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0
#149.
몰아넣다 (4)
노수봉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은 이전처럼 굳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그림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가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된 양 말이다.
하지만 노수봉은 그 광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되레 커다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있는 그림자의 모습이 이제까지 그가 보아온 어떠한 모습보다 더 자연스럽고 그럴듯하게 보였다.
인간은 누구나 지배자다.
어떤 이는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지배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한 생명을 지배한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자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지배자였다.
노수봉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이었다.
반항하며 죽든지, 아니면 굴종하며 죽든지.
서로 다른 과정이지만, 같은 결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노수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날이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 물어도 될까?”
“물론.”
그림자의 목소리는 낮고 음산했다.
“넌 누구지?”
키득.
낮은 웃음이 들려온다.
조롱과 비웃음이 뒤섞여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오는 그 웃음이 노수봉의 귀를 파고들었다.
“알고 있잖아?”
노수봉이 멍한 눈으로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강진호.”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의 육체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한다.
어둠이 사라지고 나자 그 안에서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존재를 확인한 노수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진호.”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뵙습니다, 노수봉 병장님.”
노수봉은 기이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강진호.
일 년이란 시간 동안 보아온 강진호다.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다르지 않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강진호는 그가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강진호의 껍질을 뒤집어쓴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강진호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미소.
그것은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괴이한 것이었다.
미소를 짓는 사람을 보고 섬뜩함을 느낀다면, 그 미소를 미소라고 할 수 있을까?
“할 말은 끝났나?”
노수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꽤나 평온했다.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어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정말 묻고 싶은 게 남았다.”
“말해.”
노수봉이 가만히 입을 닫았지만, 강진호는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밤은 길다.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노수봉은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노수봉이 넋두리를 하듯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영기를 괴롭힌 것부터? 아니면 군대에 들어온 것부터? 그것도 아니면 더 어린 시절부터? 내 성격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내가 뭔가를 잘못 배워온 걸까? 어디서부터 되돌려야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노수봉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너를 만난 것? 물론 너를 만난 건 실수였겠지. 그런데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앞으로도 편히 살 수 있었을까?”
노수봉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했다.
“이봐, 강진호.”
“…….”
“누구나 한 번쯤은 주인공으로 살아보고 싶은 거잖아.”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지. 타인을 괴롭히면 그 대가를 받지. 그런 빤한 말을 듣고 자랐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너도 알고 있잖아. 죄를 지은 인간들이 더 떵떵거리면서 사는 게 이 세상이야. 그래서 그냥 나도 죄를 지었어. 가책 같은 것도 없었지. 그럼 내가 잘못된 걸까? 그럼 세상에는 얼마나 잘못된 사람이 많은 걸까?”
노수봉의 목소리에 울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답해. 대답해 봐, 이 새끼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거든! 내가 잘못한 건 너를 만난 것뿐이야.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예전처럼 편히 살고 있겠지! 그런데 나보고 너를 만난 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라고? 어째서!”
노수봉은 피를 토하는 듯 소리치고 고함쳤다. 제멋대로 빠져 버린 머리와 일주일 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퀭한 얼굴로 광기를 뿜어내는 노수봉의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인간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뭐가 나빠! 너희도 그냥 못하는 것뿐이잖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으니 참는 것뿐이잖아! 나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 것뿐이야. 그런데 참지 않았으니 잘못이라는 건가? 그게 너 같은 위선자 새끼가 하는 말이야?”
노수봉이 이죽거렸다.
“솔직해져 봐. 너도 그렇잖아. 그냥 두려운 것뿐이잖아. 길을 가는 여자를 잡아 쓰러뜨려 덮치고 싶잖아. 그런데 그 뒤에 닥쳐올 후환이 두려워서 못하는 것뿐이잖아! 이 겁쟁이 새끼야!”
번들거리는 눈.
짓이겨져 피가 흐르는 입술.
노수봉의 모습은 점점 사람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말해봐.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너희가 참을 때 나는 참지 않아서? 그럼 그냥 부러운 거지. 인간은 서로 잡아먹는 것들이잖아! 아니야? 내 말 틀렸어?”
강진호는 묵묵히 노수봉의 말을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찔.
