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21
#1620.
개원하다 (5)
“만들었습니다!”
“오?”
강진호가 눈을 번쩍 떴다.
물론 회주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이에게 보낼 만한 눈빛은 아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강진호의 아주 작은 불만마저도 깔끔하게 날려 버렸다.
그리고 설사 불만이 남아 있더라도 저 몰골을 보면 차마 입을 뗄 수가 없다.
“노숙하다 왔어?”
“…….”
방진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노숙이라니요?”
“집에 안 들어간 지 얼마나 됐지?”
“보름쯤?”
“마지막으로 씻은 건?”
“기억이 잘…….”
강진호가 빙그레 웃었다.
노숙자의 사전적 의미는 집 없이 사는 사람에 가깝지만, 집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고, 제대로 씻지도 않는 사람이 노숙자와 다를 게 뭔가.
“여하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지 않다니까요!”
방진훈이 손에 들고 온 A4 용지 더미를 강진호에게 내밀었다.
“이게?”
“완성한 비급입니다!”
“…….”
강진호가 아연한 얼굴로 A4 용지 더미를 바라보았다.
시대가 바뀌더니 이제는 비급이 이런 취급을 받는 세상이 오는구나.
예전 중원에 있을 때, 대충 종이에 비급을 쭉쭉 갈겨 오는 놈이 있으면 개박살이 났을 텐데.
슬슬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강진호가 비급…… 아니, A4 용지 더미를 집어 들었다.
“스테이플러라도 좀 박아 오지.”
“두꺼워서 안 됩니다.”
“그럼 펀치라도.”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되레 버럭질을 해 대는 방진훈의 기세에 강진호가 움찔했다.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고 그러나.
한숨을 내쉰 강진호가 가만히 비급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한참을 읽게 된다.
“흐음.”
비급을 읽어 내리며 강진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습니까?”
“아직. 마저 읽고 이야기하지.”
“……예.”
방진훈이 초조한 눈으로 비급을 읽는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제발.’
단언할 수 있다.
저 비급은 방진훈 인생에 다시없는 업적이 될 것이다.
음…….
경지가 높아지면 더 좋은 비급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소설을 쓰는 작가의 후기작이 꼭 높은 평가를 받지 않는 것처럼, 연구자들이 꼭 말년에 이르러서 최대의 업적을 남기는 게 아닌 것처럼 경지가 높아진다고 꼭 좋은 비급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경지는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고, 비급은 머리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그런 건 아니지만, 앞으로 방진훈이 이 이상의 무학을 창안해 낼 확률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 무학에는 방진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방진훈이 지금 이리 긴장하는 것이다.
“후욱.”
무학이란 커다란 건물과도 같다. 한 부분만 잘못되어도 건물 전체가 붕괴한다.
그나마 외장이 문제가 생긴다면 적당히 보완하고 수리할 수 있지만, 기둥에 작은 흠집이라도 있다면 비급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방진훈은 긴장한 얼굴로 강진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흠.”
강진호가 A4 용지 더미를 내려놓더니 방진훈을 바라보았다.
“자잘하게 문제가 많군.”
“……그, 그럼?”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훌륭해.”
“아!”
방진훈이 혼이 빠진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몇 가지만 보완하면 완벽해질 것 같군.”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 이상의 게 나왔군.’
강진호 역시 정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무학이란 만류귀종. 마공의 대종사인 그지만, 정공에 아예 문외한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가 만들어내는 정공은 기본적으로 마공을 베이스로 할 수밖에 없다. 무학 하나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건 어려울 게 없지만, 총회의 무학을 정립하여 일련의 흐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당장 쉬운 길을 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방진훈에게 조언을 주는 정도로 역할을 제한했는데, 방진훈이 그의 생각 이상으로 좋은 걸 들고 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동안 총회가 활용해 오던 정공에 여러 가지가 섞여 들어갔다.’
베이스는 정공이다.
하지만 그 끝까지 정공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강진호의 마공과 바토르의 외공, 그리고 위긴스의 실전주의까지.
달라진 총회에서 방진훈이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들의 정화가 녹아 있는 비급이다.
물론 많은 것을 녹여냈다고 해서 굉장한 비급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절하게 중용을 지켜내며 조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강진호가 묘한 눈으로 방진훈의 비급을 바라보았다.
‘무학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군.’
방진훈을 둘러싼 환경이 무학에도 영향을 준다는 건 무척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그, 그럼 보완은 얼마나?”
“두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 그렇게나 빨리요? 저는 몇 달을 그것만 잡고 끙끙댔는데?”
“내가 이걸 만들려고 했다면 나도 몇 달은 걸렸겠지. 원래 옆에서 보는 사람이 훈수 두기 좋은 법이니까.”
“마공이 너무 섞이면 안 됩니다.”
방진훈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공을 배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총회 전체의 무학이 마공과 비슷한 스타일로 흐르게 되면 다양성이 사라집니다. 그건 당장 앞만 보는 일입니다!”
“걱정할 것 없어. 내 무학을 섞을 생각은 없으니까.”
방진훈의 말에는 강진호도 동의한다.
“그리고 굳이 섞을 필요도 없어. 이미 충분히 실전적인 것 같으니까.”
