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13
#1612.
침략하다 (2)
MK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거의 반쯤 눈을 감은 이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자판을 두드려 댔다.
“보고서는? 끝났어?”
“아직! 5분 더 필요합니다!”
“미쳤어? 실장님이 2시까지 가지고 오라 했단 말이다! 지금이 2시 10분이야!”
“5분! 5분이면 됩니다!”
“……들어가는 건 나라고, 인마!”
수북히 쌓인 커피 컵과 카페인 음료들이 이들이 지금 어떤 지옥을 겪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나름 무인 출신들이라 기초 체력이야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들인데도, 지금 그들의 얼굴은 좀비를 방불케 했다.
“보고서! 보고서 나왔습니다!”
“들어간다!”
상석에 앉은 이가 부리나케 튀어와 보고서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실장실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혹시나 보고서에 잘못된 곳은 없는지 체크하는 신기를 보인 이가 실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실장님! 최 부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예!”
최 부장이 실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한마디는 해야겠어.’
새벽 2시까지 야근해서 화가 났냐고?
천만에.
중요한 건 지금 시간이 새벽 2시라는 게 아니다. 최 부장이 마지막으로 집에 들어간 게 3일 전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그들이 무인이라서 체력이 남아돈다고 해도 이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
실장실 안으로 들어간 최 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왔어요?”
이현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
머리는 떡 져서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책상 한쪽에는 벗어놓은 양말이 꼬릿꼬릿하게 널려 있다.
“……실장님, 언제 집에 가셨죠?”
“기억이 안 나는데? 어…… 언제 갔더라? 어?”
그만두자.
이 사람에게 불만을 토하는 건 괴롭힘의 영역이다.
“그러다 죽습니다.”
“아직…… 아직은 괜찮아요, 아직은. 그보다 직원들은?”
“……버틸 만합니다.”
이 말을 직원들이 들었다면 피를 토하면서 ‘이게 버틸 만한 거면 세상에 힘든 놈이 어디에 있냐!’를 외쳤겠지만, 지금 최 부장은 도저히 이현주에게 불만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사람이면 그럴 수 없지.
“그래서…… 보고서는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출력을…….”
“화면이 잘 안 보여서…….”
“…….”
그러다 죽어요.
이현주가 안경을 벗고 한숨을 내쉬더니, 옆에 놓인 반쯤 식은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도 무인이라 카페인이 큰 효과를 내지는 못하겠지만, 마시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 낫다.
“음, 이러면 대충 인원은 확정됐네요.”
“예. 어떤 분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죠, 뭐.”
“시, 실장님이 가시면 저희 작살납니다.”
“별수 없잖아요. 지금 황 사장님은 절대 빠지면 안 되시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이 일은 무인과 사업체의 연계가 중요한데, 둘 다 알고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끄응,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이현주가 보고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추진해 주세요.”
“예, 실장님. 일단 좀 퇴근해서 주무십시오.”
“하던 것만 끝내고요. 밖에 직원들 전부 퇴근시켜 주세요.”
“예!”
최 부장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야! 퇴근해! 퇴근! 집에 가!”
“……일이 끝나야 가죠.”
“실장님이 퇴근하라시잖아!”
“퇴근하란다고 퇴근이 됩니까? 할 일이 있는데.”
“됐으니까 가! 내일 나와서 해! 책임 내가 질 테니까, 내일 전부 오후 출근해!”
“……진짜요?”
“가라니까!”
그제야 분위기가 좀 풀린다.
실장실 안에서 밖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현주가 피식 웃었다.
‘다들 고생이 많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회사를 굴리다 보면 한 번씩은 모든 상황을 젖혀두고 속도에 올인해야 할 때가 온다. 고생하는 부분은 성과금과 휴가로 보충해 줄 수밖에 없다.
“하…….”
낮게 한숨을 내쉰 이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걸어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조금 시원하게 느껴지는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잠이 깨는 느낌에 이현주가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야경이 그녀의 한눈에 들어왔다.
‘신기하지.’
불과 2년 전만 해도 그녀가 이곳에서 이리 일할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 인생 모르는 거라더니.”
물론 총회의 회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녀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중걸의 손녀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총회의 회주가 된다. 그리고 총회를 좀 더 현대적인 곳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그게 그녀가 꾸던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갑작스레 난입한 강진호는 그녀의 꿈을 모두 날려 버리고 그녀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그래서 지금이 아쉽냐고?
천만에.
이현주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던 꿈에서의 삶보다 지금의 삶이 그녀에게 좀 더 맞고 행복하다고 자신하고 있다.
게다가 영남회와 투닥거리며 한국의 패권을 노리던 총회 정도는 그녀가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총회는 이현주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곳이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먹이를 삼켜 배가 터져 죽고 싶지는 않다.
‘내가 있는 데서 최선을 다하면 돼.’
때때로 과거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중걸의 손녀 이현주보다는 총회의 실장 이현주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똑똑.
“네.”