강진호의 몸이 움직이자 노수봉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모습만으로 따지자면 시커먼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의 강진호가 몇 배는 더 무서워야 한다. 지금의 강진호는 적어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노수봉은 가슴을 조여오는 공포심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강진호의 모습이 그를 점점 더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강진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노수봉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노수봉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마찬가지. 마찬가지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그를 바라보던 악마의 시선은 차마 입도 열지 못할 만큼의 공포를 그에게 선사했다.
그럼 지금 강진호의 눈은?
아무 감정 없이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 저 깊은 검은 눈동자가 주는, 이 소름 돋는 공포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강진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 수가 없군.”
“…….”
“김학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강진호의 목소리는 평소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함이 거기에 실려 있었다.
“아, 아니라고?”
강진호는 대답 없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체 언제 너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지?”
“…….”
노수봉의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진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네 말은 틀린 게 없지.”
강진호가 이죽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아무리 법으로 도덕으로 막아댄다 하더라도 힘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지지 못한 자를 먹고, 짓이기고, 농락하는 걸 막을 수는 없지.”
노수봉은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으니, 힘이 있으니 한다고 했나?”
강진호의 손이 천천히 노수봉의 목을 잡아왔다.
노수봉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몸이 이전처럼 굳어 있지 않음에도 노수봉은 감히 강진호의 손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언제라도 그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악마다.
그런 이를 상대로 대체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이상한 말이지.”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지금까지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는 언제나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마치 거대한 늑대가 얼굴 바로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낮게 그르렁대는 것 같은 느낌.
정제되지 않은 야성에서 전해져 오는 섬뜩한 공포.
금방이라도 강진호가 입을 벌려 그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너는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노수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지?”
“몰라?”
강진호가 낄낄대기 시작했다.
“네가 나에게 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강진호가 천천히 하지만 더없이 확고하게 선언했다.
“네가 약자이기 때문이야.”
노수봉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다른 원인 같은 것도 없어. 반성?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아.”
“…….”
“네가 다른 이들을 짓밟을 때는 어떤 생각이었지?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했나? 아니겠지.”
노수봉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냥 그런 거야. 나는 그저 너의 존재를 갉아먹고 싶은 거야. 조금씩 고통을 주면서, 조금씩 파멸시키고 싶은 거야. 나는 그럴 힘이 있고, 그럴 의지가 있어. 네 말대로 다른 이들은 나를 막을 수도 없지. 그런데 왜 내가…….”
강진호가 활짝 웃었다.
너무도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이유를 찾아야 하지?”
노수봉의 눈동자가 풀리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해가 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그의 삶에서 어둠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강진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강진호가 아니다.
이건 그런 애매한 것이 아니다.
뒤틀리고 뒤틀려 갈 데까지 가버린 괴물이었다.
이 괴물에게서 벗어날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단 하나뿐이겠지.
“잘 들어, 노수봉.”
강진호가 노수봉에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차라리…….
죽이고 싶다든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겠다는 말이 더 편안하게 들렸을 것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 말은 노수봉이 잡고 있던 마지막 이성마저 앗아가 버렸다.
“흐흐흐흐.”
노수봉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입가에서 주르륵 침이 흘러내려 침대를 적시기 시작한다. 강진호는 그런 노수봉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아냐. 아직은 아니야.”
그의 손이 노수봉의 머리를 잡았다.
우웅.
진기가 노수봉의 머리를 일깨우기 시작한다. 일순 정신을 차린 노수봉이 멍하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뿐.
“으…… 으으어어…….”
노수봉의 얼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악마는 그가 미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강진호가 노수봉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아직 아니야. 아직 오늘이 남았잖아. 시간은 충분해. 그러니까…… 우리 좀 더 놀아보자고.”
“으흐…… 으흐흐…….”
노수봉의 낮은 흐느낌이 방에 퍼져 나간다.
강진호는 그런 노수봉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목을 움켜잡아 자신의 얼굴 바로 앞으로 끌어당겼다.
“자…… 노수봉.”
강진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에게 내민 손은 마음에 드나?”
노수봉은 강진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노수봉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세상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으니까. 그들 중에는 내가 네게 내민 손을 잡아야 할 사람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외롭지는 않을 거야.”
악귀의 낮은 웃음소리가 노수봉의 방을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강진호는 더없이 잔인하게 웃었다.
“시작하자.”
노수봉의 눈이 더없는 절망으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