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86
#1485.
논의하다 (5)
“후우…….”
이종욱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겨우 끝났네.’
모니터 화면 안에 정리된 파일들이 늘어져 있다. 이현수는 자신이 호언장담한 대로 이종욱을 제대로 굴려 대고 있었다.
‘업무량으로 따지면 국정원에서 사흘 동안 할 일을 여기서 하루 만에 하네.’
국정원에서 나름 워커홀릭으로 이름 높던 이종욱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국정원에서 그가 소화하던 업무량의 최소 두 배는 소화해야 한다.
물론 국정원에서 맡던 업무들에 비해 그 중요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는 일들이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고 나발이고, 이 정도 업무량이면 그냥 업무량 자체만으로 과로사할 기세였다.
그럼에도 이종욱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건…….
타닥! 타다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다다다닥!
“…….”
그의 앞쪽 자리에 앉아서 가공할 기세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이현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게 사람인가?’
이종욱이 슬쩍 서버를 켰다.
이현수가 처리한 문서를 업로드하는 속도를 보면, 이게 사람인지 매크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종욱은 윗사람의 의견에 맞춰서 일을 처리하고 결제를 받아야 하는 과정이 존재하고, 이현수는 그냥 자신의 판단하에 서류를 처리해 버릴 수 있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현수의 업무 처리 속도는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나도 무학을 좀 배워봐야 하나?’
총회에서 이현수가 반쪽짜리 무인으로 불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무인은 무인.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두뇌 회전의 속도가 평범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무학을 배웠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겠지만, 당장 업무를 위해서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이종욱이다 보니 마음이 혹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음…….”
마침내 이현수가 오전 업무를 끝냈는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부장들 회의실에 모이라고 해.”
“예?”
“부장들 모이라고!”
“네!”
앞쪽의 한 사람이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 나간다. 이현수가 살짝 혀를 차고는 등을 의자에 기대며 책상에 발을 올렸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
이종욱이 살짝 이현수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람이 잠깐 미국 갔다 왔다고 그새 일을 대충 처리한 게 한두 개가 아니네.”
“…….”
실장님, 사람은 모두 실장님처럼 일할 수가 없습니다.
니 기준에 맞춰서 일을 처리하려면 사무실에 라X라X 침대 가져다 놓고 캠핑해야 합니다, 이 새끼야!
할 말은 많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이종욱이었다.
총회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이현수는 강진호의 옆에 붙어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간신 같은 이미지였지만, 막상 총회 안에서 본 이현수는 사람을 지옥까지 밀어 넣는 폭군이자 악마였다.
특히나 사무직의 경우는 이현수에게 생사여탈권이 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권력이나 권한이야 어디 이현수가 강진호에게 들이댈 수 있겠냐마는, 사무직의 입장에서 강진호는 만날 일도 없고, 업무를 논의할 일도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이현수는 다르다.
사무직들에게 있어서 이현수는 최종 보고의 대상이자, 그들의 업무를 모조리 꿰고 있는 상사였다.
성격도 더럽고 깐깐한 인간이 일도 잘하고 부지런하기까지 하니, 최악 중의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종욱.”
“예, 실장님.”
“할 만해?”
“…….”
이종욱이 뒷머리를 긁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어, 그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수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커피 한잔할까?”
“……조금 전에 부장님들 모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일도 안 하는 것들이 좀 기다린다고 별일 있겠어? 가자.”
“…….”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 * *
“어때?”
앞뒤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종욱은 이현수가 무얼 물어보는지 금세 알아챘다.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게 참 정리가 안 되는데…….”
머리를 긁적인 이종욱이 살짝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좀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체계가 영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나름 잘 돌아가기는 잘 돌아가서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종욱의 말은 지금 총회의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만에 너무 급격하게 변해서 그래. 그리고 최근에 인원이 양쪽으로 나뉜 것에도 원인이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총회의 사무직들이 일을 잘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재경에 한 번 연수를 다녀왔다는데, 그 힘들기로 유명한 재경의 신입 사원 연수를 겪고도 이 수준이라면 그전에는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 데를 이만큼 키웠다는 거지.’
새삼 이현수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이종욱이었다.
“어떻게 고치면 되겠어?”
“예?”
“이제 슬슬 한 번 뒤집어엎을 때가 됐는데, 알다시피 나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거든.”
정확하게 말하면 총회에서 일한 건 그리 오래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영남회나 총회나 돌아가는 방식은 비슷했다. 문제는 이현수는 이제 이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종욱은 이현수가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
“제가 바꿔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건 없어. 부서 체제를 바꾸는 일에 의견 하나 낸다고 생각해.”
