지는 빤한 일. 거기에 주둔군까지 받아들인다면, 우리더러 중국을 막을 방파제 역할을 하라는 건데…… 사람을 호구로 보는 것도 아니고, 잘도 그딴 소리를 면전에서 지껄이는군요.”
이현수가 낮게 일갈했다.
“그 합리성이라는 건 당신들의 입장에서만 발휘되는 것 같은데, 그런 이들과 친구가 되라니…… 그거 굉장한 관계군요.”
윌리 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그런 의도로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이현수.”
“예, 회주님.”
“가자.”
“예.”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윌리 리스를 바라보았다.
“의도가 뭐였든, 그렇게 말을 해버린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죠.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당신들의 상관을 불러오십시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나?”
이현수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미 다 들었을 테니, 본인이 결정하겠죠.”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의식적으로 한곳에 시선을 주지 않는 것도 좋은 대처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들 생각 이상으로 그런 것에 민감한 법이죠. 딱히 숨길 건 없어서 제지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현수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다음에도 도청기를 가져오실 거면 장착한 부분이 잘려 나갈 각오는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그럼 이만.”
이현수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윌리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령님.”
“아아.”
부관이 다가오자 윌리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이 정도까지는…… 음…….”
그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우선은 탐색 정도겠지.’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알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단 사건을 던져 보는 것이다.
극단적인 반응이 나오는 일일수록 그 효과는 좋다.
“도청기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서 다행이로군. 나는 카메라까지 다 들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눈치챘을까요?”
“상관없지.”
이미 데이터는 전송되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강진호와 이현수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윌리가 던진 말에 대해 그들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어떤 타입이고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을 낱낱이 분석할 것이다.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나만 하겠나.”
윌리가 의자에 한껏 등을 기대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죽는 줄 알았네.’
저 강진호와 마주 앉는다는 것은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윌리의 입장에서도 공포를 느낄 만한 일이었다.
기존의 정보로 분석한 강진호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
행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고, 분노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없다.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라고는 기껏해야 한 번 분노했을 때는 뒤도 보지 않고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화를 낼지 모르는 이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잘못 화나게 만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긴장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존 팩터는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기지로 돌려보내.”
윌리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끌려 나가느라 고생 좀 했을 텐데, 도넛이라도 하나 사 주지. 돼지가 좋아하겠지.”
“나름 연기를 잘하던데요.”
“그것만 몇 십 년을 하던 사람인데, 당연히 잘해야지. 이왕이면 그 짓이 먹혔으면 좋았겠지만.”
윌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강압이 안 먹히는 상대라는 걸 파악했으니, 그걸로 된 거지. 아쉬운 일이야. 조금만 늦게 왔어도 연금 수령자가 되었을 텐데.”
“본인이요, 아니면 와이프가요?”
“당연히 와이프 아니겠나. 남 좋은 일은 안 하는군. 애석해.”
그때였다.
벌컥!
문이 확 열리더니 이현수가 안으로 한 발 들어온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윌리를 바라보았다.
윌리가 얼굴을 굳히고 이현수를 마주 봤다.
‘설마 다 들었나? 아니, 그렇다면 보고가 왔을…….’
“거기.”
이현수가 윌리를 가리키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차 한 대 빌려주시죠.”
“…….”
“이왕이면 네비게이션도. 아까 그놈 차를 얻어타고 왔거든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
어쩌면 이놈들을 상대하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윌리였다.
* * *
“접촉했다고?”
위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위긴스가 이현수의 양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아니, 애들 배웅하러 간다더니! 그새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지, 진정하십시오! 별일 없었습니다.”
“별일이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놈들의 방식이 로드의 마음에 들 리가 없어.”
“중간에 미친놈이 하나 끼어들어서 그렇지, 나름 정중하던데요?”
“미친놈?”
위긴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제대로 설명을 해보게, 제대로!”
“아,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현수가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든 설명을 다 들은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고는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짜고 쳤군.”
“……그런 기미가 좀 보이기는 했는데.”
“아마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갔으면 두 번째 놈까지는 등장하지 않았겠지.”
“역시나?”
위긴스가 쓴웃음을 짓는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확률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놈들의 수작질이라 생각하는 게 나을 걸세. 괜히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말이야.”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국이 잘 쓰는 방식이지. 사실 미국은 외교에 있어서는 대책이 없는 국가 중 하나일세. 무척 온건한 신사인 척 굴다가 갑자기 미치광이처럼 돌변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대고, 다시 신사인 척을 반복하지.”