“그럼…… 그럼 다행이고요.”
방진훈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 같다. 자꾸 눈이 감기가 몸이 나른해진다.
“고생 많았어. 이제 좀 돌아가지.”
“바로 작업하실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럼 완성되는 것까지는 좀 보고 가겠습니다.”
“파일이…….”
“메일로 전송해 드릴게요.”
“…….”
이제는 하다하다 비급을 메일로 주고받는 시대가 왔네. 이러다가 나중에 총회 전용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나오는 것 아닌가?
불편하게 장서각 뒤지지 마시고, 이제는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편히 비급을 열람하세요.
……참 잘도 돌아간다, 잘도.
강진호가 달라진 세계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하는 와중, 방진훈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피곤할 텐데, 가서 좀 씻고 오지?”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러는데.”
강진호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자, 방진훈의 눈썹이 실룩했다.
“같은 남자끼리 뭘 그렇게 따져 댑니까!”
“남자는 코 없나?”
“이게 다 비급을 만들기 위한 영광의 상처들인데!”
“알았으니 치료받으라고!”
방진훈이 충격받은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양반이 이렇게 말이 착착 돌아오는 양반이 아니었는데? 언제 언어영역이 이리 올랐지?
“신경 쓰이니까 가서 씻고, 옷도 좀 갈아입고 와. 인생의 역작이 탄생하는 순간 아냐?”
역작이라는 말에 방진훈이 킁,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목욕재계를 하고 올 테니, 그동안 완벽하게 정리해 주십시오.”
방진훈이 일어나 성큼성큼 나가 버리자, 강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메일을 켜 방진훈이 보낸 파일을 연 강진호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참, 이것도 미리 해둬서 다행이지.’
현대 문물에 적응하지 못하던 강진호다. 심지어 스마트폰도 얼마 전까지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런 그가 워드를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타자 속도를 가지게 된 건 생각해 보면 다 게임 덕분이었다.
“이래서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없다는 거로군.”
강진호의 시선이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기며 강진호의 손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끝났습니까?”
“얼추.”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고는 프린트를 눌렀다.
“……새로 한 묶음 넣어야겠는데.”
구결이 워낙에 많다 보니 거의 사전급 두께가 나왔다.
“글자 크기를 좀 줄일 걸 그랬나 봅니다.”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가독성이 나쁘면 별 의미가 없겠지.”
두 사람이 프린트기를 보며 살짝 침묵했다.
“회주님.”
“응?”
“감사합니다.”
“…….”
강진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뭐가?”
“회주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런 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대충 이중걸이랑 투닥거리다 죽거나, 김석일이랑 투닥거리다 죽었겠죠.”
“둘 다 쓰러뜨렸을 수도 있지.”
실제로 그 확률이 꽤 높다고 생각하고.
“그럼 일본 놈들한테 죽었겠죠.”
아…….
그건 답이 없네.
방진훈이 살짝 어색하다는 듯 콧잔등을 쓱 문질렀다.
“뭐, 생각 이상으로 잘 풀렸을 확률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로 달라질 게 없었을 겁니다. 저는 저놈들을 막아낼 힘이 없었으니까요.”
“…….”
“그런데 회주님 덕분에 이런 무공도 만들어보고, 총회가 발전하는 것도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새삼스레.”
“사람이 그런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강진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공치사를 듣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다 나왔다.”
“예!”
방진훈이 프린터로 가 A4 용지 더미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비급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비급의 내용을 그려내며 완전하게 몰입한다. 강진호가 커피 한 잔을 뽑아 와 그런 방진훈의 건너편에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우우우우!”
방진훈이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라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고 머뭇거린 방진훈이 탄식하듯 말했다.
“이걸 만드셨네요.”
“방 이사가 만든 거지.”
“회주님이 아니었으면 못했을 겁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이건 방 이사가 홀로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이걸 만들 수 없어. 그러니 이 비급은 온전히 방 이사의 것이지.”
방진훈이 입을 꾹 닫았다.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 말이 자신의 고생을 보답해 주는 것 같았다.
이 상승의 무학의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름 하나 지어주십시오.”
“내가?”
“예. 회주님이시니까.”
강진호가 고소를 머금었다.
“본인이 만든 건 본인이 이름 붙여야지,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야.”
“…….”
방진훈이 한참 동안 비급을 바라보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다.
“조화공이라고 하겠습니다.”
“조화공(調和功)?”
“예.”
강진호가 살짝 불만을 표했다.
“밋밋한 이름이로군.”
“그게 좋습니다. 저는 이게 총회를 상징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총회의 회원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하게 익혀야 하는 베이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은 심심한데, 뜻은 거창하네.”
강진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그리고 아마 저 이름에는 방진훈 나름의 배려가 녹아 있을 것이다.
만든 것은 본인이지만, 이 무학이 탄생할 수 있던 건 총회의 강진호나 바토르, 그리고 위긴스와 장민의 도움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 모든 것이 조화된 무학이라는 의미일 테고.
참 융통성 없는 사람이다.
“전수를 서둘렀으면 좋겠군.”
“예, 회주님.”
강진호가 주먹을 꾹 쥐고 환희를 참아내는 방진훈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총회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또 하나의 무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