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2
#151.
전역하다 (1)
포대에서 벌어진 사건은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끝도 없이 이어진 감사에 포대원들은 다들 지쳐 버렸고, 간부들은 모조리 진급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100명도 되지 않는 사병들조차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김학철과 노수봉은 결국 포대로 복귀하지 못했다.
둘 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이 돌았다.
한 분대에서 세 명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귀신의 소행이라며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주영기는 몰라도 다른 둘에 대해서는 자업자득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포대는 예전보다는 조금 빡빡하게 돌아갔다.
사병들이 불만을 호소했지만, 그들에게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국방부의 시계는 어찌 되었든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장재환.”
“예?”
장재환이 슬그머니 강진호에게 다가왔다.
“침상이 더러워.”
장재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진짜!”
간이 부어터진 듯 대놓고 짜증을 낸 장재환이 속사포처럼 말을 토해냈다.
“집에 좀 가! 집에 좀 가라고! 이제 내일이면 전역하는 사람이 왜 사람 귀찮게 하냐고! 너 때문에 형이 결벽증 걸리겠다! 와, 씨! 진짜! 일 년 반이나 사람 괴롭혔으면 됐지!”
“…침상이 더러워!”
“이 새끼들아!”
장재환이 뒹굴대고 있는 분대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가 침상 더럽다잖아!”
“집에 가라고 하십쇼.”
“아저씨, 여기는 아저씨 방이 아니에요. 더러우시면 집에 가서 침대에서 주무세요.”
강진호는 시무룩했다.
말 한마디로 포대 전체를 뒤집어놓던 그의 권력은 햇살 맞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그는 그냥 지나가는 돌멩이와 동급이었다.
차라리 취사장에 어슬렁거리는 짬 타이거가 그보다 더 관심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반발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말년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시련이 아닌가.
그때 생활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색이 된 남자 하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씨. 여기가 무슨 아저씨들 보이스카우트하는 데여?”
장재환이 안으로 뛰어 들어온 주영기를 보며 궁시렁댔다. 주영기가 사색이 되어 강진호에게 말했다.
“지, 진호야, 나 좀 숨겨줘라.”
“왜?”
“저 새끼들이 모포 말이 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맞아 죽을 수도 있겠어.”
“…….”
강진호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주영기의 상태는 뭐라고 해야 할까, 꼬인 것 같으면서 풀린 것 같고, 또 꼬이기도 꼬인 이상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주영기는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지는 않았고, 그대로 포대에 남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의 위가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노수봉과 김학철이 그리되어 버린 이상 분대 내에 그보다 선임이 없었다. 한 번 자살 시도까지 간 이에게 일찍부터 분대장을 달아준다는 것에 찝찝해하는 간부들도 있었지만, 이상엽의 적극적인 지지로 주영기는 한동안 지켜본다는 조건하에 분대장을 달았고…….
“그러게 적당히 하지, 새끼야.”
이제까지 억눌려 있던 주영기의 철권통치가 부활했다. 신교대 초반에 보여주었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주영기가 생활관을 단숨에 휘어잡아 버린 것이다.
급작스레 변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던 후임들도 주영기가 그동안 참고 살아온 이유가 사회에 있는 가족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가장 큰 지옥을 맛본 것은…….
쾅!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상엽과 김도형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흐흐흐. 아저씨, 여기 계셨네?”
“…야, 야, 이 새끼들아.”
“얘들아, 아저씨 모셔라.”
“예, 분대장님!”
“아니, 이 새끼들아! 내가! 아니!”
“가만히 계세요, 아저씨. 요즘 허리가 안 좋아보여서 우리가 찜질 좀 해준다니까 뭘 그렇게 도망을 가십니까? 사나이답지 못하게.”
“아니, 이 새끼들아! 그 찜질이 그 찜질이냐고! 몽둥이찜질도 찜질이냐! 진호야! 진호야아아아아!”
양팔과 양다리를 잡힌 채 들려 나가는 주영기를 보며 강진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력이란 돌고 도는 것.
절대왕정을 구축하던 병장이라도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는 없고, 언젠가는 화무십일홍의 진리를 경험해야 하는 법이었다.
“우리도 아저씨 모포 말이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진호는 헛기침을 하며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 어디 가요?”
“담배 피우러.”
강진호가 쿵, 문을 닫고 나가자 분대원들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크, 살다 보니 저 양반이 저러는 것도 보는구나.”
“…길었습니다.”
“이제야 나가네.”
분대원들은 하나같이 기쁜 기색이 만연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동안 강진호 때문에 고생을 얼마나 했던가.
“뭔 놈의 병장이 이등병보다 빨리 일어나서 침상 개냔 말입니다. 덕분에 나도 칼기상해야 하잖아!”
“병장이 칼각 잡지 말란 말입니다!”
“그놈의 FM! 내가 한이 맺혀서 라디오도 안 듣는다. 앞으로 평생 라디오 안 들을 거야!”
원성은 자자했다.
장재환이 그 꼴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하, 새끼들. 니들이 그렇게 불만을 늘어놓는 것도 다 강진호 아저씨 덕분인 줄 알아라.”
“…예?”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 같으면 니들 밤에 생활관에서 떠들 수나 있었을 거 같냐? 말 한마디 했다가 건방지다고 끌려가기 일쑤였다, 새끼들아.”
“와, 무슨 그런 쌍팔 년도 군대가 있습니까?”