“음.”
이종욱이 볼을 긁었다.
하기야 그도 이현수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이것저것 느낀 게 많으니, 의견을 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네.”
“총회 생활은 할 만하고?”
이종욱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할 만하냐고?
“지랄 맞습니다.”
이현수가 웃어버렸다.
그럴 것이다.
기본적으로 총회는 무인들의 세상이다. 강함이 곧 척도가 되고, 무력이 곧 능력이 되는 세상이다. 그런 곳에서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종욱이 살아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내보내 줄 수 있어.”
“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지금 제가 총회의 그늘에서 벗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저는 닭 모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었다.
“그 정도야 보호해 주지. 그게 아니라면 MK로 보내줄 수도 있어. 거기는 평범한 사람들도 꽤 있으니 적응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종욱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저는 아직 여기서 조금 더 해보고 싶습니다.”
“흐음.”
이현수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이종욱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그 압박감 속에서도 어떻게든 강진호와 협상을 해보려고 시도 하던 이종욱이다. 능력이야 둘째 치고, 그 정신력과 끈기만은 이현수도 인정하는 바였다.
“쉽지 않을 텐데?”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을 해냈을 때 입지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현수가 피식 웃었다.
“입지를 쌓아서 내 자리라도 노려보려고?”
“농담이시겠죠.”
이종욱이 손사레를 쳤다.
그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총회에서 이현수의 자리를 노린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한 일인지 정도는 굳이 계산을 해보지 않아도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이현수가 쌓아온 업적?
그런 건 둘째 문제다.
당장 이현수의 능력을 능가할 방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현수가 어느날 갑자기 번아웃이 와서 자유와 행복을 찾아 총회를 떠나지 않는 이상은 이종욱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건 노리지도 않아.’
이종욱이 노리는 포지션은 이현수의 바로 아래다. 아무래도 강진호를 수행해 총회를 떠나야 할 일이 잦은 이현수 대신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
그가 생각하기로는 총회에는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별로 신뢰하지 않아.”
“…….”
이종욱이 아무 말 없이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네 능력은 어느 정도는 믿고 있어.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총회에서 너 정도면 S급이라 하기에도 모자라지. 엎드려서 모셔와야 할 수준이야. 하지만 너와는 공감대가 없거든.”
이현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종욱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공감대.
그건 이종욱에게는 무척 치명적인 말이다.
이현수 역시 영남회 소속으로 총회와 적대하다 이쪽으로 넘어온 케이스지만, 이종욱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종욱은 애초에 무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로 적대하고 싸우더라도 무인들끼리는 같은 길을 걷는다는 묘한 공감대가 있다. 그렇기에 홍왕과 강진호가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욱은 일반인 출신.
무인들과의 공감대가 없다. 그러니 국정원의 소속으로 총회와 적대했다는 사실이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내가 너를 받고 싶어 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야. 아마 너는 앞으로도 다른 무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는 어렵겠지. 그리고 아마 너와 비슷한 업무 능력을 가진 무인이 나온다면, 그쪽이 더 중용될 거야. 그런데도 계속할 생각인가?”
이종욱이 살짝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
“같은 업무 능력을 가진 무인이 나온다는 말은 저보다 어린데도 저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이가 나온다는 뜻이겠죠. 그럼 어차피 밀리는 겁니다. 출신이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죠.”
이현수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핸디캡을 가지고 시작한 건 실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눈앞에서 핸디캡을 극복하고 거기까지 올라가신 분이 있는데, 제가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죠.”
“흠.”
딱히 아부는 아닌 모양이다.
이현수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열심히 해봐.”
“가십니까?”
“불러놓은 부장들을 깨러 가야지. 한 번씩 뒤집어엎어야 빠릿빠릿해진단 말이지. 나도 좋아서 하는 게 아냐.”
좋아서 하는 것 같은데?
그 얼굴이 미소라도 지우고 말씀하시지.
이현수가 미련 없이 자리를 비우고 걸어갔다. 이종욱은 아무 말 없이 이현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사람이야.’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가진 능력의 차이는 심각할 정도였다. 나름 대한민국에서는 엘리트 코스만 걸어왔다고 자부하는 이종욱이지만, 이현수를 보고 있으면 때때로 자신이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반쪽이라도 무인은 무인이지.’
이럴 때마다 극심한 소외감이 찾아온다.
무인밖에 없는 세상, 무인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과연 잘해 나갈 수 있을까.
이현수의 앞에서는 큰소리를 쳤지만, 솔직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때였다.
이종욱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휴대폰을 빼 든 이종욱이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