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88
#1587.
다시 찾다 (2)
쪼르르륵.
잔에 술이 따라진다.
고한봉은 술잔에 따라지는 술을 보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케라…….’
고급 일식점에 왔으면 사케를 먹는 게 기본이기는 하지만, 시절이 워낙 하수상하다 보니 사케를 먹는 게 부담스러웠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아…… 아닙니다.”
고한봉이 한 손으로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사케가 좀 부담스럽군요.”
그의 건너편에 앉은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지만, 총리님은 조금 다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 일본은 참 고마운 땅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일이 없지요.”
이현수가 미소를 지으며 술 주전자를 내렸다.
“이번 일에 중재를 잘해주셔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주님께서도 감사를 표하시더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강진호는 고한봉이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뉴스도 잘 안 보는 양반이다 보니 정치인에 관해서는 관심 자체가 없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니까, 뭐.
“감사합니다. 회주님께서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습니다.”
고한봉이 더없이 밝은 얼굴을 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얼굴.
당연히 이현수는 그 표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정치인의 얼굴이라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입장 바꿔 거꾸로 생각을 해봐도 지금 고한봉이 즐거울 이유가 없었다.
강진호 본인도 아닌, 그의 입장에서는 새파란 애송이나 다름없는 이현수를 상대하며 말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 즐거울 이유가 있겠는가.
이현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그에게 있어서 고한봉은 집어삼켜 뒤흔들어야 할 타깃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저쪽도 마찬가지겠지만.
“해주셔야 할 일이 막중합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뭘 할 수 있을지…….”
“도와달라는 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고한봉이 술이 담긴 잔을 잡아 들었다. 그러자 이현수도 잔을 들어 보조를 맞췄다.
쨍.
허공에서 술잔이 가볍게 충돌한다.
고개를 살짝 돌려 술을 단번에 넘겨 버린 고한봉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술 주전자를 잡았다. 비어버린 이현수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고한봉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쉽지 않습니다.”
“…….”
“예전에는 하나만 고려하면 됐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저들이 강한 부분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가 강한 부분으로 그걸 막아낼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죠.”
고한봉이 살짝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강합니다. 저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아직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눈부신 발전의 결과로 이제는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계까지는 왔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기에 균형을 잡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들의 수장들을 찌를 칼을 가지고 있지만, 저들은 우리 국민들을 노릴 대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현수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총회가 저들의 어둠을 잡고 정치인들을 휘두를 능력을 손에 넣었다지만, 드러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막아줄 수는 없다. 저들이 마음먹고 파상공세를 해 댄다면,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대가 시대지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적이 아니라 국민부터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대놓고 불법적인 일이라든가 과해 보이는 일은 하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현수가 가라앉은 눈으로 고한봉을 바라보았다.
“총리님은 어떻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불법적이고 과한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국민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총리님 스스로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까?”
찔러 들어온다.
고한봉이 고개를 들어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어린놈이…….’
입에 독이 발려 있다.
국민이라는 핑곗거리가 없으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음…….”
살짝 낮은 침음을 낸 고한봉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웃어라.
상대에게 내 기분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웃어야 한다. 몸이 지옥불에 불탈 때도 웃어야 정치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 법이다.
“제가 중요하겠습니까?”
“…….”
“저는 그저 메신저일 뿐입니다. 이 실장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저희는 그저 장기판에 올라와 있는 말입니다. 말에게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요.”
“장기판의 말이라…….”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총리님 정도라면 옆에 앉아 훈수 두는 사람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신 분은 지금 장기판에도 올라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죠. 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요것 봐라?’
이현수가 마주 웃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니, 나한테서 뭘 얻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정석적이기는 하군.’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박수를 쳤을 만한 대처였다. 공직을 맡고 있는 이에게 개인의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권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내가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느냐다.
고한봉은 몇 마디 말로 자신의 역할을 청와대의 꼭두각시로 한정지어 버렸다.
훌륭하다.
다만…….
그렇게 순순히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총리님.”
이현수가 가만히 고한봉을 보며 물었다.
“거래라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친교라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발을 빼는 이와는 그저 거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죠.”
고한봉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 말은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고한봉이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탁.
물을 마셔 입을 헹군 고한봉이 묘한 시선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잔에 금이 가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잔을 고쳐 보겠답시고 이것저것을 덧대기 시작하면 흉해지기만 할 뿐이지요. 관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현수가 술을 들이켜고는 잔을 앞에 놓았다.
탁.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잔을 치자 쩌적, 금이 간다.
“물론 이걸 다시 붙일 수는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화인과도 같죠. 때때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요.”
“다만.”
이현수가 가만히 앞에 놓인 잔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새 잔을 들어 그의 앞에 놓았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는 있겠죠.”
“…….”
고한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된 게 만만한 이가 없군.’
그의 지위가 올라가는 만큼 그가 상대해야 할 이들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총회에서 나온 젊은이에게 이렇게 압박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서류로는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이현수.
총회의 이인자.
그 강진호의 오른팔이자 총회의 외치를 담당하는 자.
정부에서는 총회가 이토록 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로 이현수의 존재를 꼽기도 한다. 강진호가 없었다면 절대 총회가 지금의 총회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마찬가지로 이현수가 없었어도 총회가 지금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현수가 지금 고한봉을 잡아끌고 있다.
그의 눈이 고한봉의 속을 낱낱이 보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운 관계라고 하셨습니까?”
“예. 중요하죠. 새로운 관계. 다만,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래서 새로운 부분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처럼.”
“정확합니다.”
이현수가 미소를 지었다.
“총리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신다면 저희도 이 관계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적당한 중재자의 위치에서 발을 떼지 않으신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생기겠죠.”
엉덩이 빼지 말고 앞으로 다가오라는 뜻이다.
그게 설령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호굴이라 할지라도, 총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달아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쪼르르르륵.
고한봉이 술을 따라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탁!
잔을 내려놓는 손이 경쾌한 동시에 무겁다.
“곤란하네요.”
고한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저는 총회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전임의 일도 있고……. 그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평범한 이가 그쪽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나서라 하시니.”
“그게 그 자리 아니겠습니까?”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수의 말이 맞다. 이 자리는 개인의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 자리다. 우는소리를 늘어놓을 거라면 차라리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럼 어쩔 것인가.
‘선배님.’
머릿속으로 김명찬을 떠올린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걸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보죠. 다만!”
고한봉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봤다.
“제가 그렇게 한다면 총회도 달라져 주십시오. 전향적으로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겠다 약속해 주십시오.”
이현수가 낮게 웃었다.
“약속은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럴 권한이 없어서.”
“…….”
“다만, 한 가지는 확신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먼저 공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임의 일 역시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와중에 그분이 갑자기 칼을 쑤셔 박은 것뿐이죠.”
“으음…….”
“이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쪽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은 우리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고한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말을 다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를 신뢰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때다.
‘다른 길이 없지.’
어차피 총회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그들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사실 이현수가 먼저 말할 일도 아니다.
그가 먼저 나서서 고개를 숙여야 할 일이었다.
자신이 했어야 할 일을 대신해 준 이현수에 대한 고마움과 지금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이현수에 대한 껄끄러움이 동시에 피어난다.
고한봉이 한 손을 뻗어 이현수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김명찬의 사건으로 크게 벌어진 정부와 총회 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찾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