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03
#1602.
일어나다 (2)
“그럼 일단 가닥은 보육원으로 잡겠습니다. 그런데 저번에는 학교도 설립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보육원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그랬죠.”
“그런 이제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강진호가 살짝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
이유라…….
강진호가 조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보육원의 아이들은 또래나 학부모들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받습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의식이 올라가고, 기본적인 존중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도 그 멸시의 눈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박유민이 그렇고, 한진성이 그랬다.
그들이 딱히 괴롭힘을 받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괴롭히려는 이들이 나온다.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지.’
짐승들도 약한 개체는 괴롭히려 들고 무리에서 쫓아내려 한다. 인간도 결국 동물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따로 학교를 설립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보육원의 규모를 키우고, 그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든다면, 적어도 그런 괴롭힘에서는 자유롭겠죠.”
“음,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진짜 아이들을 위하는 게 아닙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평생 동안 그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지켜줄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제 삶을 찾아야 할 아이들이죠. 어쩌면 그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맞이해야 할 현실은 보육원이나 학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혹독할지 모릅니다.”
조규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건 그냥 눈을 가리는 것에 불과하죠. 진짜 아이들을 위한다면, 그 아이들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좀 더 손이 가고, 좀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요.”
조규민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예?”
“제가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에 다니시던 분이 어느새 이런 확고한 교육 철학을 가지게 되었군요. 교육자로서 뿌듯합니다.”
“……이사장 대리였고, 딱히 교육은 한 적이 없는 걸로 압니다만?”
“넘어갑시다.”
조규민이 피식 웃었다.
“그럼 일단은 보육원 쪽만 생각하면 되겠군요. 일차적으로 몇 개 정도를 오픈할 생각이신지?”
“그건 아직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습니다만…… 처음에는 한 열 개 정도면?”
“다섯 개로 하시죠.”
“…….”
“열 개는 너무 과합니다. 규모에 따라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서 일할 인력을 충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음.”
확실히 그런 문제는 있다.
“개인적으로 제안을 좀 드리고 싶은데.”
“예.”
“혹시 성심 말고 다른 보육원들을 인수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인수요?”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잘 운영되고 있는 보육원을 왜 인수해야 한단 말인가.
“예. 이게 조금 민감한 문젠데…….”
조규민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보육원 쪽을 알아보면서 나름 실태 조사를 좀 했습니다만……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보육원들이 꽤 있었습니다.”
강진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좀 더 자세하게.”
“사실 성심 보육원의 아이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정말 헌신하는 원장님이 계셨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진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진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 조규민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보육원을 운영하지만 딱히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이사장들의 존재가 문제겠죠.”
“……그럼 왜 보육원을 운영합니까?”
“보육원을 운영하는 복지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자리가 좋은 명함이 되거든요.”
강진호가 담배를 깊이 빨았다.
배 속에서부터 역겨움이 밀려오는 느낌이다.
아무리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분야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사장은 의욕이 있지만, 능력이 모자라서 경영이 악화된 보육원들도 수두룩합니다.”
“음, 그건…….”
“기본적으로 보육원은 국가의 지원, 재단의 출연, 그리고 사람들의 후원으로 운영비를 마련합니다. 국가의 지원이야 다들 대동소이 하지만, 후원을 따낼 능력이 부족하거나 재단 출연금을 다 까먹어서 숨만 붙어 있는 곳도 많습니다. 당연히 이런 곳의 아이들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으음.”
“보육 교사들에게 문제가 있는 곳도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육아라는 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입니다. 아이 하나만 키워도 멘탈이 나가 버릴 판인데, 수십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게 쉬울 리가 없죠.”
이건 바로 납득이 갔다.
강진호만 해도 보육원 아이들이 주변에서 우글대면 정신줄을 놓아버리니까.
“문제는 보육 교사라는 직업이 그리 페이가 좋은 직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낮은 월급을 사명감과 의무감으로 버텨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겠죠.”
“네, 그렇습니다.”
“흐음.”