“……역할 분담을 한 모양이네요.”
“아마도.”
“그 새끼들이…….”
이현수가 이를 갈자 위긴스가 피식 웃었다.
“기분 나빠 할 것 없네. 어쨌든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 만든 것은 칭찬해 주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회주님이 덜 열 받은 것뿐이죠. 거기서 조금 더 나갔으면 곡소리 났을 겁니다.”
“흠.”
위긴스는 아무래도 그것보다는 다른 곳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미군을 주둔시키고 싶다고?”
“예. 그렇게 말하더군요.”
“원탁에 요구하던 것과 다르지 않군.”
위긴스가 턱을 쓸어내렸다.
‘대상은 달라지지만, 패턴은 달라지지 않는군.’
결국 미국이라는 국가가 원하는 것은 전 세계에 대한 영향력의 강화다. 그들의 자금력이, 그들의 무력이, 그리고 그들의 권력이 미치는 곳을 넓혀가는 것. 그게 미국의 목적이고 행동 원리였다.
다만, 원탁과 협상을 할 때보다 몇 배는 조심스럽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위긴스는 이 부분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총회의 위상을 실감했다. 물론 지정학적인 위치라든가,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나온 결과겠지만, 그 모든 조건도 총회가 힘이 없었다면 애초에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흐음.”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만.”
“그래?”
“예.”
이현수가 살짝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헤어지는 모양새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제안 자체는 받아 들일 만해 보입니다. 어쨌든 지금 총회도 삼왕계의 존재를 큰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잖습니까?”
“그냥 까놓고 말하게.”
“삼왕계가 무서워 죽을 것 같습니다.”
“……너무 깠군.”
정도를 모르네, 정도를.
이현수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저놈들이 지들끼리 처 싸운다고 이쪽으로 시선을 못 돌리고 있는 것뿐이지, 막상 저놈들이 생각이 바뀌어서 일단 한국부터 정리하자고 해버리면 우리만 박살 나는 것 아닙니까.”
“벌어지기 힘든 일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죠.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원탁과도 동맹을 맺은 거구요.”
“음…….”
위긴스가 침음을 흘렸다.
“무인계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은 바깥세상에서 미국이 가지는 영향력을 능가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영향력은 그렇다 치고, 가진 힘이라면 정말 미국보다 강할지 모릅니다. 삼왕계가 연합한다면 전 세계의 무인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잖습니까?”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
“그럼 편을 늘려야죠. 혹여 그런 일이 벌어져도 대항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위긴스가 심드렁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자네의 생각은 잘 알았네만, 이만큼 큰 일에 있어서 자네의 생각은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게 문제군.”
“…….”
“로드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시든가?”
“글쎄요.”
이현수가 머리를 긁었다.
“영 마음에 안 들었으면 다 잡아 죽이셨을 거고, 마음에 드셨으면 어쨌든 대화는 계속하셨을 것 같은데, 그냥 박차고 나와 버리신 거라 저도 딱히 뭐라 평을 하기가…….”
“미묘하신 모양이군.”
위긴스가 슬쩍 위쪽을 바라보았다. 위층에서는 아마 강진호가 쉬고 있을 것이다.
‘그만한 일을 그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었겠지.’
저들의 권한도 애매하고 말이다.
“어떻게 합니까? 제가 한 번 설득을…….”
“아무것도 하지 말게.”
“……예?”
“자네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몰라. 저들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네.”
“그럼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
위긴스가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들이 해야 할 일은 로드께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 좋은 협의를 이끌어내는 걸세. 그런데 위협이라니.”
“아…….”
이현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내일부터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겠지.”
거기까지 말한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만, 그것도 로드께서 회가 동했을 때의 이야기겠지.’
미국이라는 나라는 위긴스에게도 아직 미지의 국가다. 무인계에서 이들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여행에서 그걸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쁜 쪽은 아니어야 할 텐데.’
위긴스가 한숨을 쉬고는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로드께서는 내일 다시 회담을 하시려는 건가?”
“아뇨. 데이트 간다는데요.”
“……응? 뭐?”
“디즈니랜드라나, 유니버셜 뭐라나. 여하튼 여기저기 가보신다던데.”
“…….”
동아시아의 운명보다 데이트라…….
‘이래도 되는 걸까?’
도무지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위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