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43
#1542.
대면하다 (2)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호텔 1층 카페에 앉자마자 주문도 하기 전에 레이놀드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미국에서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그때는 나름 중압감에 시달리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홀가분해 보인다고 할까?
“그 망할 CIA 놈들이 자기들도 껴야 한다고 주둥아리를 털어 대는 통에 말입니다.”
“…….”
아무리 그래도 강진호와 이현수는 저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인데, 외국인 앞에서 자기 나라 기관을 저리 욕해도 되는 걸까?
“구시대의 망령 같은 놈들이 아직도 냉전시대인 줄 안다니까요. 빌어먹을 놈들.”
“…….”
“아, 이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럼 말하지 마.
“CIA 놈들이 한국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려다가 적발되어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음?”
“회주님을 감시하려 했다는 거죠.”
강진호가 살짝 입을 벌렸다.
‘이걸 말을 해준다고?’
만약 강진호가 자신의 정보력으로 그 사실을 알아냈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질러 버리니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했다.
“죄송합니다. CIA 놈들이 스탠드 플레이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현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지금 그럼 위쪽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CIA가 단독으로 한국에 정보원을 파견하려 했다는 건가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레이놀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독립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정보국은 그저 권력의 개가 될 뿐이라는 원칙 때문에, 과거부터 CIA는 자금의 사용처와 정보원의 활용을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구시대의 잔재이기는 합니다만…….”
이어지는 말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덕분에 이런저런 일들을 해결한 것 역시 사실이거든요.”
“응?”
이현수와 강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윌리 리스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가왔다.
“동양식 인사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저도 모르게 악수를 요청할 뻔했습니다.”
“상관없으니 편한 대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죠.”
윌리가 빙그레 웃었다.
이내 레이놀드의 옆자리에 앉은 윌리가 넥타이를 살짝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요점은 놔두고 빙빙 돌리는 판에 속이 터질 뻔했습니다.”
너희가 너무 돌직구를 던지는 타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니?
역지사지를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여하튼 그 CIA 놈들 때문에 한국으로 오는 게 좀 늦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찰거머리같이 달라붙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라서.”
레이놀드가 피식 웃었다.
“알파 메일(Alpha Male)이 나서서 찍어 누르고 난 뒤에야 조용해졌죠.”
“알파 메일?”
우두머리?
“거 있잖습니까. 남성미 넘치시는 그분.”
레이놀드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아아.”
있지.
남성미 넘치시는, 확고한 권력자 분이.
“여하튼 그분이 화를 내고서야 진정이 됐습니다.”
강진호가 웃어버렸다.
TV에 나오는 ‘그 사람’이 버럭댔다면 천하의 CIA라도 깨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불도저 같은 양반이라면 CIA도 밀어버릴지 모르니까.
“오금 저렸겠네요.”
“방향성은 확고하신 분이라…….”
레이놀드가 겸연쩍게 웃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여하튼 부지 쪽은 거의 확정이 됐습니다.”
“그게 이리 오래 걸릴 일입니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기존에 있던 미군 기지 쪽을 확장하거나 용도 변경을 하면 그만이지만…….”
레이놀드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는 그곳에는 이미 일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안상 SOB들을 일반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게 할 수는 없지요. 이전에도 그런 이유로 사막에 놈들을 처박아두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회가 수도권을 벗어나 외진 곳에 위치한 것도 저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무인은 일반인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니 최대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않는 곳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할 부분이 많더군요. 괜찮은 곳이다 싶으면 한국의 개발 제한에 얽혀 있어서.”
레이놀드가 이마를 짚었다.
물론 난색을 표하는 정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국민을 이해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최대한 소문내지 않고 적당히 해결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야당에서 딴지를 걸지는 않는다는 점이랄까.
물론 그것도 중소 야당은 다르지만.
“여하튼.”
레이놀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치적인 문제라든가 부지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이쪽의 의지가 확고하니, 결국은 한국의 정권도 허가를 내주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쪽에 손해가 되는 일도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
“아, 잠시만요.”
이현수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 와일드하신 분의 성향 때문에 하는 말인데, 혹시 주둔 비용 보조 같은 걸 요구하신 건 아니죠?”
“…….”
레이놀드가 입을 닫았다.
“했어요?”
“……그건 제 제안이 아니라 그…… 음, 정책 기조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양반들, 큰일 날 양반들이네! 이게 우리가 요구한 겁니까? 그쪽에서 요구하는 걸 우리가 들어주는 건데, 왜 그 주둔비를 한국에 요구합니까?”
“음.”
“안 그래도 요즘 세금 때문에 애가 반 죽어가는데.”
“애?”
“……아, 현주요.”
강진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이현주 실장요.”
“그래.”
“여하튼 그 피 같은 세금을 쪽쪽 빨아가시겠다? 명분도 없이?”
