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1
#150.
몰아넣다 (5)
“……제길.”
자신의 저택을 바라보는 노영덕의 얼굴은 영 편치가 않았다. 간밤에 스트레스를 풀고 오기는 했지만, 집을 보니 다시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경질적으로 차를 댄 노영덕이 밖으로 나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치익.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담배 한 대를 문 노영덕이 조금은 허무한 시선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 꼴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니 속이 쓰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부대를 지금 당장 뒤집어놓는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타이밍을 봐야 하는 것인지가 고민이다.
군대에 보낸 아들이 정신병까지 걸려서 집에 왔다는 것은 이용하기에 따라서 좋은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고위층 자제의 복무 회피가 만연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이 입대를 했다가 화를 당했다면, 국민의 동정과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성적으로 할 일이 아니야.’
저질러야 한다면 크게 저질러 버리는 편이 낫다.
이번에는 언론도 그에게 비판적으로 나설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군부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주장하며 화제를 끌어 모을 수도 있었다.
“꼰대들이 거품을 물겠지만 말이야.”
버럭질을 해 댈 군 장성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지만, 당과 적당히 협의할 수 있다면 반발을 억누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굳힌 노영덕이 담배를 비벼 끄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노수봉의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고 결론을 내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관으로 들어선 노영덕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비서의 얼굴이 참담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간밤에…….”
“비켜!”
노영덕이 비서의 어깨를 밀치고는 노수봉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넋이 나간 듯한 노수봉의 모습이 보였다.
“수봉아?”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노수봉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야, 야, 이놈아!”
노영덕이 노수봉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풀려 있는 동공.
벌어진 입.
그리고 그런 입가로 줄줄 흘러내리는 침.
노수봉은 아예 의식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수봉아! 이놈아! 내 말 안 들리냐! 수봉아!”
뺨을 후려치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댔지만, 노수봉은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노영덕이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잘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아들이 이 꼴이 됐다고?”
“…….”
노영덕이 손에 잡히는 것을 모조리 잡아 던지며 소리쳤다.
“의사 데려와! 당장! 지금 당장! 이 새끼들아!”
부우우웅.
차는 낮은 엔진 음을 내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조규민은 힐끔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뒷좌석에 타고 있는 강진호는 눈을 감은 채 몸을 시트에 기대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강진호가 차에서 자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생각이 많을 때 강진호는 저런 식으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는 했다.
조규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을 만난 것으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다만, 회장님께서 그러면 이번 외진은 어떻게 하냐고 하시더군요.”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다음 외진 때까지 괜찮을 거라고 전해 주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절 못 믿으십니까?”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조규민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달라졌어.’
과거의 강진호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되레 친절하게 설명을 하려 들었겠지.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대화를 걸어온다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 강진호였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조규민은 최근 강진호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강진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천천히 드러내고 있었다.
행동도 그에 걸맞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럼 마지막은?’
조규민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미 강진호가 자신의 힘을 드러낸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과거 그 모습에 조규민이 받은 충격은 극심했다.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규민은 알고 있었다. 일견 예의 발라 보이는 지금 강진호의 모습이 일말의 부자연스러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의 강진호는 스스로 빗장을 치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있는 맹수와 같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옥 밖에 있는 존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가둔 맹수.
그런데 지금 그 빗장이 슬그머니 열리려 하고 있었다.
등 뒤를 타고 흐르는 전율과 미묘한 공포.
조규민은 지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제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묻지 않았다.
그는 비서 출신이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강진호를 보좌하는 것이지, 강진호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차를 향해 걸어올 때.
그의 얼굴에서 채 빠지지 않은 살기를 보고 만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진호가 그런 얼굴을 보였다면…….
조규민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마라.
모셔야 할 사람을 재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그는 그저 윗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설령 그게 쉽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우웅.
그를 구해준 것은 짧게 울리는 휴대폰이었다.
“흠?”
조규민이 휴대폰을 들어 내용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강진호 씨.”
“예.”
“아무래도 복귀는 좀 늦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강진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조규민을 바라보았다.
조규민이 룸미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주영기 씨가 깨어났답니다.”
끼이이익.
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진호가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표정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강진호는 차 문을 닫고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초조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탁탁탁탁!
사람이 드문 계단에 강진호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15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강진호가 주영기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 왔냐?”
주영기가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손을 들었다.
“…….”
강진호는 아무 말 없이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해쓱하지만 분명 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잠들어 있는 주영기가 아니었다.
“가까이 좀 와봐. 아직 흐릿하다.”
“어.”
강진호가 주영기를 향해 다가갔다.
주영기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강진호를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강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야, 진호야.”
“응.”
주영기가 조금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응?”
주영기가 씨익 웃었다.
“하, 살 것 같다.”
“걸리면 안 될 텐데…….”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냐, 그럼.”
“음…….”
강진호는 휠체어에 탄 주영기를 바라보았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 밖으로 데리고 나와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있지만, 이미 한차례 검사가 끝났다고 하니…….
‘안 되는 거지.’
강진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검사를 하든 말든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의식이 없던 사람에게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게 하는 건 문제였다.
“얼른 들어가자.”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내놔.”
“…….”
강진호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주영기에게 내밀었다.
“크…….”
주영기가 세상에 다시없을 표정으로 담배를 바라보더니, 냉큼 받아 입에 물었다.
찰칵.
불을 붙여주자 아주 천천히 담배를 빨아들인 주영기가 가라앉은 눈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파랗네.”
“그래.”
“하늘은 파랗구나.”
주영기의 눈은 조금 아련해 보였다.
강진호는 그런 주영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힘이 하나도 없다.”
“그렇겠지. 한 달이나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 근육이 다 빠졌을 거다.”
“내 몸이 이 꼬라지가 되다니, 얼마나 먹어야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르겠네.”
주영기가 피식 웃으면서 담배를 빨더니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 어질어질한 거 보소.”
“이 기회에 끊지?”
“말이 쉽지, 새끼야.”
주영기가 낄낄 웃더니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진호야.”
“말해.”
“고맙다.”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고맙다는 걸까?
김학철과 노수봉에 관련된 일은 아직 주영기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고맙다는 걸까?
“날 이 병원에 데리고 온 게 너지?”
“……그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세상천지 다 뒤져 봐도 나를 이렇게 대접해 줄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거든.”
주영기가 가만히 웃었다.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갚을 필요 없어.”
“갚는다니까? 너 사나이 주영기 모르냐?”
“필요 없으니까…….”
강진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주영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깊이 담배를 빨아들이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왠지 나른한 듯한 그의 모습이 강진호에게 아프게 박혀왔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주영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마지막에…….”
“응?”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
강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르지.”
주영기는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손을 털며 너스레를 떨던 주영기가 조금은 힘겨운 듯 입을 열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 ‘아, 이제 이렇게 죽는 거구나’라고 느낀 순간에 말이야.”
주영기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한 사람, 누군가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강진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지 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주영기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손을 뻗어야 했다. 원장 수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일어나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
강진호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있었구나.”
주영기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 가만히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있었구나. 손을 뻗으면 잡아줬을 사람이…… 있었구나.”
강진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먼저 뻗었으면 됐을 텐데 말이야. 멍청했지.”
주영기가 머쓱한 듯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쓸데없는 짓은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강진호는 대답 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런데 주영기는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영기는 어디에서 그런 점을 느낀 것일까?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어렵구나.’
먼저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겪었던 그 무엇보다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진호가 다른 사람의 약함마저도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강진호는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장 수녀님.
차가움을 한껏 담은 겨울의 공기가 오늘따라 조금은 훈훈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