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47
#1546.
지켜보다 (1)
“상황은?”
“여전히 대치 중입니다.”
강진호가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혈마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가 알던 혈마라면 지금쯤 한껏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를 툭툭 건드려 댔겠지만, 지금의 혈마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강진호의 시선이 혈마의 뒤쪽에 앉아 있는 장민에게로 향했다.
‘세상에는 정말 천적이라는 게 있군.’
그 와중에도 힐끔힐끔 장민의 눈치를 보는 혈마를 지켜보고 있자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지?”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질 겁니다.”
혈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인들의 승부라는 건 초반에 기세를 잡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그렇지.”
덕분에 강진호도 재미를 많이 보지 않았던가.
강진호가 가장 즐겨 쓰는 병법이 배치고 나발이고 간에 닥치고 돌진하여 적의 사기를 폭파시켜 버리는 방법이다.
개개인이 강한 무인들은 사기가 오르면 끝도 없는 힘을 발휘한다.
“선기를 내주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는 거죠.”
“그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물론입니다. 저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혈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창왕은 몰라도 홍왕은 그리 느긋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곧 한계에 도달할 겁니다. 지금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처소를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
아마도 홍왕에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세상을 다 뒤져 봐도 혈마 말고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강진호도 홍왕을 저리 쉽게 말할 수는 없는데.
‘제정신인 놈이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을 텐데.’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이현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누가 유리하지?”
“유리?”
혈마가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워낙 변수가 많아서 누가 유리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
“돈을 걸라면?”
“홍왕.”
“…….”
“…….”
“뭐?”
혈마가 당당하게 말하자, 이현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리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더니.”
“미세하다는 거지. 그날그날의 운에 따라 달라질 만큼. 하지만…….”
혈마가 턱을 긁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이나마 홍왕의 손을 들어주고 싶군.”
“이유는?”
“창왕과 홍왕 중 누가 더 강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홍왕계와 창왕계 중 누가 더 강한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지.”
“흐음.”
“홍왕은 삼왕 중에서는 유달리 관대한 사람이다. 덕분에 그의 밑에는 다른 곳보다 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지.”
바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삼왕계를 찾았을 때, 진지하게 나를 상대해 준 이는 홍왕밖에는 없었다. 다른 삼왕계는…… 음…….”
바토르가 머리를 긁었다.
“문전박대를 당했지.”
“널 문전박대할 정도로 삼왕계가 대단한가?”
바토르가 히죽 웃었다.
“정확하게는 문전박대를 당했다기보다, 그놈들도 제 왕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더군.”
“……놀랄 노 자로군.”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흔했으니까.
무당파의 최고수가 도를 구한다면서 인적 드문 곳에 처박힌다든가. 개방의 방주가 세상을 돌아본다면서 훌쩍 자리를 비우고 몇 년 뒤에 슬그머니 돌아온다든가.
‘고수치고 제정신인 놈이 없었지.’
물론 강진호도 포함해서 말이다.
당시에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고수치고 멀쩡한 놈이 없던 게 아니라 어디 하나 나사가 풀려 있는 인간들이 고수가 되는 쪽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고행에 가까운 수련을 묵묵히 감내하지는 않을 테니까.
“흑왕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하는 건가?”
“무시라기보다는…….”
혈마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 하나로 지금까지 균형이 유지되었던 겁니다. 흑왕의 존재는 정말 베일에 싸여 있으니까요. 심지어 정보국에서도 흑왕의 정체만큼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나?”
“모습을 드러낼 때는 항상 검은 코트로 몸을 휘감고 다닙니다.”
“뭔 느와르 영화도 아니고…….”
“아, 흑왕의 입장에서 변명을 조금 해주자면, 흑왕이 검은 코트를 입고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느와르가 유행하기 전입니다.”
“…….”
그게 중요하냐?
그게?
“여하튼 흑왕의 존재를 계속 의식하고 있으면, 결국은 이 대치가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슬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론을 봐야 하는 거죠.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 하니까요.”
“최악의 경우?”
“교주님이요.”
“……나?”
“예, 마존이시여. 반도의 메시아며 중화의 악몽이시여. 마존께서 이곳에서 힘을 키우는 것이 저들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위대한 마존께서는 중화를 제외한 모든 곳을 복속시키고 계십니다. 유럽을 정복하셨고, 일본을 발아래 두셨으며, 미국과 손을 잡으셨습니다. 오, 저 양키들마저 발아래 두는…….”
“적당히 해라.”
“옙!”
장민의 한마디에 혈마가 바로 어투를 바꿨다.
“사실 중화는 마존을 그리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죠. 왜냐면 결국 마존께서는 좁은 반도에 갇혀 있으니까요.”
“으음.”
“한국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한은 총회는 수급할 수 있는 무인의 수와 양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받쳐 주는 이가 없다면 설사 마존께서 삼왕만큼 강해진다고 해도 처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겠지요. 하지만…….”
