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66
#1565.
도전받다 (5)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드높은 빌딩으로 검은색의 세단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에 맞춰 건물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빌딩 앞 도로까지 나와 긴장된 자세로 차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차가 멈춰 서자마나 뒷문을 연 경비들이 고개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음.”
차에서 내린, 나이가 지긋한 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비서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향했다.
인사를 한 경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 떨려 못 살겠네.’
지금 차에서 내리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기업의 총수들이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들이 한곳을 향해 줄줄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신기함과 동시에 압박감을 느낄 텐데, 태광에서 월급 받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오죽하겠는가.
절로 목 뒤가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후우.”
세단들이 주차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경비가 이마를 훔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시선에 빌딩의 최상층이 들어왔다.
같은 땅을 밟고 있지만,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저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허허허, 다들 바쁘니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원.”
“최 회장님은 아직 안 오신 것 같은데?”
“쯧쯧쯧, 이렇게 소식이 늦어서야. 최 회장님 병원에 계시잖은가.”
“예? 뉴스에는 그런 말이 없던데…….”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겠는가. 회장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면 당장 주식부터 요동을 치는데.”
“하긴 그렇습니다.”
회장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서로 마주한 이들은 서로 같은 파이를 나눠 먹는 경쟁자들이다. 웬만한 대기업치고 서로 사업 분야가 겹치지 않는 이들이 없다.
그러니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뱃속에는 칼을 숨긴다. 이것이 사업가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다들 건강 주의하세요.”
장명구 NF 그룹 총재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도 언제 건강이 나빠질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잖습니까. 빈자리를 보니까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맞습니다, 회장님.”
몇몇이 겸연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건강관리도 좀 하고, 비싼 보약이라도 좀 사다 먹으려고 하는데…… 왕회장님들이 너무 정정하시니까 이거, 엄살 소리 들을까 봐.”
“과하게 정정하시죠, 과하게. 아이고, 죽겠습니다. 평생 두들겨 맞았는데, 아직 더 패시려고 하니.”
회장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대한민국을 쩌렁쩌렁 울리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서열은 있다.
보통은 재계 순위로 서열이 나뉠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이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왕회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지금의 회장들이 후계자로 수업을 받을 때부터 그들의 아버지대와 호형호제하던 이들이다. 굳이 따지자면, 삼촌뻘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재계 서열이 높다고 해서 아버지대의 인물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다들 두 사람만은 재계 순위 따위와는 관련 없이 어른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지금 그들을 소환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 회장님이 왜 또 심통이 나셨답니까?”
“들은 것 있으십니까?”
“말이야 빤하지요. 오래 못 봤는데 친분이나 나누자. 그런데 언제 정 회장님이 진짜 친분을 나누자고 사람 부른 적 있었습니까.”
“저는 이번에는 조금 압니다.”
장명구가 살짝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마 신생 기업 중 하나가 정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입니다. 듣자하니 MK라고 하던가.”
“MK라고 하셨습니까?”
“예. 최근에 생긴 곳이라더군요. 요식업 쪽이라든가, 부동산 쪽이라든가.”
MK라는 말이 나오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반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반쯤은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반응을 본 장명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본 이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정홍근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왔는가?”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강녕하셨습니까!”
“아이고,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인사가 오간다.
대기업의 총수라는 신분을 걷어내고 본다면 적당히 나이가 있는 노신사들의 회합 자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그걸 위해 만들어진 자리니까.
테이블에 두 자리 있는 상석 중 하나에 앉은 정홍근이 가만히 웃었다.
“다들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거,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이런 자리라도 만들어야 얼굴도 한 번 보고 하지.”
“하하하, 회장님이 부르시면 와야지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홍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대통령이 불러도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정홍근의 말에 모두 모여주었다.
이럴 때, 정홍근은 자신이 가진 힘을 실감한다. 권력과 재력, 그리고 연륜과 신분. 그 모든 것이 모여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이게 내 힘이지.’
나빴던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빈자리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워낙 바쁘다 보니 다 오기는 힘들지요. 회장님께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합디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다 공사다망하신 분들이니까.”
그러면서도 정홍근은 빈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 병원에 계신 분도 있는 것 같은데?”
“영 건강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번에 우리 암 센터로 옮기라고 했는데도 싫다고 하십디다.”
“쯧쯧쯧, 다 늙어서 자존심은.”
빙그레 웃은 정홍근이 입을 열었다.
“좋게 좋게 덕담이나 나누고 식사나 같이하면 좋겠지만, 바쁘신 분들을 오래 잡아두고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럽니다.”
다들 살짝 묵직한 얼굴로 정홍근을 바라보았다.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다들 실감하고 계시지요?”
“그야 뭐, 다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좋은 시절은 다 갔지요. 이제는 근근이 먹고사는 길이나 궁리해야겠습니다.”
