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47
#1646.
벌어지다 (1)
가볍게 손을 뻗어낸다.
아니, 뻗는다기보다는 털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마치 파리를 쫓는 듯이 가볍게.
하지만 그 손짓이 만들어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벼운 손짓이 만들어낸 거대한 충격파가 그의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아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이커창은 그 광경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홍왕을 모셔왔다.
그러다 보니 홍왕이 무학을 사용하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홍왕이 대규모의 무인을 상대로 제대로 된 무학을 사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동안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놀라운 것인가, 아니면 홍왕께서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지신 것인가.’
대답은 빤하다.
아마 둘 다겠지.
과거의 홍왕도 이런 이적을 펼쳐 보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간단한 손짓만으로 이런 광경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보라.
그 가벼운 일격에 전위를 맡고 있던 일백의 무인이 핏덩어리가 되어 날아갔다.
저 한가운데에 폭탄이 떨어졌어도 저런 결과는 아닐 것이다. 저 공격을 받고 있는 이들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무인이다.
아니, 그냥 무인도 아니다. 창왕이 심혈을 다해 키워낸 창왕계의 정예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홍왕의 손짓 한 번을 감당하지 못하고 핏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이걸 ‘이적’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신을 믿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홍왕의 어떤 질문을 하건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게 그의 역할이다.
“홍왕이시여,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홍왕을 믿을 뿐입니다.”
홍왕이 하핫, 웃었다.
“입에 기름칠을 했구나.”
“속하의 진심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제는 많은 이들이 더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은 그저 누군가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차이커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리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래도 과학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니까요.”
“증명할 수 없는 건 믿지 않는다라……. 정말 그렇더냐?”
“…….”
차이커창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견도 하나의 대답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차이커창은 아직도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은 수많은 미신과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차이커창이 고개를 들어 홍왕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세상과 무인계가 유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홍왕이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렸다.
“과학이 없던 시대에 살던 이들이 이런 광경을 보면 뭐라 말했겠는가.”
신.
그 말 외에는 필요하지 않다.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강림한 화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문화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아직까지 세상에 전해져 온다.
“신이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존재고, 이루어주는 존재다. 그럼 내가 너에게 묻겠는데…… 차이커창, 너에게 있어서 나는 어떠한 존재더냐?”
차이커창이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홍왕께서는 이루어주는 존재십니다.”
“틀렸다, 차이커창.”
홍왕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너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의 야망을 이루어주는 것이지. 그러니 너 역시 나에게는 신이 될 수 있다.”
“홍왕이시여…….”
“가자꾸나.”
홍왕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창왕계의 무인들이 그 모습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어리석은 놈들.”
홍왕이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를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달아나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운명도 아닐진대.
“자신의 죽음조차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내가 결정해 주지.”
홍왕이 살짝 손을 뒤로 당겼다가 느릿하게 밀어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의 기류가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피, 피해…….”
“으아아아아아아아!”
공포와 혼란.
절대적인 힘을 목격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야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창왕계의 무인들이 공포와 혼란을 느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홍왕의 압도적인 권력(拳力)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대지도, 인간도, 심지어 공기조차도 장엄하게 짓누르는 황금빛의 권력 앞에서는 평등하게 짓눌릴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공명음과 빛이 사라진 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음…….”
홍왕이 그 광경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직은 부족하군.”
“……이것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차이커창이 입을 벌리고 홍왕을 바라봤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부족하다니.
“무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만, 내가 이룩한 경지를 육체가 아직 완벽하게 체화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차이커창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홍왕이 가볍게 웃었다.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구나. 조악하게나마 비유하자면, 자동차를 바꾼 것에 가깝겠지.”
“아…….”
“더 성능이 뛰어난 자동차를 운전하게 된다면 전보다 기록은 빨라지겠지. 하지만 그 차의 성능을 완벽하게 뽑아내기 위해서는 운전자가 차에 익숙해져야 하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홍왕이시여.”
“내가 지금 그런 상태다.”
