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42
#1641.
움직이다 (1)
“말한 대로 준비는 했네.”
“감사합니다, 마스터.”
마스터가 위긴스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크.’
그 눈빛을 마주한 위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지금 나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을 표정으로 전하듯 말이다.
“각국의 나이트들을 소집할 수는 없겠지만, 그 휘하 기사단들의 정예를 모조리 끌어모아 새로운 기사단으로 만들었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스터?”
“유로피언 나이트는 어떻겠는가?”
“끔찍한 이름이군요. 차라리 나이트 오브 라운드로 하시지요.”
“원탁의 기사?”
“예.”
“끔찍하긴 마찬가지로군. 차라리 메리 고 라운드가 낫겠어.”
“회전목마라…… 뭐, 그것도 원탁이긴 하지요.”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에 모은 기사단들에게 원탁의 이름을 주어 대표성을 띠게 하려 했지만, 마스터는 역시나 그의 수작질에 넘어가 주지 않았다.
‘이래서 마스터지만 말이야.’
그를 바라보는 마스터의 눈에 희미한 적의가 보였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수능란한 마스터가 저만한 적의를 보인다는 건 이미 마스터의 마음속에서 위긴스는 더 이상 동료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거, 조금 섭섭하군.’
아무리 그가 원탁에 한 짓이 있다지만, 한때는 그의 후계자로서 마스터의 자리가 거의 확정되어 있던 위긴스가 아닌가.
오늘의 친구가 내일이 적이 되는 게 세상이라지만, 저토록 적의 어린 시선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씁쓸한 마음에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궁금하군.’
과연 저 적의는 위긴스가 원탁에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나오는 감정인가, 아니면 그가 마스터의 것을 빼앗으려 들기 때문에 나오는 감정인가.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변한 만큼 마스터도 변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그들이 마주 앉은 사이의 공기가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위긴스를 겸연쩍게 만들었다.
“여하튼 무리한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리한 건 아는 모양이군.”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상대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화법을 구사하던 마스터다. 위긴스는 수십 년간 마스터를 알고 지내면서 그가 이렇게 쏘아붙이는 유형의 말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하긴 달라진 건 그것만은 아니지.’
과거, 위긴스는 사람의 성향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사실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얼음장을 하나 씌운 것처럼 차가운 마스터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잖은가.
“딱히 우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스터가 슬쩍 위긴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나는 과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는 걸 잊지 말게.”
“물론입니다, 마스터.”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딱히 엄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스터가 아무리 과거와는 다르게 원탁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다고는 하나 공화정의 형태를 수백 년간 띠어온 원탁이 하루아침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각국이 가지고 있는 기사단을 강제로 각출한다는 건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다만…….”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저희만 좋자고 하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마스터. 결국 이건 마스터에게도 이로운 일일 텐데요?”
“…….”
마스터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지금 원탁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강진호가 있기 때문이다.
“병력의 공백이나 아랫놈들의 불만 같은 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잖습니까. 로드께서 삼왕계에 패하게 된다면, 마스터는 그들의 침략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 테니까요.”
그전에 나이트들의 반란으로 목이 잘릴 테니까.
노골적으로 쏘아붙이는 위긴스의 말에 마스터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젠 더는 원탁에 대한 애정 따위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군.”
“그런 마스터는 어떻습니까? 영국에 대한 애정이 남아 계십니까?”
“……무슨 의미인가?”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딱히 대단한 의미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말하고 싶은 것뿐이지요. 제가 각박해 보이겠지만, 이건 그동안 원탁이 전 세계의 다른 무인계들에게 똑같이 하던 일이 아닙니까?”
“…….”
“그저 지배하던 입장에서 지배받는 입장이 된 것뿐입니다. 저희가 과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지요. 지배한 무인계에서 강제로 무인을 각출하고 그들을 화살받이로 쓰는 건 원탁이 잘하던 짓 아닙니까?”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이네.”
“네, 맞습니다. 지금 마스터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 의무를 지키는 일이지요.”
위긴스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 눈웃음을 본 마스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제가 마스터라면 그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에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각출해 원탁을 지원하겠습니다.”
“사람을 호구로 만들 셈인가?”
“그게 나쁜 겁니까?”
“…….”
위긴스가 가만히 마스터를 보며 말했다.
