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82
#1681.
탈출하다 (1)
쿠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뒤흔들렸다.
이현수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을 느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개새끼들.”
창왕의 병력은 온전히 장자커우로 모여들었다. 그걸 이현수의 두 눈으로 확인한, 분명한 사실이다.
위긴스가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도 시간을 끈 이유가 창왕의 병력을 완벽히 유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와 위긴스가 둘 다 확인한 일에 빈틈이 있을 리가 없다.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동맹이라며, 개새끼들.”
이현수가 이를 갈았다.
그의 눈에 북쪽으로 이동하는 기갑사단의 모습이 들어왔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 정권의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그 중국 정권은 지금 총회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권의 지시를 받는 군이 지금 국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 새끼들이 배신한 모양입니다.”
“쯧.”
위긴스가 턱을 긁으며 말했다.
“사실 배신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기는 민망한 면이 있지. 우리와 중국 정권의 동맹은 겉치레에 불과했으니까. 언제든 필요에 의해서 결렬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런 것치고는 정말 적절한 타이밍이네요.”
“흐음.”
위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공에서 전투기를 마주했을 때부터 상황이 틀어졌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건 틀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잡아먹겠다고 달려들고 있다.
“하기야 창왕이라면…….”
이현수가 그 말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국에 오고 나서부터 저 ‘창왕이라면’이라는 말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쓰이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도 창왕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납득이 되어버린다.
“그 빌어먹을 놈.”
온갖 수를 다 써서 반드시 이곳에 있는 이들을 잡아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설사 그 창왕조차도 총회가 그 사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확신에 확신을 거듭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천만분의 일의 확률에 대비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여 국경을 봉쇄한다.
“……치열하게 싸우던 와중이라면 한두 명 정도는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었을까?”
“그런 모양이군.”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은 창왕의 생각보다 조금 일찍 탈출에 성공했고,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단번에 100㎞에 가까운 거리를 벌려냈다.
만약 대규모 전송이 가능하지 않았더라면?
‘화학무기에 중독되고, 전신에 부상을 입어 걸레짝 같은 몸을 이끌고 저 기갑사단을 뚫어내야 했겠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새삼 창왕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깨닫는 위긴스였다.
“우리를 유인하기 전에 이미 포섭을 끝내놨다는 이야기겠군.”
“그렇겠죠.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를 텐데 말이야.”
“뭐, 어느 정도는 예측했잖습니까.”
“그렇지.”
이현수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홍왕이 창왕에게 당한 상황이라면 중국 무인계의 주도권은 창왕에게로 넘어간다. 그동안은 삼왕의 균형을 이용해 적당히 살아남아 온 저들도 이제는 창왕의 말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딱히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동맹의 종료 정도는 알려주는 것이 사람의 기본이지.’
이현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이동하는 기갑사단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방진훈이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해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대응책부터 마련하시죠.”
“……그렇지.”
방진훈의 말이 틀린 것이 없기에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드?”
“방법은?”
“강행하거나, 새로운 수를 찾거나입니다.”
강진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 새로운 수라는 게 있긴 한 건가?”
“로드께서 결정하시면 이제부터 필사적으로 짜내봐야겠죠. 송구스럽지만, 저도 이 상황은 딱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음.”
“하지만 조건이 바뀌었으니, 다시 최선의 수를 찾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로드께서…….”
“됐어.”
강진호가 위긴스의 말을 잘랐다.
“이건 시간 싸움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때로는 빠르게 행해지는 오답이 한발 늦은 정답보다 나을 때가 있는 법이지.”
“……그럼?”
“강행한다.”
강진호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사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럼 어떻게 은밀하게?”
“은밀은 무슨.”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지금도 창왕계 놈들이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을 텐데, 저쪽의 진영이 갖춰지기 전에 엎어야지.”
이현수가 고개를 들어 솟아오른 먼지구름을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시작한 건 저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면 지금 저곳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이들은 무인이 아니라 군인이니까.
총회는 지금까지 여러 적과 싸워왔지만, 군대와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없다. 강진호가 네바다에서 미군의 기갑사단과 전투를 벌인 적은 있지만, 그건 상호의 협의하에 벌어진 일 아니었던가.
군대와 싸운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보통 전쟁이라고 한다.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게 과연 상식을 가진 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던가.
“미친 짓이야.”
이현수가 웃고 말았다.
더 끔찍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 달리 선택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둘.
싸우거나, 아니면 기다리다 죽거나.
전쟁이고 나발이고 후자를 선택할 도리가 있나.
“생각은 나중에.”
강진호의 말에 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주의해라. 군인들과 싸울 때는 움직임이 중요하다. 멈추는 순간, 화력이 집중된다. 조준할 틈을 주지 마.”
바토르가 눈을 찌푸렸다.
“그건 나한테 불리한 것 같은데.”
“넌 웬만큼 맞아도 안 죽으니 괜찮다.”
“……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군.”