“사람이 자주 바뀔수록 보육의 퀄리티는 낮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이 계속 머물러 있어도 문제가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강진호가 턱을 긁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처음 성심 보육원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육원은 문을 닫기 일보직전이었고, 보육원의 아이들은 행복하기만 했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돌이켜 봐도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던 원장 수녀님이 있는 곳도 겨우 그 정도였다는 의미다.
물론 성심과 비할 수 없이 더 훌륭한 보육원도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성심에 비할 수 없이 상황이 좋지 않은 보육원도 많을 게 분명했다.
“사실 그건 국가가 관리해야 할 일 아닙니까?”
“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요?”
“보육원 아이들은 투표권이 없습니다.”
“…….”
“가족도 없고, 투표권도 없죠. 다시 말하자면, 그 아이들이 불행해져도 당장 정권에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죠. 당장 눈에 보이는 일들이 먼저 처리됩니다.”
“음.”
“새로운 보육원을 만드는 것도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 상태가 좋지 않은 보육원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겁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예.”
“그런데 제가 보육원이 보육원을 인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물론 그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일단은 재단 자체를 넘겨받아도 되고, 경영권을 포기하게 만들어도 되고.”
조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마음으로 보육원을 시작했지만 능력이 부족한 분들은 적당한 보상으로 설득할 수 있을 것이고, 애들을 제 치적 삼아 이용하는 것들은…….”
조규민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건 굳이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해했습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좋은 일을 위해서 폭력을 쓰면 정당하다?
물론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강진호는 죄를 짓는 걸 딱히 꺼려하지 않으니까. 평소처럼 목적을 위해서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을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그 외에도 법적인 문제나 행정적인 문제가 있지만, 이건 정부 쪽에서 알아서 하겠죠.”
강진호가 웃어버렸다.
“너무 무책임한 것 같은데.”
“좀 무책임해져도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다시 승인받는다고 찾아갔는데 몇 번이고 꼬치꼬치 캐묻고 짜증 부리던 공무원들이 어디서 전화 한 통 받더니 새색시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착한 척을 하더군요.”
“…….”
강진호가 살짝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조규민이 강진호의 얼굴을 판 게 아니라, 강진호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윗선에서 다이렉트로 전화가 내려왔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원리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협조성이면 북한에도 보육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강진호 씨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좋은 건지…….”
“물론 좋은 거죠.”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럼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예. 부지가 확정되고, 인수할 만한 보육원이 우선 선정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강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 할 텐데…….”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곤란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같이하시죠.”
강진호의 입에서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조규민이 선수를 쳤다.
강진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네. 그럼 다음에는 꼭이요.”
“물론입니다. 요즘 안 그래도 제가 현수 형님보다 천대받는 것 같아서 짜증이었는데, 제대로 한 번 사 주시죠.”
“꼭 그럴게요. 그럼.”
“예.”
강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회장실을 벗어났다.
1층으로 내려온 강진호가 가만히 걸어 입구로 향했다.
“아, 죄송합니다. 차를 미리 빼놓지 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괜찮아요.”
“그럼 차가 지하 3층에 있는데, 바로 가실…….”
“괜찮습니다. 차는 내일 가져갈게요.”
“아, 네. 그러시면…….”
강진호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현관을 벗어났다.
건물 앞으로 나온 강진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천천히 집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걸리겠지.’
그래도 오늘은 왠지 두 발로 걷고 싶다.
천천히 걸어가는 강진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지.
갑자기 모든 세상이 그에게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충분히 했으니 네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검의 시작을 다시 되찾고…….
총회의 시작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이 현대를 살아가게 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래, 무엇이었는지를.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좌우로 솟아오른 마천루 사이로 검은빛 하늘이 보인다.
‘수녀님.’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저는…… 저는 여전히 수녀님이 말하는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한 그 말이…… 지금의 강진호에게는 너무도 먼 말 같았다.
어쩌면 평생을 노력해도 당당히 그 말을 이루었다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은 더 빨리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주세요.
강진호가 눈을 떴다.
마천루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살짝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원장 수녀님이 그를 향해 미소 지어주는 것 같다.
강진호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저 미소를 자주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강진호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연과 뒤섞인 밤공기가 그의 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