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02
#1501.
이어가다 (1)
“대체 저 사람은 어디까지 가는 거지?”
TV에 나오는 광고를 보며 한진성이 멍한 얼굴을 했다. 이제는 강진호의 얼굴이 TV에서 나온다.
물론 전에도 TV에 나오기는 했다. 그 강진호가 흑역사라 생각하는 드라마가 있으니까. 뭐, 한진성은 나름 잘 보긴 했지만.
하지만 이번은 그 드라마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과거에 출연한 드라마에서 강진호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CF는 누가 뭐래도 강진호를 주역으로 찍은 CF다.
받는 느낌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와! 오빠, 잘생겼다.”
“연하 누나가 예쁘지 않냐?”
“둘 다 진짜 선남선녀네. 세상 참 불공평하다.”
“뭐가?”
“누구는 저런 남자랑 같이 커피 마시는데, 나는 이런 오징어랑 과자 먹고 있어야 하고.”
조미혜의 말에 한진성이 발끈하여 노려보았다.
“야! 나도 연하 누나 같은 사람이랑 과자 먹고 싶거든?”
“애초에 같이 과자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오빠는 아웃이야.”
“……어?”
“됐다. 어차피 못 알아들을 거, 내가 소 귀에 경을 읊고 말지.”
조미혜가 답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한진성은 뭔가 강한 억울함을 느꼈지만, 여기서 괜히 말을 더 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슬며시 TV 쪽으로 시선을 돌린 한진성이 무안하다는 듯 볼을 긁었다.
“근데 진짜 진호 형도 대단하다.”
“뭐가?”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그냥 유민이 형 학교 친구였잖아. 사람이 좀 뭐랄까, 어수룩? 아니, 어수룩하다기보다는 뭔가 좀, 음…….”
“여하튼, 뭔가 나사 하나 빠진 느낌이었지.”
“그것도 미묘하게 다른데…….”
한진성이 기억하는 강진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보육원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자신이 잘못을 해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슬픈 일이지만, 이것만큼은 아무리 좋은 보육원에서 자라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습성이다.
그런 한진성이 보기에도 강진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 어린 나이에 이곳으로 들락거릴 때부터 그들에게 조금의 편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뭐랄까…….
“나사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고, 여하튼 뭔가 좀 결여된 사람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
“그게 그거 아냐?”
“나사 빠졌다고 하면 뭔가 멍청해 보이잖아. 그런 건 아니었어.”
“음, 그렇지. 진호 오빠 똑똑하지.”
당시의 보육원은 이렇게 큰 곳이 아니었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오로지 원장 수녀님만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원장 수녀님이 워낙 큰 애정을 보여줬기에 다른 보육원들보다는 훨씬 밝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지.’
부족한 돈과 지원은 애정만으로 극복할 수 없다. 당시에 보육원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박유민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것은 축 처진 어깨밖에 없다.
그런 곳에 어느 날 갑자기 강진호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원래 살던 이처럼 자연스럽게 보육원의 한 편에 스며들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이상한 형이야.”
“뭐가?”
“보통은 자기 친구가 보육원에 산다고 거기 와서 죽치고 노나?”
“……아니지.”
생각해 보면 한진성도, 조미혜도 교우 관계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닌데도 그들의 친구가 이곳에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친구를 이곳에 데려오지 않으려 한 것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낼 만한 이도 없었다. 더구나 예전 그들의 보육원은 달동네 제일 꼭대기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 곳을 자전거를 타고 오르던 이가 강진호였다. 그것도 뒷자리에 박유민을 태우고 말이다.
“정상은 아니야.”
“여러모로 말이지.”
박유민은 지금도 강진호라면 끔찍하게 생각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강진호가 위기에 처하면 대신 죽는 걸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다.
누군가는 그게 오버라고 하겠지만, 한진성은 그런 박유민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기분은 아무도 모르지.’
세상 밑바닥에서 다른 이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던 사람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이를 만났을 때의 기쁨 같은 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진성 역시 그런 강진호의 시선에서 구원받았으니까.
그래서 보육원 사람들은 강진호를 좋아한다. 이제는 예전 같은 미묘한 어려움도 사라지다 보니 동네 바보 형처럼 놀려 먹는 사이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 역시 친근함의 표현이다. 강진호가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면, 이곳의 누구도 강진호를 그리 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뭐랄까…….
“조금 그러네.”
“뭐가?”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할 것 같기는 한데…….”
“오빠는 원래 좀 이상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
고맙다. 눈물나게 고맙네.
한진성이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저렇게 TV 화면에 진호 형이 나오는 걸 보니, 조금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뭘…….”
한진성을 타박하려던 조미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미혜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얼마 전에 함께 미국까지 다녀왔는데 말이다.
“물론 진호 형이 저런 데 나온다고 우리한테서 멀어질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 당연히 알지. 진호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음, 내가 마음이 좀 불편하네.”
한진성이 머리를 긁어 댔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 드는 불편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건 어쩌면 강진호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한진성 자신에 대한 실망일지도 모른다.
한진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강진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빚을 조금은 갚고 싶었는데…….’