“마, 다른 생활관에서는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는 거 모르냐?”
이등병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선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기는 아직도 욕 처먹고 삽니다. 상병인데.”
“제 동기는 사람 아닙니다. 일개미지.”
장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저씨가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건 있지만, 그래도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잖아. 저 아저씨가 없애 버린 내무 부조리가 다시 부활하면 니들은 숨도 못 쉬어, 새끼들아.”
“…….”
“자기는 당할 거 다 당하고 후임들한테는 단 한 번도 그런 걸 시켜본 적 없는 사람이다.”
물론 선임들도 제대로 갈구지는 못했지만…….
장재환이 중얼거린 뒷말은 너무 작아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사실 포대 레전드 아니십니까.”
“휴가증만 하더라도… 어휴.”
강진호는 휴가 콜렉터 같았다.
어디 교육만 갔다 하면 휴가증을 따왔다. 전투력 측정부터 포대장 교육은 물론이고…….
“체육대회는 진짜 레전드였지.”
축구, 농구, 씨름.
출전 가능한 모든 종목에 출전한 강진호는 휴가증을 말 그대로 쓸어 담아왔다. 대대 체육대회에서 휴가를 쓸고, 연대 체육대회에서 휴가를 쓸고, 사단 체육대회까지 나가서 휴가를 쓸어왔다.
“상부에서 보직 변경하자고 했다던데.”
“강진호 병장님이 거절했다잖아.”
“…쩔긴 쩐다, 진짜.”
그 휴가증을 모조리 분대 내에 다 뿌려 버린 강진호였다. 혼자서 그 휴가증을 다 독차지했다면 병장 기간 내내 휴가만 가야 했을 것이다.
분대 내에 강진호가 준 휴가증으로 휴가 한 번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말은 이렇게 해도 강진호를 좋아하지 않는 분대원들은 없었다.
“근데 강진호 병장님 나가시면 저희 이제 포대에서 찌발리는 것 아닙니까?”
“뭐, 인마?”
“사실 맞잖습니까. 포대의 절대권력이 사라지는 건데…….”
“내가 있잖아!”
“…분대장님으론 좀 약하지 말입니다.”
장재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전임자가 너무 잘나면 후임이 괴로운 법.
안 그래도 강진호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는 정곡을 쑤셔오는 비수에 신음했다.
“잘하면 될 거다. 우리도 많이 배웠잖아.”
“그렇습니다.”
“없는 사람 그리워해 봐야 소용도 없고.”
“그래도 간부들이 못 건드리는 건 정말 좋았는데.”
주적들과의 항쟁에서 가장 큰 무기를 잃게 된 것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전역 축하로 파티해야지 말입니다. 냉동!”
“냉동 지겨워 죽겠다. 매일 그렇게 처먹고도 또 냉동이냐.”
“그럼 배달시키지 말입니다.”
“배달하려면 당직사관이랑 쇼부 쳐야 하는데, 저 양반이 그런 걸 할 사람이냐?”
“…안 하지 말입니다.”
강진호는 규정에서 벗어난 것을 싫어했다. 암암리에 배달 음식을 시킬 수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 규정상 외부 음식은 포대 내로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강진호가 그런 것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초코파이나 챙겨.”
“…정이 넘치는구나.”
“이제 PX는 다 갔네.”
장재환이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냉동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됩니까’라는 너스레를 떤 것이 시작이었다.
강진호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돈이 없어?’라는 무식하고도 어이없는 말을 했다.
거기에 ‘딱히 돈이 없어서 사 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에이, 군인이 돈이 어딨습니까’라는 그의 대답은 지금 분대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들은 강진호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장재환에게 줘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하나만 사 주시면 됩니다’라는 대응은 통하지 않았다.
강진호는 자신의 카드를 장재환에게 맡기더니, ‘애들 뭐 먹을 때 이걸로 긁어라’라는 말로 분대를 뒤집어놓았다.
그야말로 금수저의 표본, 그리고 금수저의 모범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분대원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카드로 뭔가를 사 먹는 게 찝찝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강진호는 피돌이에게 카드를 맡겨서 자신의 분대원들이 뭔가 살 때마다 모조리 자신의 카드로 결제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PX 자유 이용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파티의 시작이었다.
공짜면 양잿물도 먹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대원들은 PX를 폭파시키기 시작했다.
개중에 타 분대의 동기까지 데려가서 사 먹이는 놈이 있어서 장재환이 따로 불러 주의를 줘야 할 정도였다. 매일 저녁 냉동으로 파티를 하다 보니 짬밥 섭취 거부와 비만이라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장재환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는 분대원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 아이들은 다시 말라가겠지.
젖과 꿀이 흐르던 군 생활은 이제 끝나는 것이다.
‘없어봐야 알겠지.’
상병들은 모르겠지만, 일병급부터는 강진호가 포대의 권력을 휘어잡고 나서야 군 생활을 경험한 아이들이다 보니 강진호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해지는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강진호 덕분에 얼마나 편히 군 생활을 했는지 안다면 지금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어야 했다.
강진호의 빈자리가 얼마나 클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가는 사람을 잡을 수 없는 곳이 군대 아니던가.
“청소나 해라, 새끼들아. 아저씨 마지막 가는 날인데, 그래도 기분 좋게 보내줘야지.”
“예. 지금 하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청소를 시작하는 분대원들을 보며 장재환이 미소를 지었다.
떠날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남은 사람의 몫이었다.
‘나도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