홍왕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벽에 막혀 있었다. 이제는 벽을 뚫어냈지만, 아직은 내가 가진 무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오랫동안 하나의 검만을 써오던 검수가 새로운 검에 적응하듯 나도 나의 무위에 적응을 해야 한다.”
“아아…….”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홍왕의 경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해할 것은 하나.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신가.’
“걱정할 것 없다.”
홍왕의 말에 차이커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상태로도 창왕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아니,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홍왕이 앞을 보았다.
“저들이 나를 도우려 하는구나.”
그의 눈에 차마 달아나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창왕계의 무인들이 보였다.
“어리석은 것들. 차라리 달아났더라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왕을 맞이했을 텐데, 저 무모한 충성심이 나를 돕는구나.”
차이커창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모한 충성이라…….’
홍왕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홍왕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도 위대하고 너무도 드높기에 평범한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건 충성심 같은 게 아니다.
공포.
세뇌에 가까운 공포가 저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이상한 것도 아니지.’
맞서도 죽고 물러나도 죽는다면, 차라리 깔끔한 죽음 쪽을 택하는 게 이성적이다. 이곳에서 물러난 이들은 창왕의 손에 죽는다. 그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를 감안한다면, 저들은 오히려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이커창이 그의 마음에 하나 남은 궁금증을 풀어냈다.
“홍왕께서는 이제 더는 적수가 없는 경지에 오르신 겁니까?”
홍왕이 크게 웃었다.
“적수라, 적수. 그럴 리가 없지.”
“……예?”
“마왕이 있지 않느냐.”
“강진호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차이커창이 눈을 좁혔다.
홍왕은 창왕조차 짓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그의 적수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홍왕이 저 창왕보다 마왕을 더 높게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홍왕이시여,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건 너무 과대평가가 아닐런지요. 아무리 마왕이 강하다고는 하나 저 창왕보다 대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급.
혹여 마왕이 창왕보다 앞선다고 해도 그 차이가 클 리가 없다. 그게 차이커창의 평가였다.
“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홍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마왕을 과대평가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와 상극. 개인적인 감정을 논한다면 오히려 증오에 가깝겠지.”
“…….”
“내가 그와 나름의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가지는 건 그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성취를 이룬 이는 어떤 이라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하면 어찌?”
“과거에 본 그를 네 기준으로 삼지 마라.”
“…….”
“그는 되찾는 자. 그리고 개척하는 자.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는 자다. 지금쯤이면 과거의 나 정도는 그 날카로운 독니로 물어 죽일 경지에 올랐겠지.”
차이커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차이커창이여.”
홍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언젠가는 나조차 마왕을 감당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에 그를 죽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은 도탄에 빠질 것이고, 마왕의 손아래 신음하게 될 것이다.”
차이커창이 눈을 빛냈다.
“홍왕이시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함부로 입을 놀린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그가 강해진다면 홍왕께서는 더욱 강해지실 겁니다. 그는 결코 홍왕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흐음.”
홍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이커창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혹여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그럴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군.”
홍왕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와는 다르게 홍왕의 눈은 낮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진호.’
그를 생각하면 속에서부터 뭔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다.
평생 동안 다른 삼왕을 숙적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홍왕이지만, 강진호를 만난 뒤에 알게 되었다. 운명이 그에게 붙여준 진정한 숙적이 따로 있음을 말이다.
‘기다려라.’
중원을 정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알 수 있다.
그의 안에 신이 머물러 있음을.
이 신은 광포하게 불신자들을 먹어 치우고, 그 배를 불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종착지는 당연히 저 작은 반도에 웅거하는 강진호가 될 것이다.
‘나의 무학, 나의 삶, 그리고 나의 길은 너로서 완성된다.’
서두를 것 없다.
평생을 기다려 온 길이다. 불과 며칠을 더 기다리지 못하겠는가.
“가자, 차이커창. 우선은 창왕의 목을 딴다.”
“예, 홍왕이시여!”
홍왕이 다시 산책하듯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숨도 쉬지 못하고 떨어 대던 창왕계의 무인들의 눈에서 희망이 사라졌다.
왕과 왕.
세상을 뒤흔드는 절대자들의 충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그저 자신의 목숨을 내맡긴 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