이현수가 강경하게 나오자 레이놀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총회의 돈은 아닐 텐데요.”
“그럼 차관님은 국방부 말고 다른 데서 나가는 돈은 신경 안 쓰십니까?”
“……그건 아니죠.”
“주둔비는 그쪽에서 알아서 하십시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 땅을 대여하는 거니 주둔비를 내셔야죠. 그거 감면해 주는 것도 대단한 건데, 어디 돈을 받아갑니까? 상도의 없게.”
레이놀드가 슬쩍 이현수의 시선을 피했다.
여러 가지 정치 논리를 들이밀 수 있겠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니 들이밀어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얼마를 요구했기에?”
강진호의 말에 레이놀드가 살짝 머뭇한다.
“말해봐.”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한 이억 달러 정도.”
“얼마?”
“……이억 달러.”
강진호가 멍한 눈으로 레이놀드를 바라보았다.
“무, 물론 크게 느껴지시겠지만, 이건 전액이 아닙니다.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고 인원을 배치하는 데 최소한 이십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소모될 것이라 예측됩니다. 1년 운용비도 십억 달러에 육박하구요.”
“그래서 돈을 나눠 내자?”
“주한미군 방위금을 분담하는 게 정책 기조라서…….”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한국이 미국에 요구한 거고.”
“…….”
“이건 미국이 한국에 부탁하는 상황인데, 부탁을 들어주면서 돈까지 달라?”
“회주님.”
“뭐, 알아서 해.”
“예?”
강진호가 기조를 바꾸자 레이놀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나와 협상하는 게 아니니까. 정권이 어떻게 나오든 알아서 잘 협상하면 되겠지.”
“아, 감사합…….”
“다만.”
강진호가 살짝 정색했다.
“그만한 비용이 든다면 우리도 그 이상의 효용을 얻어내야겠지. 나는 주둔하는 이들에게서 그 이상의 가치를 뽑아낼 생각이니, 그건 각오해.”
“…….”
“이해했나?”
물론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했다는 말이 긍정한다는 말이 될 수는 없다.
레이놀드가 살짝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상부와 다시 한 번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확실히 기존의 주한미군과 같은 기조로 접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가면 될 일이지.”
이현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디, 남의 나라를 호구 잡으려고.’
한국이라는 국가는 미국에 대항할 수 없다. 미국이 한국에서 얻어낼 것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회는 다르다.
미국은 총회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니 이리 강하게 나간다고 해도 별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 속 시원하다.’
이현수가 딱히 미국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미국을 골탕 먹였다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손도 댈 수 없는 강대국에게 지엽적으로나마 주도권을 잡아간다는 쾌감에 가까웠다.
“그럼 그 일은 재고하는 것으로 하고…….”
레이놀드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협상만 마무리된다면 최대 한 달, 최소 이 주 내에 기지 건설을 마무리하고 인원들이 투입될 겁니다.”
“……그렇게 빨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뭔 기지 건설을 이 주 만에 한단 말인가.
또 어디서 외계인이라도 하나 잡아서 고문했나?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초적인 훈련장만 완성이 되면 텐트든 천막이든 모조리 동원하여 주둔을 시키고, 부가 시설들은 천천히 완공해 나갈 생각입니다.”
“과감해서 좋군.”
“그러니 그때부터는 회주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협의가 끝난 일이다.
“훈련은…….”
“아아.”
강진호가 손을 들어 레이놀드의 말을 막았다.
“그건 그쪽과 이야기할 일은 아니지.”
“음, 그렇습니다.”
강진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자, 그의 눈에 프랭크와 레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국은 괜찮았나?”
“예의를 갖추자면 좋았다고 대답을 해야겠지만,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망할 일정이 관광할 시간도 주지 않더군요.”
강진호가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이들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강진호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중심을 똑바로 세우는 면.
“평범한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과 무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다르다. 할 수 있나?”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강진호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뭔가 시작은 되는군.’
말로만 협의 했을 때는 현실감이 없었는데, 미국에서나 보던 이들이 한국까지 찾아온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총회가 이제는 미국과 직접 상대할 만한 역량이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 뿌듯해지기도 하고.
다만, 한 가지.
“그 부지 말인데…….”
“예.”
“총회에서 가까운가?”
“……예?”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왕이면 출퇴근 시간을 조금 줄이고 싶어서.”
“…….”
전혀 상상치도 못한 요구에 레이놀드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그,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총회의 위치를 모르다 보니…….”
“아냐. 뭐, 그냥 해본 말이야.”
강진호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레이놀드의 입장에서는 저건 절대 미소가 아니었다.
‘아, 이게 바로 나와 협상장에 앉은 이들이 느끼던 기분이구나.’
을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레이놀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