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57
#1656.
돌입하다 (1)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강진호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천천히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자, 잠시…….”
이현수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너무 말도 안 되게 급격하게 흘러 버리자 천하의 이현수조차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현수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 상황이 아니라 차이커창의 반응이었다.
‘저놈이 이쪽으로 도움을 청한다고?’
자신이 위험에 빠진다면 배에 칼이 쑤셔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목이 잘려 나갈 상황이라도 연락을 해올 놈이 아니었다. 그런 놈이 도움을 청한다는 건 단 하나를 의미했다.
“홍왕이 당했다?”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현수에게로 모였다.
“홍왕이…….”
위긴스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상황을 되짚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껄끄러워서가 아니라 입이 열리지 않아서다.
‘그 홍왕이 당했다고?’
위긴스의 머릿속에는 아직 홍왕을 마주한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박혀 있다. 단 일격으로 그의 팔을 날려 버린, 그 패기의 화신 같은 자.
세상에 그런 무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이, 팔이 날아간 충격보다 더 컸을 지경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 홍왕이 당했다?
‘믿을 수가 없군.’
삼왕이 홍왕과 동등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총회의 무인들은 내심 홍왕이 삼왕 중 최고일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가 보여준 능력과, 그때에 비해서 더욱 강해졌을 지금을 생각한다면 이 생각이 안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홍왕이 당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들의 계획을 받쳐 주던 사고의 기반 자체를 다 날려 버리고 새로 짜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 망연한 사실에 위긴스마저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바토르는 충격으로 얼이 빠진 얼굴이고, 장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방진훈은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잡기 어려운지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 실장.”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예, 회주님.”
“어디라고 했지?”
“……예?”
무의식적으로 반문하고 만 이현수가 즉시 자신의 실책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워, 워낙 잡음이 많아서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장, 장 뭐라고 했는데…….”
“장가구.”
장민이 차갑게 말했다.
“중국어로는 장자커우. 북쪽의 도시다. 홍왕의 진격로를 감안한다면, 차이커창이 말하려 한 곳은 장자커우일 거다.”
이현수가 지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이 높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이내 그의 입으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때문일까?
지금 강진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강진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위긴스, 이현수.”
“예, 로드.”
“말씀하십시오, 회주님.”
“지금 확실한 것만 말해봐.”
“홍왕이 창왕계에 당했습니다. 차이커창은 부상을 입은 듯하고, 아마 홍왕은 아직 살아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장자커우는 홍왕의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는 도시입니다. 베이징에서 가깝기에 창왕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라 봐야 합니다.”
마른침을 삼킨 이현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마도 차이커창은 장자커우에 홍왕과 함께 은신한 채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위긴스가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어쩌면 베이징으로 이동 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가장 움직이기 힘든 곳이 베이징이니까요. 저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진호의 시선이 지도 위의 장자커우와 베이징을 오갔다.
한참 동안 지도를 바라보던 강진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봐.”
“…….”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 게 최선인지.”
이현수가 살짝 입술을 깨문다.
‘생각이라…….’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다.
우선은 과연 이 상황에 개입을 해야 하는가부터 고민해야 한다. 애초에 저 둘의 전투가 격화되면 언제든 등을 칠 준비를 하던 총회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
누구도 이 전쟁이 이렇게 단숨에 끝나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말이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는.
‘창왕.’
이현수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머리를 쓰는 것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밀린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현수다. 하지만 이번 일이 만약 창왕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한 것이라면, 그 역시 창왕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고 봐야 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삼왕이라 불릴 무력과 무인계의 모든 이들을 농락할 머리를 동시에 갖췄다?
농담이 아니다.
“우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현수 대신 위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개입을 할지부터 결정을 해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말해봐.”
“개입을 한다면 당연히 홍왕을 구출해야 합니다. 창왕에게 완전히 당해 버린 이상 홍왕도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 우리와 손을 잡을 확률이 높습니다.”
장민이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지리멸렬해 버린 홍왕계와 손을 잡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건 아닙니다.”
