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40
#1639.
다시 보다 (4)
박상기 전무가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를 이어갔다.
“다행히 일차 목표는 이룬 것 같습니다. 성공적으로 일본 시장에 파고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홍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성공적?”
“예, 회장님. 일차 목표인 시장 점유율 3%를 달성…….”
“그게 일차 목표라고 할 수 있어?”
정홍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박상기가 움찔하여 목을 움츠렸다.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은 박상기를 보며 정홍근이 이를 갈아붙였다.
“자력도 아니고! 협력사의 점유율을 가져오는 일인데 겨우 3% 달성해 놓고 지금 좋다고 자찬을 해? 이 무능해 빠진 놈들!”
“……죄송합니다, 회장님.”
박상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그는 나름 억울할 만했다.
3%라고 하면 무척 귀엽게 느껴지는 수치지만, 실제 일본 유통의 3%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한국에서도 유통 시장의 1%를 더 차지하기 위해 많은 업체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보다 더 큰 시장인 일본에서 3%라는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게 쉬운 일일 리가 있겠는가.
“뭐가 이렇게 지지부진해?”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회장님.”
박상기가 뒷말을 잇기도 전에 정홍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쉬워? 그럼 쉽다고 생각하고 들어갔어? 우리보다 큰 시장을 먹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그게 쉬웠으면 대한민국에 망하는 회사가 어딨고, 말아먹는 놈들이 어디에 있어! 내가 그래서 회사의 사력을 다해서 달려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그만큼 누누이 말 했건만!”
정홍근의 시선이 박상기를 떠나 다른 사장단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들이 찔끔하여 고개를 푹푹 숙였다.
이미 정홍근의 생각에 반대하던 사장단들이 줄줄이 잘려 나가는 사태가 벌어진 지 오래다. 저 서슬 퍼런 강단에 맞설 만한 이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3%면 엄청난 것 아닌가.
‘저리 쉽게 3%를 달성할 줄 알았으면, 아무도 반대 안 했지.’
일본 유통 점유율을 3% 장악한 게 사실이라면, 근 10여 년간 태광이 벌인 사업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정홍근의 말에 반박을 하겠는가.
반대를 무릅쓰고 이리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 만큼 태광 내 정홍근의 입지는 이제 더 이상은 어찌해 볼 수 없는 난공불락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듣고 있어?”
“예, 회장님!”
그 모습에 정홍근이 혀를 찼다.
“늙은 놈들이 변해가는 세태에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도전적이어야 하고, 누구보다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지금까지 너희들이 해온 대로 한다면 누구도 성공할 수 없다는 뜻이야! 핸드폰도 없던 시대에 성공한 것들이 어디 다 낡아 빠진 규칙을 가져와서 지금에 적용하려고 해!”
사장단이 찔끔하여 정홍근의 눈을 피했다.
“사장이랍시고, 젊은 놈들이 가져오는 아이디어 쳐내면서 하던 짓만 하려는 놈이 누군지 내 지켜본다. 사장이란 책임을 지는 자리야. 적당히 앉아서 거들먹거리면서 월급 타 가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야! 알았어?”
“예! 회장님!”
정홍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 이런 것들을 믿고 있었다니.’
강진호가 그의 젊음을 되찾아준 이후, 세상 모든 것이 바르게 보였다.
견고하게 잘 세워둔 성벽이 알고 보니 바람이 숭숭 새고 점토가 부스러지는 돌 더미라는 걸 알게 되니, 이제 더는 손을 놓고 있기가 어려워졌다.
“중요한 건 생존이야.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이 바닥은 밀려나는 순간 망하는 거야. 현상 유지 같은 소리는 입에도 올리지 마! 오로지 성공하느냐, 죽느냐야. 알았어?”
“예!”
“그럼 빤히 앉아서 월급 축내지 말고, 가서 제대로 된 걸 만들어와! 그리고! 일본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오면 하고 있는 일 다 집어치우고 그것부터 최우선적으로 지원해.”
사장단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홍근이 눈을 찌푸렸다.
“다들 나가봐.”
“예, 회장님.”
사장들이 분분히 자리를 비우자, 정홍근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찰칵.
박상기가 재빨리 달려와 정홍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개판이로군.”
정홍근이 눈을 찌푸렸다.
그는 알고 있다. 사람에게 수명이 있듯이 기업에도 수명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이 성장하고 노화를 겪듯이 기업도 성장하고 노화를 겪는다. 기업 또한 결국 사람이 모인 곳이니,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감겨졌던 눈을 강제로 뜨고 나니, 태광이라는 회사가 얼마나 낡아 있는지 느껴졌다. 그가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어찌어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죽고 난다면 태광은 빛을 잃고 몰락할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이만큼이나 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나?”
“……잘 굴러가는 회사에서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요.”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위험을 무릅쓰기 싫다가 아니라?”
“…….”
박상기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말도 그리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정홍근이 눈을 찌푸렸다.
‘잘못 키웠어.’
이건 어쩌면 그가 가진 원죄에 가깝다.
