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95
#1694.
협력하다 (4)
“흐음.”
홍왕은 창밖으로 보이는 총회의 모습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총회 안을 자유롭게 누비는 총회의 회원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점으로 보기에 이곳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홍왕과 홍왕계의 무사들이 함께 머무르는 곳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딱히 홍왕이 위엄을 내세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계파의 절대자와 일반 무사들이 함께 기거하는 곳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홍왕계와는 달랐다.
‘이곳은 무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직장이나 학교 같은 느낌이군.’
총회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서는 권위에 눌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강진호를 존중하지 않을 리는 없다. 총회의 회원들이 얼마나 강진호를 믿고 따르는지는 이미 홍왕이 그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흥미롭군.’
평생을 무인계에서 살아온 홍왕에게 있어 이런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하고도 기이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해 온 총회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들어와라.”
홍왕의 허가가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차이커창이 안으로 들어왔다.
“홍왕을 뵙습니다.”
등 뒤에서 차이커창이 고개를 숙였지만, 홍왕은 굳이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리 오거라.”
“예.”
차이커창이 걸어와 그의 옆에 서자, 홍왕이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론 차이커창은 그 앞뒤를 뺀 질문도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자유로워 보여 좋기는 하지만, 문파의 위계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더냐?”
“예.”
차이커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게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위계를 잡지 않아도 마왕이라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이가 군림하는 이상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총회는 마왕이 사라지는 순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홍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면은 간과할 수 없다.
“하나 마왕이 존재하는 한에는 그 효율이 남다르다는 말이겠지.”
“예.”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논리로 가능한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마왕과 총회는 이미 자신들의 성장세로 결과를 증명했으니까요.”
“받아들여야 하는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이커창이 차분하게 말했다.
“홍왕계의 체제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검증된 체제입니다. 새로운 체제는 언제나 등장하고, 때로는 세상을 뒤흔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홍왕이 살짝 가라앉은 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나는 최근 들어 내가 낡은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홍왕이시여.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화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홍왕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더더욱 극명해지더군. 그는 나보다 더 옛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누구 하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마왕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홍왕이시여.”
“하지만 나는 어떠한가. 높은 태사위에 앉아서 거들먹거리기만 했을 뿐, 내게 고언(苦言)을 해주는 이는 너 하나밖에 없다. 심지어 너조차도 나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을 하는 것을 망설인다.”
차이커창이 입을 닫았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차마 홍왕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마 내가 패배한 이유도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
홍왕이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차이커창, 나는 비로서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나는 마왕과의 교류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넘지 못한 벽을 넘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하나…….”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었던 거지.”
“…….”
“발전은 언제나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다. 나는 내가 얻어낸 것만 체화하고 완성시킬 수 있다면 누구도 나를 당해낼 수 없을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가 골방에 틀어박혀 내 안으로 침전하는 동안, 창왕과 마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은 거지.”
홍왕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라면 나는 영원히 저들의 뒤나 따르게 될 것이다.”
차이커창이 감복한 듯 그 자리에 부복했다.
“새로운 깨달음을 경하드립니다.”
“으음.”
고개를 숙이고 땅에 머리를 박은 차이커창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옳은 일인가?’
패배로부터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이번 패배를 거울 삼아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달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아도 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게 정말 옳은 방향인가?’
차이커창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홍왕은 패도의 화신.
그의 힘은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나오는 법이다.
한데…….
자신의 방식에 의문을 가진 홍왕이 정말 과거와 같은 힘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완성을 넘어 자신만의 무학관을 완벽하게 구축한 홍왕이 그 무학관을 근본부터 무너뜨리고 다시 재정립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이건…….’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른다.
“……홍왕이시여.”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이커창이 입을 열고 말았다.
“말하라.”
차이커창이 눈을 딱 감았다.
저질러 버린 이상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저는 홍왕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흐음?”
홍왕이 슬쩍 고개를 내려 부복한 차이커창을 바라보았다.
“일어나라.”
“저는…….”
“일어나라. 그리고 나를 똑바로 보고 말하라.”
“송구합니다! 제가 건방지게…….”
“그런 게 아니다, 차이커창.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거르고 거른 말을 원하지 않는다. 내 눈을 보고 너의 솔직한 심정을 들려다오.”