문이 살짝 열렸다.
“실장님, 그럼 저희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얼른 퇴근하십시오.”
“네. 그럴게요.”
문이 닫힌다.
이현주가 슬쩍 미소를 짓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것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스스로의 행복을 찾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의 유지를 잇지 못한 그녀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중걸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현주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똑똑.
이현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끼이익.
문이 열린다.
“아직 퇴근 안 하셨나 봐요? 얼른 가세요.”
“퇴근을 논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지.”
이현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낯선 목소리여서?
아니.
오히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여서다.
그녀가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오랜만인군.”
익숙한 것은 너무 오래 봐온 얼굴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유는 말라 버린 모습이 과거와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너…….”
“커피면 돼. 믹스 정도는 있겠지? 이런 좋은 건물에서 일하면서 커피 한 잔 내줄 수 없다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군. 너무 섭섭할 것 같아서 말이야.”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이현주는 자신의 앞에 선 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성휘.
이중걸의 수제자.
그녀의 사형.
저 강진호를 적대하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자.
그리고…….
‘총회의 적.’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려보자, 이성휘가 살짝 양손을 들어 올렸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물론 우리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설마 내가 너를 해치러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또 섭섭하군.”
“그럴 능력은 있고?”
“능력이라…….”
이성휘가 피식 웃는다.
“네가 모시는 분에 비한다면 모기만 한 능력이겠지.”
시니컬한 목소리였다.
이현주가 자리를 권하지 않자, 이성휘가 스스로 의자를 빼 앉았다.
“총회는 손님 대접이 박하군.”
“여긴 MK야.”
“다를 게 있나?”
이성휘를 노려보던 이현주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쪽으로 가 커피 포트를 눌렀다. 캡슐 머신이 우웅 소리를 내며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컵에 차오른 커피를 든 이현주가 이성휘에게 커피 잔을 내밀었다.
“여기 있어.”
“시럽은 없나?”
“없어.”
“달달한 게 좋은데 말이야. 커피든 사람과의 관계든.”
이성휘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 비틀린 미소를 보며 이현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한때 이성휘는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이중걸의 수제자로서 그의 입지는 더없이 확고하고, 젊은 무인들 중에서는 그보다 앞서가는 이가 없었다.
이현주가 아무리 노력했다 해도 결국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총회의 회주가 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성휘였을 것이다.
구김 없고 밝은 성격, 그리고 사람을 이끄는 데 충분한 친화력까지.
세상의 밝음을 모두 모아둔 사람 같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현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이성휘에게서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음울한 어둠과 비틀려 버린 광기뿐이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 잘도 한국에 들어왔네.”
“한국인이 한국에 들어오는 게 이상한가?”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네 목이 당장 비틀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모험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지.”
이성휘가 어깨를 으쓱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고, 옛 친구와 회한을 나누고 싶어 온 건 아니니까. 어차피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눠도 달라질 건 없지. 그렇지 않나?”
“그럼 왜 왔는데?”
“여러 가지 때문에.”
이성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군.”
꼭 커피가 쓰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눈을 찌푸린 이성휘가 커피를 내려놓더니 이현주를 바라보았다.
“첫째로……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
“사부님을 죽인 놈 밑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다기에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었지.”
“이 이야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아,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비난하려는 게 아냐. 비난할 거리도 아니라는 건 애저녁에 이해했어. 사부가 살아 있었어도 네게 같은 걸 권했을 거다. 사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중걸의 이름을 언급한 이성휘가 살짝 쓸쓸한 얼굴을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받아들여야지. 내가 멍청하게 그걸 몰랐을 뿐이야.”
“주둥아리 닥쳐 줬으면 좋겠는데.”
“…….”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거나, 열등감이 터져서 오버를 했다든가. 그런 건 네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변명이 아니야. 일본에 붙어서 한국 무인계를 침략했을 때부터 너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자격이 없어.”
“알아. 변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성휘가 슬쩍 고개를 돌려 이현주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가에 어린 냉랭함이 이성휘를 조금 가라앉게 만들었다.
한때는 저 눈에 따뜻함이 담겨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이성휘를 이성으로 느낀 적은 없겠지만, 형제로서의 애정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 정이 담긴 눈에는 이제 차가움만이 남아 있다.
“경고하러 왔다.”
“경고?”
“총회를 떠나.”
이현주의 눈이 차가워졌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도 개소리였으면 좋겠군. 하지만 이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야. 총회를 떠나라. 아니, 무인계를 떠나. 그럼 살 수 있을 거다.”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이성휘가 가만히 이현주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을 것 같아?”
“…….”
“너희는 몰라. 진정한 무서움이 뭔지, 지금 이 모든 판 뒤에 누가 있는지.”
이현주가 눈을 찌푸렸다.
“또 간신처럼 배를 갈아탔나?”
“배가 아니야. 그분은 바다지.”
이성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푸르디푸른 바다. 그래, 그래서 창왕이시다.”
이현주의 몸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