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80
#1579.
파악하다 (4)
철컹!
끼이이이익!
쇠창살이 거슬리는 소음을 만들어내며 활짝 열렸다.
고한봉은 앞장선 교도관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쾌한 냄새.
쇠 냄새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향, 그리고 락스 냄새가 제멋대로 뒤섞여 코를 찔러 댔다.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니건만, 이 교도소의 냄새는 언제나 고한봉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과거, 교도소에 투옥된 경험이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건지도 모른다.
‘영광의 상처라…….’
모르겠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항하고 투쟁하고 마침내 쟁취하기 위해서 감옥에 가는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이다.
글쎄.
그 기억이, 그 상처가 고한봉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가 쟁취하려 한 것을 지금 고한봉은 손에 넣었는가? 그의 손으로?
글쎄.
글쎄.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의 잔재를 털어버린 고한봉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코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이 불쾌한 향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코는 금방 마비되어도 불쾌함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그건 지금 그가 대면해야 하는 존재가 그의 많은 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깁니다.”
“…….”
고한봉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열게.”
“총리님, 그건…….”
“열어.”
“……예.”
교도소장이 눈짓을 하자, 교도관이 열쇠를 들고 문을 딴다. 그러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교도관과 함께 들어가시는 것이…….”
“아무도 들어오지 말게. 자네들은 자리로 돌아가. 듣는 사람이 없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교도소장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치 빠른 행동을 보면서 고한봉이 살짝 시선을 돌렸다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불쾌한 향.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소리.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작은 몸을 한 노인이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일정하게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
탁자 옆으로 보이는, 높이 쌓아 올린 문서 더미들이 고한봉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니.
문서 더미로 향한 시선은 이내 노인의 등으로 향했다.
작다.
너무도 작다.
한때, 고한봉은 이 등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등이라고 여겼다. 저 등은 언제나 그를 이끌고, 그들을 이끌었으며, 나라를 이끌었다.
민주화의 등불.
너무도 찬란해서 그저 뒤를 따르기만 해도 벅찼던 사람.
이 나라의 모든 이에게 빚을 남긴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의 말년은 이토록 초라하고 서글프다.
대가를 바란 적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사람의 말년이라기에 이건 너무 가슴 아픈 모습이 아닌가.
“선배.”
“…….”
김명찬 전 총리는 고한봉의 말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고한봉은 김명찬이 무엇을 쓰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둘 수가 없다.
지금 써 내려가는 것이 무엇이든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무너져 버릴 것 같으니까.
“선배, 접니다. 한봉이.”
김명찬의 손이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김명찬의 눈을 본 순간, 고한봉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광인이 되었다는 사람.
미쳐 버렸다는 사람.
그 소문의 주인공의 눈이라기에 김명찬의 눈은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예전 그가 보고 흠모하던, 그 열정 넘치는 눈은 아니지만, 세월과 함께 김명찬의 눈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웬일인가?”
“……제가 선배를 찾아오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렇지. 그래, 그랬지.”
김명찬이 탁자를 옆으로 치운다. 탁자에 부딪쳐 문서 더미가 우르르 쓰러졌지만, 김명찬은 귀찮다는 듯이 문서 더미를 발로 쭉 밀어버렸다.
무언가를 써 내리긴 했지만, 그 쓴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
이해하기 어렵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앉게.”
“예, 선배.”
고한봉이 벽에 기댄 김명찬의 반대편에 좌정하고 앉았다.
“……이관을 거부한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제 사람들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조금 더 좋은 시설로 옮겨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뭐가 달라지나?”
김명찬의 말에 고한봉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퉁명한 게 아니다.
그저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시설이 좋아진다고 해도 교도소일 뿐이지. 이곳에서 몸이 편하고 아니고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선배님.”
“배려는 고맙네. 하나…….”
김명찬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게는 지금 그런 배려가 필요 없네.”
고한봉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진즉에 찾아와야 했다.
하지만 올 수가 없었다. 김명찬이 이곳에 갇혀 있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그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칼날 아래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이런 시절에 뒤처져 몰락하는 모습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선배님.”
“총리가 되었다지?”
“……예. 선배님이 있었다면 감히 제가 오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겸손이 과하네. 내가 천년만년 그 자리에 있을 것도 아니고. 그리고 총리로서는 자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나는 그릇이 안 됐어.”
“그렇지 않습니다.”
김명찬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말을 끌고 싶지는 않군. 총리는 어려운 자리야. 지금은 더욱 어려운 자리지. 자네의 짐이 막중할 걸세.”
“예, 선배님.”
“그래. 덕담은 그 정도면 됐고, 왜 찾아왔는가?”
“제가 선배님을 찾아오는 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총리가 그렇게 한가한 자리던가. 그렇다면 자네가 지금 일을 잘 못하고 있겠군.”
고한봉이 고개를 숙였다.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고한봉이 고개를 들어 김명찬을 바라봤다.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조언?”