태광은 근본적으로 힘 있는 이들이 원하는 분야를 긁어주며 커온 회사다. 다시 말하자면, 회사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콘텐츠를 고객에게 검증받는 방식이 아니라, 힘 있는 이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온 회사라는 뜻이다.
그러니 바닥부터 자생해 온 기업들에 비하면 홀로서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개혁이 없다면 여기서 더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인적 쇄신이라, 인적 쇄신…….”
정홍근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놈의 인적 쇄신을 내 입에 올리게 될 줄이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회장 놈들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아랫사람을 갈아 치워야 한다며 지껄이는 말이 바로 인적 쇄신이다. 말이 좋아 인적 쇄신이지, 실제로는 적당히 머슴 놈들을 갈아 치워 돈을 더 벌어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건만, 입에서 그 혐오스러운 말이 맴도는 걸 보니 정홍근도 갈 때까지 간 모양이었다.
“회사의 불만분자들 모아봐.”
“예?”
“불만분자 몰라?”
“……당연히 압니다만, 그런 이들은 왜?”
“그놈들이 지껄이는 게 냉정한 평가니까.”
정홍근이 눈을 찌푸렸다.
세상 어디나 불만분자는 있는 법이다.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에도 시스템과 사람에 불만을 가지고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이들은 반드시 있다.
그럼 그들을 중용해야 하는가.
천만에, 그건 아니다.
막상 제대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올려놓으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온갖 핑계를 찾아내는 타입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만은 가치가 있다. 하루 종일 뭐가 문제인지만 찾아내는 이들이다 보니, 때때로 보통 사람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 놈들 다 한데 끌어모아서 팀 하나 만들고, 회사의 쇄신 안건 올려봐. 대신 팀장은 능력 있는 놈으로 붙여서 개소리는 걸러내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간단한 지시를 내린 정홍근이 눈을 살짝 감았다.
‘나쁘지 않아.’
예전이었다면 이 간단한 회의 한 번으로도 체력을 소모해 피곤함을 느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골치가 아플 지경이지만, 그의 육체는 어서 더 일을 달라는 듯이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넘치는 체력에 만족한 정홍근이 담배를 깊이 빨고는 눈을 다시 떴다.
“일본 쪽의 문제가 뭐야?”
“아무래도 국가 간의 문화 차이가 있습니다.”
“……빤한 소리 늘어놓지 말고.”
박상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물류는 느려 터져 도무지 한국 시스템을 소화하지 못합니다.”
“일본인들은 일을 하는 동안에는 나름 근면한 걸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느려 터지다니.”
“국민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택배를 반드시 본인이 수령해야 합니다. 집에 사람이 없으면 택배를 두고 갈 수가 없습니다.”
“경비실이 있지 않나?”
“자가가 많고 아파트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 일본이다 보니 경비실이라고 할 만한 곳이 크게 없습니다. 문 앞에 두고 가는 것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몇 번이고 재방문을 해야 합니다.”
“허허.”
정홍근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택배가 시작되었을 때 만든 규칙 같은데, 그걸 지금까지 고수한다는 말인가?”
“예. 일본이니까요.”
정홍근이 미간을 좁혔다.
저 ‘일본이니까요’라는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한때 일본은 정말 선진적인 나라였다.
아시아의 어떤 국가도 감히 일본을 따라가지 못하던 시절은 분명 존재했다. 그 시절, 정홍근의 눈에는 일본이 너무도 대단한 나라로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대단한 나라지.’
하지만 낡았다.
일본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을 너무 과신하고, 그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삶에 너무 익숙해졌다.
21세기에 현금이 없으면 물건을 살 수 없는 나라라니.
이제는 중국조차 휴대폰 결제로 넘어가는 세상에서, 일본은 여전히 그들이 80년대에 완성해 둔 삶을 고수하고 있었다.
새삼 그 사실을 느낀 정홍근이 미묘한 고소를 머금었다.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하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는소리를 이해해 주겠다는 말은 아니야. 언제 어디서든 해결책은 있는 법이지. 문제가 생겼을 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놈들은 절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옳은 말씀이십니다.”
정홍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중간 보관소를 설치한다든가, 그게 아니면 야간 택배를 해본다든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 어느 것 하나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동원해 봐. 지금은 점유율보다는 전국적으로 먹힐 수 있는 확연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게 우선이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가봐.”
“예, 회장님.”
박상기가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정홍근이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면목이 없군, 면목이 없어.”
그가 직접 나선 일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과보다 최소한 배는 넘는 성과를 만들어내야 그가 가진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그래야 강진호 앞에 가서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그의 쓸모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은 인원을 조금 더 늘려야겠어. 그리고 일본의 정치인들도 조금 만나봐야겠군.’
저쪽에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줬으니, 이제는 그가 명분과 법률을 해결할 때였다.
정홍근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이미 예전에 말라 비틀어져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의 야성이 슬금슬금 그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전화를 꺼낸 그가 이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이 실장. 나 정홍근이오. 몇 가지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를 했는데…….”
강진호나 총회와는 별개로 MK 역시 자신들의 일을 차분히 이뤄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