“어이쿠, 회장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이거, 입에 풀칠이나 하겠습니까?”
너스레를 떠는 회장들을 보며 정홍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게 사람이지.’
가지고 있는 주식만 몇 조에서 몇 십 조를 넘어가고, 가지고 있는 현금만 조 단위가 되는 이들이 굶어 죽겠다는 말을 입에 올린다.
평범한 이들이 보면 가증스럽다고 욕을 하겠지만, 정홍근은 알고 있다. 이들이 딱히 욕심이 많아 이러는 게 아니다.
인간은 똑같다.
천만 원을 가진 이들은 이천만 원을 벌고 싶어 하고, 십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이십억을 벌고 싶어 한다.
그 돈의 단위가 십조가 되었다고 해서 만족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만족이란 가진 돈의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만한 사업을 굴리는 이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돈에 미쳐 있는 이들. 아무리 벌고 벌어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들이다.
“다들 먹고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새 영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다들 대기업이 문제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정부에서는 우리보고 한 푼이라도 더 내놓으라고 압박을 하지 않습니까.”
“요즘만큼 서러운 때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다고.”
“좀 심하기는 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국가에 해준 게 얼만데.”
정홍근이 빙그레 웃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뭉쳐야지요. 어디, 다른 이들이 저희의 고충을 이해나 해주겠습니까? 사정 아는 우리끼리 잘 뭉쳐야 저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겁니다.”
“회장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대충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정홍근이 가만히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정홍근이 가만히 시선을 돌려 앉아 있는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좀 문제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문제라고 하시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영 이쪽이랑 척을 지려는 곳이 하나 있어서.”
“아, 그래요?”
장명구가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회장님과 척을 지려고 한다면 기업 쪽은 아닐 거고, 기관입니까?”
“기업입니다.”
“예?”
장명구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업이 회장님과 척을 지려고 한다고요? 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회장님이 오해하신 건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오해라고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 손자 놈이 그놈들에게 끌려가서 폭행을 당한 일이라…….”
다들 고개를 번쩍 들고 정홍근을 바라봤다.
“손자분이라 하시면…….”
“아닙니다. 후계자는 아니고, 우리 명철이 놈이 폭행을 당했습니다.”
“저런! 범인은 잡으셨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정홍근이 목소리에 노기를 담았다.
“검찰도, 경찰도 수사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쪽에서 돈을 제대로 푼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면 정치인 놈들 뒤를 열심히 닦아주고 있든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장님의 손자를 폭행한 이를 수사조차 하지 않는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묘한 분위기가 오갔다.
여기에 있는 이들이 눈치가 없는 사람일 리 없다. 몇 마디와 미리 가지고 있던 정보만으로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댔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정권에서 비호하는 이들을 저희가…….”
“정권과 싸우자는 게 아니에요.”
정홍근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권이 봐주는 쪽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정권과 관련 없는 부분은 내버려 둘 수 없다, 이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나 버리면 정부 쪽이나 그놈들이 우릴 얼마나 우습게 보겠습니까? 그런 인식을 한 번 줘버리면 다음부터는 호구 잡히는 겁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보여줘야지요.”
“그럼 어떻게…….”
정홍근이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에 명철이 놈을 건드린 놈이 MK라는 곳의 회장이라고 합니다. 꼴에 회장이니 어쩌니 하는데, 이쪽으로는 사과하러 들르지도 않았습니다.”
정홍근이 살짝 이를 갈았다.
“그러니 버릇을 고쳐 놓아야지요. 듣자하니 그놈들이 카페 프렌차이즈를 한다는데, 유통망만 살짝 건드려 준다면 며칠 가지 않아 손발 들지 않겠습니까?”
“으음.”
다들 무거운 얼굴이었다.
정권이 비호할지도 모르는 곳과 척을 진다는 건 부담스럽다. 하지만 정홍근의 말대로 꼬리를 내리는 것도 마뜩찮았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정홍근이 뼈만 남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퉁퉁, 쳤다.
“도와만 주시면 됩니다. 사례는 섭섭잖게 하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제가 받을 테니! 여러분은 그저 한 손씩만 거들어주시면 됩니다.”
“아이고, 회장님. 사례는 무슨 놈의 사례입니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맞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야 뭐 별문제가 있겠습니까?”
“우리 쪽에서 그쪽에 식자재를 대고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 한 달 정도 잠그는 거야 별문제도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권과 사이가 좋은 놈을 우리 쪽에서 데리고 올 수도 있겠습니다그려.”
여기저기서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태광이 앞서서 책임을 져준다면 다른 곳에는 큰 부담이 없다. 정권이 노해도 태광이 그 분노를 받아줄 테니까.
모두가 각자의 주판을 튕기는 그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