강진호가 들으면 ‘네가 나한테 빚진 것은 전혀 없다’라고 말할 게 빤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던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진호 오빠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진호 형이야 그러지 않겠지.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 진호 형도 사업하고 이것저것 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텐데, 예전처럼 여기를…….”
그때였다.
벌컥!
문이 확 열린다 싶더니, 한진성과 조미혜의 눈에 커다란 박스의 탑이 들어왔다.
“응?”
“엥?”
차곡차곡 쌓인 박스. 그 박스의 정체가 쌓아 올려진 피자 박스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흐음.”
안으로 들어온 이.
강진호가 겹겹이 쌓여 있는 피자 박스를 내려놓고는 몸을 홱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간다.
“혀, 형! 형, 어디가?”
한진성이 다급하게 강진호를 불렀다.
그러자 강진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한진성을 바라봤다.
“콜라 가지러 가는데?”
“아…….”
“왜?”
“아, 아니, 아무것도.”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간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진성을 향해 조미혜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진호 오빠가 뭐 어떻다고?”
아니, 뭐…….
음.
우적.
강진호가 살짝 한이 맺힌 사람처럼 피자를 입에 쑤셔 박았다.
“자고 간다고?”
“안 돼?”
“안 될 건 없지. 오빠가 여기서 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불편하면 갈게.”
“쟤들이 불편해 보여?”
“…….”
방바닥에 반쯤 드러누워 피자를 먹고 있는 애들을 보니, 확실히 ‘불편’과는 삼만 광년쯤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왜 집에 안 가고?”
“오늘은 좀 쉬고 싶어서.”
“그게 뭔 소리야?”
“아니, 그게…….”
출근하면 이현주와 사장단에게 시달려야 하고, 집에 가면 호들갑을 떠는 강은영과 칼날 같은 눈빛을 보내는 백현정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아버지 눈을 볼 수가 없어.’
강유환은 지금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카페가 잘되도 너무 잘되어 버린 관계로 원두의 소모량이 상상 이상으로 치솟았고, 당연히 원두 생산을 총괄하는 강유환이 그 바쁨에 있는 그대로 얻어맞아 버렸다.
강유환이 직접 원두를 볶는 건 아니지만, 볶아져 나온 원두의 상태를 확인하고 공급할지 폐기할지를 결정하는 검수를 해줘야 한다.
원래라면 적당히 하루에 한 번 정도 들러서 볶아져 나온 원두만 확인하면 될 일이지만, 물량 부족과 일선 점장들의 성화로 볶아져 나온 원두를 바로 실어 나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강유환은 거의 5분대기조처럼 공장에서 볶아진 원두를 그 자리에서 확인한 후, 곧바로 반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지금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새벽에 만드는 원두를 조금 쌓아놓기로 하고 잠을 잘 시간은 확보했지만, 이런 스케줄을 평범한 사람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새벽 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강유환을 보고 자식밖에 모르는 백현정이 ‘아들놈 하나 잘못 낳았더니, 이놈이 지 애비 잡아먹는다!’를 외쳐 댔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제는 강유환의 장인 정신이었다.
“뭐? 검사하지 말고 내보내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 못 본다. 쟤들이 원두를 일정하게 볶는 줄 알아? 안 돼!”
그 말을 하면서 홍삼 엑기스를 물처럼 들이켜지만 않았어도 나름 멋있었을 텐데.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인해 강진호는 지금 집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민망해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대충 사정을 들은 한진성과 조미혜가 더없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본다. 강진호가 그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피자를 입으로 쑤셔 넣었다.
“콜라 줄까?”
“……응.”
콜라를 받아 마신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인생이 다 그런 거야, 형. 인생이 계획대로만 됐으면 나도 한국대 갔지.”
“……위로가 되네.”
한진성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강진호의 사정은 정말 어이없지만, 어쨌거나 강진호가 집 다음으로 편안하게 생각하는 곳이 이 보육원이라는 사실이 은근히 한진성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강진호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쉴 곳이 필요하면 호텔에 가도 될 텐데, 굳이 이렇게 보육원을 찾아와 주지 않는가.
“갈아입을 옷은 들고 왔어?”
“……속옷은 사 왔는데.”
“저 안에 애들 트레이닝복 있어. 그러고 있지 말고 옷부터 갈아입어, 형.”
“어. 알았어.”
머리를 긁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강진호를 보고 있으려니, 먼 곳에 취직한 큰형이 간만에 집에 돌아온 분위기가 난다.
조미혜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저 오빠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왜?”
“아니, 가끔씩 진지할 때나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면 참 멋진 사람인데, 평소에 보면 진짜 빙구 같아.”
“……어.”
그렇지. 그건 분명 그렇지.
하지만…….
“그게 좋은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조미혜도 결국에는 웃고 말았다.
강진호는 하루하루 바빠져 가고, 어쩌면 이곳에 들를 시간도 갈수록 줄어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진호의 마음이 이곳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벌컥!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진호 여기 왔어?”
“…….”
들뜬 얼굴로 들어온 박유민을 보며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가 둘이네, 바보가 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