차이커창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홍왕의 말대로 홍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홍왕이시여, 누가 옳고 그른가는 결국 결과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과론?”
“예!”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번에 홍왕께서 저 간악한 창왕의 목을 베어내셨다면 홍왕께서는 자신의 방식을 의심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승리한 이가 옳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방식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겁니다.”
“음…….”
홍왕이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차이커창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방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존재할 뿐입니다. 홍왕께서 스스로의 방식으로 저들을 이겨낸다면, 그 방식이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건가?”
“감히 입에 올리기도 송구하오나, 홍왕께서는 이번 패배에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지금껏 홍왕께는 없던 일이지요.”
홍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담담하려 애써도 담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의 내부는 지금 혼돈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애써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홍왕이시여, 때로는 그저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도 답입니다. 물론 어떻게든 답을 내 이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으신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급히 찾아낸 지름길은 대부분의 경우 답이 아닙니다.”
홍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성급하다는 거로군.”
“제가 느끼기에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홍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모두 잊거라. 나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나의 상태와 홍왕계의 미래를 고민해 보겠다.”
“감읍합니다, 홍왕이시여.”
“부복하지 마라.”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으려 하던 차이커창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내가 마왕을 보며 가장 부러웠던 것이 뭔 줄 아느냐?”
“……속하는 알 수 없습니다.”
“이현수의 존재다.”
“…….”
차이커창이 미묘하게 안색을 굳혔다. 하지만 홍왕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라. 그의 능력이 부럽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능력이 이현수를 가뿐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사합니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 ‘관계’다. 마왕의 입장에서 이현수는 버러지나 다름없는 존재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짓눌러 죽여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이에 지나지 않는다.”
“…….”
“하지만 그 이현수는 마왕을 윽박지르고, 화내고, 그리고 때로는 무례할 만큼 자신의 의견을 강요한다. 그리고 마왕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지.”
그 일련의 과정은 지켜보는 홍왕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진다. 아무리 강자가 거리낌 없이 약자를 대한다고 해도 약자는 강자를 대함에 있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부담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얼마나 큰 신뢰가 필요할 것인가.
“나는 그 이현수의 존재가 부러웠다. 내게도 그런 이가 있었다면 내가 이리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곳에 와 보고서야 알았다. 내게 이현수가 없는 이유는 내가 벽을 만들기 때문이다.”
홍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나의 권위가 홍왕계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던 거지. 권위는 내세우지 않을 때 진짜 권위가 되는 법이다. 그들은 허울이 없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한다.”
홍왕이 차이커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네가 완전히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게도 부담 없이 고언을 해줄 이가 필요하다.”
“홍왕이시여…….”
“네가 그래줄 수 있겠느냐?”
차이커창이 더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홍왕을 위한 길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홍왕이 가볍게 차이커창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이커창이 그런 홍왕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홍왕께서는 변하려 하신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이유는 이번의 패배.
그리고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창왕을 오히려 밀어붙인 마왕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패배이기도 하다.’
그 역시 창왕의 지략에 완전히 휘말렸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패배,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로부터 더 강해지는 법.’
차이커창이 두 눈을 빛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마지막에 서 있는 자가 최후의 승자인 법이다. 차이커창과 홍왕은 총회와 마왕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승자의 자리에 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이라도 감수하겠다.’
주먹을 불끈 쥔 차이커창이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차이커창.”
“예.”
“계략을 짜려 하지 마라.”
“……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극명하다. 우선은 마왕을 도와 전쟁을 이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한다.”
“……홍왕이시여.”
“마왕은 거짓을 입에 올리는 자가 아니다. 그는 정말 중원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마왕의 승리가 우리의 패배는 아닐 터. 괜스레 승자가 되기 위해서 위험을 자처하지 마라.”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보거라.”
“그럼 보중하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방을 돌아 나서던 차이커창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승자가 되기 위해 위험을 자처하지 말라고?’
그 말이 홍왕의 입에서 나온다?
위화감.
극심한 위화감이 차이커창을 떨게 만들었다.
‘아니, 아니다.’
잠시 패배로 인해 혼란스러우신 것뿐이다.
홍왕은 언제고 자신을 회복할 것이다.
반드시.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차이커창의 발에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