“예, 선배님. 생각보다 더 어려운 자리라…….”
“강진호군.”
“…….”
고한봉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김명찬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지, 어려운 일이야.”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고한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는 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이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 있습니다. 물론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국가의 힘이 강해서 개인을 종속시켜야 한다고 믿는 제국주의자나 정부주의자는 아닙니다. 차라리 자유주의자에 가깝죠. 하지만 그는…….”
“범주를 벗어나 있지.”
“예.”
고한봉이 고개를 내저었다.
“선배님이 여기 계시는 동안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선배님의 일 당시에 중국과 자체적으로 거래를 한 그들이 이제는 알아서 미국과 딜을 하고 주한미군의 수를 늘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리 정부에게 새로운 미군 사단이 주거할 땅을 내놓으라고 겁박하고 있습니다.”
“으음.”
김명찬이 살짝 눈을 감았다.
이건 뉴스에서도, 신문에서도 볼 수 없는 소식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이제는 제가 총리로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국민이 제멋대로 타국과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데, 저희는 아무런 중재도, 간섭도 할 수 없습니다.”
“무력한가?”
“……예. 무력합니다.”
김명찬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고한봉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김명찬을 바라보았다.
뭐가 우스운 걸까?
“미안하네. 조금 재미있어서 말이야.”
“……어떤 점이 재미있으시다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말대로 자네는 제국주의자도 아니고, 정부주의자도 아니지. 우리는 사람을 제멋대로 통제하려는 군사정권에 목숨을 걸고 대항했네.”
“예.”
“그런데 이제는 국민이 국가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고 곤란하다 하는군. 우습지 않은가? 서는 높이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진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군.”
“선배님, 그런 게 아닙니다.”
고한봉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민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체계 안에서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세워 살고 있는, 괴뢰국의 수장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
“대한민국의 총리로서를 떠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입니까? 다른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쉬쉬하면서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라는 말씀이십니까?”
“이보게, 한봉이.”
“예, 선배님.”
“투정 부리지 말게.”
“…….”
고한봉이 멍한 눈으로 김명찬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자연인이나 할 소리야. 대한민국의 총리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거지. 총리든 대통령이든, 국가를 운영할 책임을 진 이들에게 고민은 허락되어도 투정은 허락되지 않네. 언제 어떤 때든 감정을 떠나 최선의 선택을 하려 애써야 하는 법이지.”
“…….”
“그걸 지키지 못한 이가 어찌 되는지 내가 내 입으로 말해야 할까? 자네가 지금 직접 그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
“…….”
“변명하지 말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거슬릴 뿐이지. 이만큼 기어 올라왔는데도 내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자리는 내가 차지할 수 없다는 게 거슬리고 짜증 날 뿐이잖은가.”
“선배님!”
“나는 그랬네.”
김명찬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그랬어.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댔지만, 이곳에 처박혀 있으니 알겠더군. 내가 왜 그랬는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고한봉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선배님, 대체…….”
“그때는 뭐가 달랐는가?”
“예?”
“거국적인 대의, 미래를 위한 열의. 끌끌끌, 웃기는 소리지. 나는 그저 저 군사정권 놈들이 싫었을 분이야.”
“…….”
“미래를 위해서 목숨을 희생하는 이들? 물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그저 그놈들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고 싶었을 뿐이야. 그 열의 하나로 엿을 처먹이다 보니 어느새 내가 민주화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 있더군. 우습게도 말이야.”
“선배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포장하지 말란 이야길세.”
“…….”
“스스로를 포장해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게 만들지 마. 스스로 최면을 걸지 말게. 자네나 나나 그냥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별것 아닌 이유로 사람을 트집 잡아 괴롭히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야.”
고한봉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김명찬의 말이 충격적이어서?
아니.
김명찬의 말이 그의 어딘가를 너무도 아프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주지.”
김명찬이 웃으며 말했다.
“대항하지 말게.”
“…….”
“저항하지 말고, 싸우지 말게. 납작 엎드려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게. 그는 그런 사람이야.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지. 자네가 그를 거슬려 할 이유가 없어. 그가 대체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
“선배님, 하지만…….”
“알고 싶나?”
“예?”
김명찬의 얼굴이 천천히 변해갔다.
떨리는 눈.
창백해지는 안색.
갈 곳을 모르고 덜덜 떠는 손끝.
“알고 싶나? 알고 싶어? 그런 것도 모르고 그에게 대항한 자가 결국 어떤 꼴을 당하는지 알고 싶나? 살아서 보는 지옥이 뭔지 알고 싶나? 나와 같은 꼴이 되어야 이해하겠나?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알고 있나?”
“서, 선배님?”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놈이 뭘 알겠다고 지껄이고 있어! 이 병신 새끼야! 아아아아아아악!”
김명찬이 갑자기 고한봉을 향해 덮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