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61
#1560.
돌봐주다 (5)
실내에는 기이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강진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나름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강진호가 자리를 비운 뒤로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판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미치히로가 작게 입을 열었다.
“남을 셈이냐?”
“…….”
“뭔가를 보여준다더니?”
류이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겁이 났냐고?
그런 게 아니다.
깨달았을 뿐이다, 저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죽음은 심지어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조차 아무것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망상에 빠져 있는 이가 제명을 재촉했다는 소리나 듣겠지.
류이치가 슬쩍 미치히로를 돌아보았다.
그와 나누었던 논쟁이 생각난다.
‘난 그냥 꿈속에 살고 있었군.’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류이치 쪽이었다. 일본의 상태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배는 더 심각했다.
‘총회가 일본에서 손을 뗀다고 해서 과거의 일본이 돌아올 수 있을까?’
무리다.
그들은 인재를 잃고, 무학을 잃고, 싸우고자 하는 의지조차 잃었다.
이런 이들이 다시 바닥부터 일본의 무인계를 재건한다?
‘백 년이 지나도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할 거다.’
심지어 전쟁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희망적인 것도 아니다. 그 원래의 일본조차 총회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한 나약한 곳 아니었던가.
일본이 더 나아갈 방법은 아무리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들은 강해.”
강진호를 보고 있으니 알 것 같다.
그리고 강진호를 수행하는 자를 봐도 알 수 있다.
저들에게는 존재하고,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건 여유였다.
‘언젠가 일본도 저런 여유를 되찾을 날이 올까?’
류이치가 눈을 감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서 뭘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지.”
“그걸 이제 알았나?”
류이치가 낮은 탄식을 토해냈다.
의지만 있으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후우.”
류이치가 품 안에 들어 있는 칼을 가볍게 잡았다.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그는 이 칼이 그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칼은 그저 객기일 뿐이라는 걸.
뽑혀 나올 때를 알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뽑히는 칼은 오히려 쓰는 이를 망칠 뿐이다.
“나가려면 지금 뿐이야. 괜히 남아 있다가 끌려가지 말고, 지금 나가라.”
“…….”
“아까 그 말이 괜히 한 말이 아니야. 너도 알잖아, 저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충분히 알고 있다.
저들이 일본을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뜨렸는지 아는데,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네 목적은 이미 끝났잖아?”
“아니.”
류이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목적은 시작도 안 했어.”
“뭘 어쩔 셈이야?”
“……내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미치히로가 미간을 좁힌다.
“객기라도 부려보겠다는 것 아니었어?”
“아니야…….”
류이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일본의 무인계를 되살리는 거야. 과거의 구미들이 지배하던 그때의 일본을 되찾는 거야.”
“……뭘 어떻게?”
“남아 있는 무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지.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러니까…….”
류이치의 눈에 단호한 의지가 어렸다.
“내가 한다.”
“…….”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해 주지.”
목숨을 내던질 각오도 했다.
그런데 모욕을 못 참겠는가.
“그래서? 한국으로 가겠다고?”
“그래.”
미치히로가 미소를 입에 담았다.
“지껄이기는 잘도 지껄이더니, 너도 다를 게 없군.”
“웃기지 마!”
류이치가 살벌한 눈으로 미치히로를 노려보았다.
그가 원하는 건 돈 따위가 아니다.
“권력이 필요해.”
어차피 일본은 무너졌다. 바닥에서 아무리 사람을 끌어모으고 격려해 봐야 쭉정이만 모일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들의 권력이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친한파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친한파가 되어주지.”
미치히로가 낮은 비웃음을 흘렸다.
류이치는 미치히로의 웃음에 담긴 것이 경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저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비웃으려면 얼마든지 비웃어.’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 주는 쪽이 좋다. 그가 적의 강대함에 의지를 잃고 그저 저들의 발을 핥기로 마음먹었다고.
지금은 그걸로 됐다.
류이치의 눈이 차게 빛났다.
‘얼마든지 굴복해 주지. 하지만 내가 진짜로 너희에게 굴복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저들이 그를 더없이 신뢰할 때.
그래서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줄 때.
그때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면 된다. 그전까지는 철저하게 저들의 개가 되어줄 것이다.
류이치가 의지를 다지는 그 순간, 강진호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연단에 다시 선 강진호가 모두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마음은 정했나.”
“예!”
“좋군.”
강진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훌륭한 매국노들이다.
강진호 역시 알고 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가 그에게 협조할 생각은 아니라는 걸. 정말 한국에 협력할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득을 좇아왔을 뿐이다.
그 이득은 돈이 될 수도 있고, 무력이 될 수도 있고, 영광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들이 무엇을 얻든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결국은 힘일 수밖에 없다.
겪으면 겪을수록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대항하기에 총회가 얼마나 강대한 곳인지.