혈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존께서는 중국을 제외한 모든 곳을 손에 넣고 계십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중화가 통일된다고 해도 중화를 제외한 모든 곳이 마존의 깃발 아래 모여들겠죠. 그건 저들이 원치 않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서두른다는 건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제 생각은.”
혈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저 위대하신 분들의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다는 거죠.”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머지않아 싸움이 벌어진다는 뜻이로군?”
“예.”
“그럼 어떻게 되지?”
“순식간에 결과가 나올 겁니다. 둘 중 승자가 흑왕계와 전쟁을 벌이겠죠.”
“중국 정부는?”
“안전만 보장받는다면 나서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니, 여기저기에 손을 대고 있겠죠. 어차피 마존께서 도와주실 것도 아니니까.”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
“그럼 결국 이제 곧 중국이 일통된다는 말인데…….”
강진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 두려워해야 할 일이건만, 이상하게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되레 뭐랄까.
‘나도 아직 멀었군.’
이 상황에 흥분이 되는 걸 보니 말이다.
“적이 어찌 나올 것인지가 정해졌다면, 우리 측도 대처를 해야겠죠.”
이현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물론 저는 혈마의 예측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가진 게 너무 많으니까요.”
이현수가 중국 지도를 손으로 탁, 쳤다.
“특히나 혈마의 예상과는 다르게 홍왕은 참을 수 있는 한은 참을 겁니다.”
의견이 갈린다.
그러자 혈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홍왕은 욱하는 면이 있는 사람이라 인내심이 그리 깊지 않다.”
“맞는 말입니다. 중국에서도 충동적으로 저희를 찾아왔죠. 분명 그런 면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부하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한두 사람 죽고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만나본 홍왕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목숨이 만 단위로 갈리는 일에도 충동적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는 강진호도 동의했다.
‘그놈이라면 그렇겠지.’
홍왕이 정말 그렇게 충동적이었다면, 강진호와 마주치는 순간 주먹을 뻗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홍왕은 코앞에 고기를 둔 맹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끝끝내 강진호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건 이현수 쪽이 맞겠군.”
이현수가 의기양양하게 혈마를 바라봤다. 그러자 혈마가 두 눈에 살기를 담았다.
“눈알 뽑는다.”
장민의 일갈에 혈마가 다시 토끼처럼 얌전해졌다.
주도권을 잡은 이현수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창왕이 미지수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도 생각이 있다면 대치는 조금 더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이현수가 턱을 어루만졌다.
“이왕이면 조금 더 대치해 주면 좋겠죠. 저쪽은 심력이 소모되고 전력이 깎여 나가는데, 우리는 힘을 비축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 아니지.”
그 순간, 위긴스가 끼어들었다.
“기도는 자제하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직접 손에 넣어야지, 입을 벌리고 감나무 밑으로 갈 수는 없잖은가.”
이현수가 흐뭇하게 웃었다.
‘저 사람의 한국어는 어디까지 느는 거지?’
이제는 이현수가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조금 껄끄럽게 만들어줄 수는 있겠지. 예를 들면…….”
위긴스가 지도의 한 부분을 툭툭, 쳤다.
“누군가가 활개 치기 좋은 땅이 마침 창왕계의 뒤쪽에 붙어 있다든가.”
모두의 시선이 바토르에게로 향했다.
위긴스가 짚은 곳은 다름 아닌 몽골이었다.
“몽골의 전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라는 건가?”
“아닙니다.”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전사들을 국경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홍왕계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창왕계에게도 움직일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줘야죠. 이건 바토르 님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음,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이끌고 쳐들어가는 건 몰라도 전면 배치 정도야.
“그 외에도 몇 가지 해보고 싶은 게 있지만…….”
위긴스가 미소를 지었다.
“중국 내의 정보를 조금 더 얻어보겠습니다. 그 이후에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긴스가 저리 말한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위긴스를 믿고 기다려 주면 된다.
“다만.”
강진호가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저들이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여 준다는 보장은 없지.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옳은 말씀이십니다.”
“준비는 게을리하지 않도록.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마지막에 우리가 저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겠지.”
모두가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모두는 죽을 것이다.
그 무거움을 아는 이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강진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홍왕이든 창왕이든, 아니면 흑왕이든. 누가 오든 목을 따줄 테니까. 남은 떨거지들이나 상대해 주면 돼.”
“쿡쿡쿡쿡.”
강진호의 말에 바토르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감이라 해야 할지, 자만심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주인.”
“자신감이지.”
“호오.”
바토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디 그 자신감을 정말 자신감이라 불러도 될지 확인해 볼까?”
그 도발에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점심은 충분히 먹었나?”
“음?”
“저녁은 못 먹게 될 테니까 말이야.”
바토르의 눈이 투기를 내뿜었다.
“나와라, 주인. 오늘 내가 하극상이 뭔지 보여주지.”
“얼마든지.”
투기를 내뿜으며 나가는 둘을 보며 남은 이들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왜 결론이 저렇게 되지?”
글쎄요.
저흰들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