바토르가 씨익 웃었다.
강진호는 미국에서 이미 기갑사단을 상대해 본 적 있으니, 저 팁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간…….”
강진호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바토르가 손을 뻗어 강진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강진호가 말없이 의문 어린 눈으로 바토르를 돌아보았다.
“부상자는 뒤로 빠지시지.”
“…….”
위긴스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로드께서 선두에 서지 못하면 속이 타 죽는 병에 걸린 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로드가 나설 때가 아닙니다. 체력을 보존하고 회복하십시오.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서 체력을 낭비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장민 역시 격하게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마존이시여, 상처가 깊습니다. 이곳을 탈출한다 해도 마존께서 그 상처로 인해 후유증을 앓으신다면, 저희는 결국은 패하게 될 것입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어 훗날을 기약해 주십시오.”
“……뭐, 그렇게나.”
“거, 말 좀 들으십쇼.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럴 거면 회의는 뭐 하러 합니까? 만날 사람 입 아프게 떠들고 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
강진호가 멍한 눈으로 방진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만은 이사들도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방진훈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럼…….”
턱.
그 순간, 이현수가 빙그레 웃으면서 강진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일로 오십쇼, 이리로.”
“…….”
“거, 싸우지 말라는데 왜 자꾸 싸우려고 안달복달하십니까? 지금 포탄 세례 받게 생겼는데, 회주님에 앞에서 싸우면 저는 어쩌라고요. 옆에 딱 붙어서 저나 좀 지켜주십쇼.”
강진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더 황당한 것은 헛기침을 한 차이커창도 슬그머니 이현수와 강진호의 옆으로 붙고 있다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할 짓 없으시면 그놈이나 지키고 있으시면 됩니다. 거, 딱히 쓸모도 없는 놈 데리고 온다고 결정한 것도 회주님이시니까. 괜히 개죽음 안 당하게 잘 지키십쇼.”
“……쓸모가 없는 걸 왜 지키나.”
“쟤는 집에 가면 쓸모가 생기는 놈 아닙니까.”
방진훈의 신랄한 말에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어 버렸다.
“그러면 내가…….”
강진호가 그래도 뭔가 해보려고 입을 열려 했지만, 이사진들은 이미 그를 시선에서 제외해 버리고 자기들끼리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냥 박살을 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안 됩니다. 이건 시간 싸움입니다. 바토르 님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시간을 끌어 좋을 게 없습니다.”
“아니, 아니죠. 이사님의 말도 이해는 합니다만, 한 가지를 더 고려해야죠. 어설프게 후려 까서 일직선으로 뚫어버리면, 남은 병력들이 앞서가는 우리 머리에다가 포격을 갈길 거란 말이죠. 그건 피하지도 못해요.”
“으음, 그건 확실히 그렇군. 그럼 장거리 무기들은 다 제거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광역으로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까?”
“평소라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워낙 너덜너덜하다 보니…….”
위긴스가 답지 않게 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모두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장민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왜 또 시비냐, 영감?”
“뒤쪽에서 포격을 가해? 그건 그럴 정신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
“…….”
장민이 음울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따라와라. 내가 길을 뚫어주지.”
장민이 몸을 일으키자, 이사들이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떤 상황이든 강진호를 제외하면 무력으로는 장민을 이길 사람이 없다. 그러니 이럴 때는 장민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좋다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다만…….
“저게 끝이야?”
“무슨 문제라도?”
뒤쪽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강진호가 황당하다는 듯 이현수를 바라봤다.
“회의로 나온 게 없잖아. 그냥 ‘알아서 한다’가 단데?”
“평소의 회의 아닙니까.”
“……응?”
이현수가 뭘 새삼스레 구냐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총회의 회의가 다 이런 식 아닙니까. 이런저런 의견을 내고 주장하고 조율 다 해놓으면, 회주님이 ‘아, 나는 이렇게 할 건데?’ 하고 다 뒤집어 버리고 그냥 닥돌하잖습니까.”
“…….”
“그냥 주체가 좀 바뀌었을 뿐이지, 아주 총회다운 회의인데요, 뭐.”
강진호가 멍한 눈으로 앞서가는 이사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무식했나?’
왜 자신이 껴 있던 회의는 느낌이 좀 달랐다고 느껴지지?
“거, 원래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면 좀 찝찝하고 어이없고 그런 겁니다.”
“…….”
“반성하십쇼, 반성.”
강진호가 삐딱한 눈으로 돌아봤다. 그러자 이현수가 찔끔하고는 강진호를 재촉했다.
“빠, 빨리 따라붙어야 합니다, 회주님.”
“……그래.”
생각 같아서는 목을 움켜잡아 짤짤 흔들어 버리고 싶지만, 제아무리 강진호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를 할 수는 없다.
그걸 태연히 하고 있는 이놈이 미친놈인 거지.
강진호가 앞서 달려가는 이사들에게로 따라붙었다.
그 와중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회의의 방식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강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