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76
#1475.
종결짓다 (5)
“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한은솔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미스 최와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네? 정말요?”
한은솔이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저쪽도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굳이 여기로 전화를 해서 장난칠 이유가 없다. 알고는 있지만, 너무 놀라워 되묻고 만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한은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그렇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급하게 대본을 찾다 보니 최연하에게 딱 맞는 배역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이건 되겠다 싶은 배역에 밀어 넣은 게 최선이었다.
아마 배역을 바꾸자는 말이 나오겠지.
문제는 그 바뀐 배역이 최연하의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다.
‘아니, 내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겠지.’
최연하는 완전히 신인의 자세로 임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도 그럴 사람이다. 완전한 단역이라 얼굴만 한 번 나오고 만다고 해도 거절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한은솔은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도 최연하라고.’
평소에야 최연하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 한은솔이지만, 그건 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까도 한은솔이 까야 한다. 다른 이들이 최연하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절대 받아줄 수 없는 한은솔이다.
“그 조건이라는 게 뭡니까?”
[배역을 바꾸고 싶습니다.]‘그렇겠지.’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 나왔다. 그럼…….
“실례지만, 어떤 배역으로 바꿀 계획이신지?”
[기본적으로 저희 쪽에서 판단하기에 최연하 씨가 응시한 배역은 최연하 씨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디션 영상을 본 작가진과 감독의 회의 결과, 차라리 새로운 배역을 하나 만드는 게 낫다는 말이 나왔습니다.]“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새로운 배역?
시작은 맞아떨어졌는데, 결과가 조금 달라지고 있다. 한은솔이 가만히 휴대폰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막고는 최연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새 배역 만들어준다는데요?”
“응? 왜?”
“글쎄요…….”
“왜 그러는 건지 물어봐.”
한은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지만, 그런 판단을 하신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사실 오디션에 응시하신 연기만으로는 대단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인상을 받은 건 그다음입니다.]“네? 그다음요?”
[예. 즉흥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최연하 씨가 짜증을 내며 오디션장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텝 중에 한국인이 있어서 확인해 보니, 과거 몇몇 배역 중에 그런 스타일의 연기를 한 적이 있더군요. 영상을 확인해 보고 굉장히 큰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어, 그러니까…….
이거, 오디션은 개판쳤는데, 그 개판 친 다음에 사람이 빡쳐 하는 모습이 쩔었다는 소리 아닌가.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이, 이해가 조금 어려운데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찾던 스타일이니까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여성은 스테레오 타입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 시도해 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악녀라는 거네, 악녀.
‘그거라면 기가 막히게 잘할 수 있지.’
평소 하는 짓의 반만 스크린에서 보여줘도 메소드 연기로 화제가 될 것이다. 잘하면 어디서 연기상 하나 정도는 않게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와, 이게 이렇게 되네?’
생각지도 못하게 굴러 들어온 행운에 한은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비중은 어떻게 됩니까?”
[주연급으로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분량은 세 손가락 안에 들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정확한 건 수정된 각본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말이죠.]“각본 수정은 그럼…….”
[그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미스터 한. 새로운 배역이라고는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존에 있던 배역을 여성으로 바꾸고 대사와 행동을 수정하는 정도니까요. 기존 각본에서는 비중이 상당한 배역입니다.]“아, 그럼 문제가 없겠네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존 각본에서 어떤 배역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개인 대본을 따로 보내 드리죠. 수정이 끝나지 않은 각본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답변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각본 보고 나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군요.]“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한은솔이 진이 빠진다는 듯 소파로 무너졌다.
“뭐래? 뭐래? 왜 하자는 건데?”
하지만 아직 난관은 끝이 나지 않았다.
‘누나가 빡쳐 하는 모습이 표독스러워서 악녀로 쓰기 딱 좋아 보여서요.’
……라고 있는 그대로 말을 한다?
에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다는데요. 그동안은 동양인 여성이 너무 스트레오 타입으로 소모되어서 이번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고 싶었나 봐요. 그러던 중에 누나 오디션 본 거 보고는 발탁했대요.”
“……그렇게 개발새발로 연기했는데?”
“그, 그 정도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누나 기준이 너무 높은 거죠. 애초에 이게 뭐 예술 영화도 아니고, 블록버스터인데 연기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하기야 내가 같은 배우로서도 보기에 불편한 애들 많더라.”
“그렇다니까요.”
한은솔의 등으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내가 발음이 영 안 좋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데?”
“하.하.하. 동양인이 영어 못하는 게 이상할 게 없죠. 오히려 그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한데…….”