그리고 그걸 뼛속 깊이 느낄수록 이들의 의지는 옅어지고, 결국에는 완전히 총회에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지는 잘 알았다.”
강진호가 모두와 눈을 맞췄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테스트를 통해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이들만 받을 셈이다.”
“어, 어떤 식으로 테스트를 하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간단하지.”
강진호가 연단 옆으로 슬쩍 나섰다.
“일격을 버티면 된다.”
“…….”
“얻어맞고도 죽지 않는 놈들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주지. 기절하려면 선 채로 기절해라. 그럴 만한 의지가 있는 놈들만 한국으로 갈 자격을 얻는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눈이 아연해졌다.
강진호에 대한 소문을 못 들은 이가 있겠는가.
그가 야마카와구미의 수령을 일격에 쳐 죽여 버렸다는 말은 이제 일본 무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전설적인 일화다.
동아시아의 마왕.
저 중국의 삼왕과 함께 이제는 사왕이라 불리는 자.
그런 이의 일격을 버티라고?
그들이 아니라 과거 일본의 정예였던 이들도 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수로 강진호의 일격을 버티겠는가.
“테스트를 받을 이들은 나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강진호가 묘한 눈으로 모두를 돌아본다.
“없나?”
이현수가 볼멘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이, 솔직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강진호가 슬쩍 이현수를 돌아봤다.
“허들을 높이고 싶으신 건 알겠는데, 그건 총회 애들도 못합니다. 회주님이 강도를 조절해 주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살짝만 삐끗해도 죽는 건데, 그냥 다른 방식으로 하시…….”
그 순간,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이현수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에 강진호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세우던 류이치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미친놈인가?’
아무리 봐도 저놈은 맛이 갔다.
일단 강진호에게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것부터 이성이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강진호의 주먹을 그 몸으로 버티겠다고 나서고 있잖은가.
그렇다면 둘 중 하나란 뜻이다.
정말 미친놈이든가, 아니면 정말 제대로 뭔가를 결심한 놈이든가.
강진호가 앞으로 나서는 류이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이 좀 바뀐 모양이지?”
“실감했을 뿐입니다.”
“실감?”
“예. 저 따위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흠.”
강진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가 바뀌어야죠. 어느 쪽이든 철저해져 볼 생각입니다.”
재미있는 말이었다.
물론 강진호가 류이치의 대답을 신뢰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목적이 있든 한동안은 미친 듯이 날뛰겠지.’
강진호의 눈에 들기 위해서든, 지금까지 한 행동들을 면피하기 위해서든 류이치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강진호의 말을 따르고 총회의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는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강진호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이현수를 바라봤다.
이현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시키라는 말.
“나와.”
강진호가 그를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못 버티면 죽는다. 상관없나?”
“물론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진호가 류이치에게 정권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앙!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것 같은 일격에 얻어맞은 류이치가 반대쪽으로 쭉 날아갔다.
쿠우웅!
무대 벽에 처박힌 류이치의 몸이 잠시 박혀 있다가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수리비는 생각하고 쳐주십시오.”
쩍쩍 금이 간 벽을 보며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죽이지 마시라니까요.”
이현수의 두 번째 말은 딱히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류이치가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니까.
주르르륵.
그의 코와 입을 타고 피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휘청휘청.
몇 번이고 무릎이 풀려 넘어질 뻔한 류이치가 결국에는 몸을 완전히 세웠다. 그러고는 덜덜 떨면서 자세를 잡는 데 성공했다.
“네 이름은?”
“류, 류이치. 스즈키 류이치.”
“통과.”
털썩.
강진호의 입에서 통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류이치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현수가 그 광경을 보며 한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물렀다.
“일본에는 아는 의사도 없는데…….”
“내버려 두면 일어날 거다. 내상은 없을 테니까.”
“과다출혈로 죽는단 말입니다! 과다출혈로!”
“…….”
이현수가 한숨을 내쉬었지만, 강진호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또 테스트를 받아볼 사람?”
“…….”
“볼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꺼져라.”
결정적으로 그 말이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주었다.
처참한 류이치의 몰골을 본 이들은 겁에 질렸고, 큰 각오 없이 총회에 들러붙을 생각을 한 이들은 모조리 달아났다.
그러다 보니 테스트를 보겠다고 남은 이들의 수가 원래 이현수가 뽑으려던 수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져 버렸다.
“이러면 굳이 테스트를 볼 필요가 없겠는데요?”
“…….”
“쟤는 좀 불쌍하지만.”
이현수가 안쓰러운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류이치를 바라보았다.
얼굴 쪽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객기의 대가겠지.”
“…….”
“그래도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시죠. 그래야 덜 억울할 테니까요.”
“그래야지.”
강진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몸을 돌리려던 강진호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
“…….”
아무래도 억울함이 쉽게 가실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