위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 만에 홍왕을 잡는 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홍왕계를 모조리 쳐 죽이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만한 학살이 이리 단시간에 벌어질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무인들의 기동력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마도 홍왕계의 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입니다. 창왕이 홍왕을 완전히 잡아냈다면 그들을 추격하여 끝장을 내려 했겠지만, 살아 있다면 홍왕을 잡는 데 전 병력을 동원했을 테니, 홍왕계 자체는 아직 힘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그게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이현수가 위긴스를 거들고 나섰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홍왕의 주변에 창왕계의 전 병력이 동원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홍왕을 구출하려 한다면, 그 병력을 뚫고 돌입해야 합니다.”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돌입이라…….’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다. 아직 상황이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본 위긴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개입하여 홍왕을 구출해 낼 수 있다면, 홍왕계와 연대하여 창왕계, 그리고 흑왕계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현수가 더없이 딱딱하게 굳은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홍왕은 죽습니다. 그리고 홍왕계도 결국에는 창왕의 세력에 흡수될 겁니다. 홍왕계의 병력이 웬만큼은 보존되어 있을 거라 확신하는 이유에는 이것도 있습니다. 창왕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사기를 잃은 병력을 죽이는 것보다는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려 할 겁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흑왕과 창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겠군.”
“……회주님.”
이현수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저희가 판을 완전히 잘못 읽었을 확률도 감안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지?”
“홍왕이 창왕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왕은 홍왕이다. 그가 패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리 쉽게 당한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창왕과 흑왕이 연대를 했다고 가정하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홍왕이 강하다고 해도 한 손이 두 손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창왕과 흑왕이?”
“아직은 그저 가능성일 뿐입니다. 하지만 창왕의 능력이라면 그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현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 실수다.’
가능한 모든 상황을 고려했어야 한다. 하지만 흑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수십 년이라는 정보와 과거에도 흑왕은 그저 은인자중하기만 했다는 정보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쳤다.
“연대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연대가 이뤄진 게 확실하다면, 홍왕의 세력을 흡수하는 즉시 이곳으로 몰려올 겁니다. 모든 위험요소를 정리하고 둘이 남았을 때, 자웅을 겨루려고 하겠죠.”
“우리를 정리한 후라…….”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거 재미있는 말이로군.”
방진훈이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보다 이현수에게 물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선택의 문제입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홍왕을 구출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저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위험성이 있지만, 운이 좋다면 저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걸 느긋하게 구경할 수도 있습니다.”
“복불복이라는 건가.”
“예. 그리고 홍왕을 구출해 냈을 경우에는 홍왕계와 연대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이건 최상의 경우지만…….”
이현수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반대로 적진에 쳐들어갔다가 홍왕을 구출하지 못하고 허탕을 치거나, 적을 감당하지 못했을 시에는 말 그대로 지옥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빌어먹을, 뭐가 이리 복잡해?”
방진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현수는 방진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건 어느 쪽이 좋은 방향이라고 확연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회주님.’
직위가 높기 때문이 아니다.
강진호가 강진호일 수 있는 이유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결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이현수나 위긴스가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은 방향일 확률이 높지만, 이런 경우에는 강진호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게 이현수가 가지고 있는 강진호에 대한 신뢰였다.
타닥.
담배 끝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해진 회의실에 새하얀 담배 연기만이 유령처럼 부유했다.
이윽고…….
치이이익.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강진호가 모두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강진호가 무슨 말을 할지를 기다렸다. 지금 강진호가 내리는 결정이 총회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이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선택이라…….”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딱히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군. 이현수.”
“예!”
“정부 측과 미국 측에 협조를 구해봐.”
“그럼…….”
“그래.”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왕을 구하러 간다. 아무래도 그렇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군.”
이현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고 그름?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리면 차라리 오답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격하는 쪽이 정답을 향해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백배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법이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서둘러.”
“예!”
심각하게 생각에 빠진 이사들을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리 심각할 것 없어.”
“……예?”
“어디 보자고, 그 홍왕이 우리에게 구출당하며 어떤 표정을 짓는지 말이야.”
강진호의 말에 다들 미묘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그것참.”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귀한 광경이 되겠군요.”
“그렇지.”
강진호의 눈이 지도로 향했다.
그의 눈에 거대한 중국의 모습이 들어왔다.
‘방향은 좀 다르지만.’
어쨌든 이제 시작이다.
저 거대한 땅을 손에 넣을 전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