한은솔이 살짝 의심스러워하는 최연하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좋은 일이 생겨도 문제라니까.’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있다. 조금만 사실을 비틀면 모두가 행복해지는데, 굳이 진실을 말해서 찝찝함을 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쪽 사람들도 미리 입단속해 둬야겠네.’
여하튼.
계기가 뭐가 되었든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은 겨우 중국에나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사실 해외 진출의 진정한 목적은 역시나 미국 아니겠는가.
돈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배우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는 것! 이건 명예의 문제였다.
물론 한국 작품으로도 얼마든지 세계 시장에 나설 수 있다. 이제는 한국 영화가 해외에서 상을 받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최연하 역시 꾸준히 작품성이 있는 영화에 출현하고 있었으니, 이대로만 가도 언젠가는 세계 시장에 얼굴을 들이밀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지도가 아니라 상품성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남는 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연기파 타이틀이 아니라 팔리는 배우가 되는 것.
‘누나는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것도 좋은 일이다.
배우는 작품성과 연기력에 치중하고, 매니저는 상품성에 치중하는 것.
어쩌면 이게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기존 배역 하나를 동양 여자로 수정할 계획인 모양이더라구요. 배역 신이 표시되어 있는 개인 대본을 보내주기로 했어요. 받으면 바로 출력해서 확인하죠.”
“그래?”
최연하의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그럼 할리우드 애들이 기존 배역을 바꿀 정도로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네?”
“그, 그렇죠.”
틀린 말은 아니다. 저건 백 프로 맞는 말이었다. 물론 최연하가 생각하는 방향성과 그들 생각하는 방향성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니까.
“그럼 이거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 확답 안 했어요. 일단 대본 보고요.”
“대본 보고 이상한 역이면 거절할 거야?”
“……어?”
아니지.
이걸 어떻게 거절하나.
남들은 어떻게든 배역 하나 따보려고 난리를 치는데, 저쪽에서 알아서 배역 만들어준다는데 그걸 걷어찬다?
“그건 아니죠…….”
“이건 받아야지. 그런데 대신에 조건 하나 더 걸어.”
“어떤 조건요?”
“출현료 안 받아도 되니까, 대본 수정할 권한 달라고 해. 이상한 대사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등신 한국인으로 영화 나갈 생각 없어. 수정된 각본 안 보고 계약하면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아…….”
한은솔이 아차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사소한 걸 놓치다니.’
한국에서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거절했을 것이다. 굳이 최연하가 아직 각본도 완성되지 않은 영화의 출현을 결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할리우드라는 말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최연하가 흥분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실제로 흥분하고 있던 건 한은솔이었다.
‘반성해야지.’
“제가 조금 성급했네요. 그건 제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게요.”
“꼭 확인해.”
최연하가 눈을 찌푸렸다.
해외 영화에서 동양인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나오는 영화가 꽤 있다. 배역이 나쁜 역할인 것과 동양인이 나쁘게 나오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지들 영화 지들이 만든다는데 거기다가 바른 소리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거기 한 팔 거들 수는 없잖아.”
“예, 누나. 그런데 출현료는 받으셔야 돼요.”
“각본만 이쁘게 해주면 무료로 출현할 생각도 있어.”
“아니요. 그러시면 안 돼요. 그럼 누나 다음에 할리우드 가는 애들은 다들 싸게 쓸 수 있다는 소문이 돈다구요.”
“어…… 어? 그것도 그러네.”
이번에는 최연하가 아차하는 얼굴을 했다.
최연하야 영화 한두 편 정도 돈 안 받고 출현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열정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누군가의 열정 때문에 다른 이들이 열정을 강요받는다면, 그 열정은 바른 열정이라 할 수 없다.
“어렵다.”
“그러네요.”
두 사람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깁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건 너무 급작스러운데.”
“그렇지?”
아직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거 봐.”
“뭐가요?”
“진호 씨 따라 다니면 알아서 콩고물이 떨어진다니까?”
“……이번에 회장님이 하신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왜 없어? 우리를 미국으로 데리고 왔잖아.”
“…….”
어,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틀린 부분은 없다. 강진호가 아니었다면 미국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오디션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런 행운도 없었겠지.
아직은 완전히 결정 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협상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게 강진호 덕이라는 건…….
‘거참, 미묘하네.’
덕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지만 한은솔이 어떻게 생각하든 최연하는 이 모든 것이 강진호 덕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이었다.
‘저것도 병이지.’
피식 웃던 한은솔이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잠시만요, 누나.”
“왜?”
“……확인 한 번 해봐야겠어요. 이거 비중이 늘어나면 촬영 기간이 당겨지고 길어질 텐데…… 일정이 맞는지요.”
“응?”
최연하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