“마스터, 최근의 마스터께서는 영 제가 알던 마스터답지 않으십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요. 마스터께서 차가워지셨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명하지 못하다는 의미지요.”
“……내가 현명한 적이 있었다니, 그것참 다행스러운 이야기로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마스터라면 그런 비꼼으로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정보를 차단하려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
위긴스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심마인가?’
동양 무학에서 말하는 심마. 하지만 서양 무학이라고 해서 심마가 없다는 법은 없다.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과한 수련과 연구를 반복하다가 미쳐 버린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나 광인이 되어버린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전해지고 있으니까.
어쩌면 지금 마스터의 상태가 심마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위긴스였다.
“우선 제 말을 침착하게 들어주십시오, 마스터.”
“음.”
“이제 마스터는 로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총회 역시 원탁의 지원 역시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배를 탔다고 하지 않습니까.”
“…….”
“내릴 수 없다면 협조하십시오. 과감하게 협조하십시오. 마스터께서는 로드를 알잖습니까. 그분이 받은 것을 보답하지 않는 분이십니까?”
마스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분이 그럴 분은 아니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그걸 알고 있는가?”
“예?”
마스터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명군은 꽤나 많았지. 황제 개인이 위대한 경우는 자네가 아는 경우보다 배는 많을 걸세.”
위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그들은 진짜 명군이 되지 못했지. 왜인 줄 아는가?”
“글쎄요?”
“명군이란 그를 받쳐 주는 신하가 간신이 아닐 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지.”
위긴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걸세.”
“물론입니다, 마스터.”
위긴스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찔림 없어 보이는 그 표정에 마스터가 눈을 찌푸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마스터의 눈에는 위긴스가 간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위긴스는 강진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고, 강진호의 뜻과 반대되는 일도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다.
강진호가 원탁의 상황을 모두 알았다면, 마스터를 압박하여 병력을 얻어내는 일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긴스를 간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위긴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당당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이 치졸하고 악랄할지는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오직 총회와 로드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일들이다. 그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 떳떳할 수밖에.
“말을 섞어봐야 의미가 없겠군.”
마스터 역시 위긴스가 동요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하지. 일차로 선별한 기사단은 자네가 끌고 한국으로 가게. 나는 저들을 다시 쥐어짜 보지. 그리고 가용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내가 직접 한국으로 가겠네.”
“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내가 비록 현명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인간도 아니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네.”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야 마스터지.
“다만 위긴스, 하나는 명심하는 게 좋을 걸세.”
“말씀하시지요.”
가만히 위긴스를 노려보던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자네의 손에 놀아나 주는 이유는 지금이 전시이기 때문이네. 총회가 패배한다면 나 역시 끝장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마스터가 차가운 눈으로 위긴스를 노려보았다.
“해주지. 악역이든 독재자든 뭐든 해주겠네.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 다만!”
마스터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고도 내가 지금처럼 고분고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회주님께 협력한 이유가 단순히 내 부귀영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말게. 나는 원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물론입니다, 마스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마스터 역시 알아주셔야 합니다. 총회의 그 누구보다 제가 원탁을 아끼고 있음을 말입니다.”
마스터가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위긴스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웅은 하지 않겠네.”
“당연한 말씀을.”
“조심해서 돌아가게.”
마스터가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방에 남겨진 위긴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지.’
수십 년간 몇 천 번, 몇 만 번은 더 보았을 천장이 이리 낯설어 보이다니 말이다.
‘마스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으시겠다니요.
‘역시 변하셨군.’
과거의 마스터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필요 없는 말을 해서 자신의 목을 조를 필요가 없다.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이 앞에서 이를 드러낸다는 건 빨리 자신의 목을 칠 방법을 강구해 달라는 조름에 불과하니까.
과거의 마스터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를 숨겼겠지.
노쇠했기 때문이든, 그게 아니면 정말 심마 때문이든.
‘저 판단력으로 원탁을 계속 이끌어 나가는 건 무리겠지.’
위긴스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떻게 할까.’
누군가 적절히 다음 대의 마스터가 되어서 원탁을 이끌어줘야 하는데…….
“내가 할 수밖에 없나.”
귀찮은 일이다.
정말 귀찮은 일.
위긴스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토록 바라던 때에는 결코 오지 않던 일이 이제는 이리 귀찮은 일이 되어버리다니. 결국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건 선택이로군.”
강진호를 선택한 것은 그의 인생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